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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76화 (76/97)

76화

연회장에 모인 이들이 죄다 고개 숙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산샤와 아드리안 그리고 조나스에게 호레스 밀란의 시선이 꽂혔다.

산샤와 아드리안에게는 어째서 고개를 숙이지 않냐고 따질 만도 한데, 호레스는 한쪽 입술을 한껏 치켜올린 기괴한 미소만 지었다.

어쩌면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행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세상이 모두 자신을 두려워하며 굴복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니,

제대로 엎드리지 않는 사람이 나오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위대하신 자신을 만난 탓에 긴장해서 못 움직이는 거라고.

연회장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독선과 오만.

호레스 밀란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 불쾌한 사람이었다.

호레스가 그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산샤는 표 나지 않게 심호흡을 했고, 아드리안이 슬쩍 손을 잡아 주었다.

지그시 누르는 힘에 긴장이 풀리는 걸 느끼며 아드리안을 돌아봤더니, 아드리안은 긴장 따위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극히 무심하고 평온했다.

그에 비해 조나스는 산샤만큼이나 긴장했다.

내내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사람이 바짝 굳어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키가 두 뼘은 더 커진 것 같았다.

어느새 속삭이는 소리도 들릴 만큼 호레스가 가까이 왔다.

머뭇머뭇 망설이던 조나스는 끄덕, 고개를 움직여 먼저 아는 척했다.

그러나 호레스는 그대로 쓱 조나스를 무시하고 산샤 앞에 섰다.

뭐야? 황제를 무시해?

못 본 게 아니다. 명백하게 봤는데 무시한 거였다.

아니, 못 봤더라도….

황제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였어야 하는 거잖아.

아무리 허수아비 황제라느니, 제국의 진짜 주인은 호레스 밀란이라느니 말하지만….

그래도 황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줄 알았는데, 그조차 아니었구나.

황제가 먼저 아는 체해줬는데, 제가 싫으면 무시해 버릴 수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산샤는 보고도 믿을 수 없어 경악했는데, 정작 조나스는 덤덤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레이디 산샤!”

호레스가 이름을 부르고 잠깐 사이를 띄었다. 자신에게 인사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이.

산샤는 어쩔 수 없이 조나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호레스를 봤다.

호레스가 입을 삐쭉 움직이는 게, 콧방귀를 뀌는 것 같았다.

‘네까짓 게, 아무리 까불어 봤자 내 손바닥 안이다.’

…라는 속내가 느껴졌다.

산샤는 간단하게 묵례했다.

그러고는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이 아이가 아직 예의를 모른답니다. 대공께서도 아시다시피 은둔 생활이 길었지 않았습니까.”

언제 왔는지 모리츠가 살살거리며 대신 변명해줬다.

그러고는 산샤에게 눈을 부라렸고, 어서 뭐든 하라고 재촉하는 손이 떨리는 것도 같았다.

모리츠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면야….

산샤는 슬쩍 무릎을 구부리며 다시 예를 표했다.

“디아머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밀란 대공.”

그러자 호레스가 거만하게 말했다.

“모리츠에게 맡겨두지 않고, 직접 초대하다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라고 스스로 감사할 시간이 올 것이야.”

무슨 말이 이래?

‘초대해줘서 고맙다’ 등등의 인사말은 아예 건너뛰어 버리나?

산샤는 대꾸했다.

“디아머드 계승 연회에 다른 사람도 아닌 밀란 대공만은 꼭 참가해주시기를 바라니까요.”

말하고 보니 이건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산샤가 계획한 것은 호레스 밀란까지 한 자리에 모아놓고 해결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내가 여기 도착한 다음에도 모리츠 자작이 보낸 초대장이 왔다는 말은 없더라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호레스가 모리츠를 보며 비죽이 웃었다.

“설마하니 배신이라는 걸 당할 줄 몰랐단 말이지.”

순간 모리츠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버렸다.

부축하는 닐스를 잡은 손에 불끈불끈 힘줄이 돋아났다.

“아…, 좀…. 아픈데, 자작님.”

닐스가 작게 속삭였다.

모리츠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자 입을 다물긴 했지만, 억울하다는 듯 실룩거렸다.

허옇게 분칠한 얼굴을 이리저리 열심히 움직였지만, 여전히 상황 파악은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호레스는 아드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인지 알아봐서 보는 게 아니라, 처음 보는 경이로운 것인 듯.

꺼림칙했다.

오만하던 눈빛은 어디 갔는지, 반짝반짝 흥미를 보이는 게 기분 나빠.

마침내 호레스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바로 그, …클라이드의 수호자로군.”

산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레스를 쳐다봤다.

목소리가 왜 저러냐?

감격에 찬 거냐?

아니, 왜?

“자네가 아름답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네. 정말 소문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미모로군.”

아드리안이 슬쩍 눈 끝으로 아는 척해줬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정중하던 사람이 오히려 거만해 보였다.

아드리안이 이러는 건 처음이었는데, 여전히 호레스에게는 상관없어 보였다.

아니,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설마 지금,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든 거야?

“이런 북쪽 끝 얼음 땅에서 썩기엔 아까운 미모야.”

끈적거리고 질척거려서 불쾌했다.

산샤는 아드리안에게 바짝 몸을 붙이고 도전하듯 턱을 쳐들었다.

어딜 넘봐?

감히 나의 아드리안에게!

호레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손을 뻗었다.

처음엔 때리는 줄 알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는데 호레스는 때리지는 않고, 그대로 산샤를 밀어내려고 했다.

아드리안을 보는 데 방해받는 게 싫어서.

맞아도 안 비켜줄 참이었는데, 고작 이런 걸로 밀려날 것 같아?

산샤는 아예 아드리안에게 팔짱을 끼고 눈을 부라렸다.

호레스가 한발 다가섰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팽배한 가운데….

풉!

막 터지는 웃음을 황급히 삼키는 소리에, 산샤는 홱 돌아봤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있지만, 늦었다.

웃어?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아, 미안!”

조나스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역시 아드리안의 미모는 제국을 아우르는구나 …싶었거든.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미모잖아.”

그게 긴장된 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이유냐?

“레이디 산샤, 아드리안을 지키려면 힘들겠다. 이렇게 노리는 사람이 많아서야….”

“그 정도 노력도 하지 않고 아드리안을 반려로 삼을 수는 없겠지요, …폐하!”

바드득 이라도 갈 것 같은 산샤를 보고 조나스는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산샤 덕에 웃어 버려서인가?

표정에 여유가 생기고 원래의 느물느물한 조나스로 돌아온 듯했다.

조나스가 호레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공?”

끄응, 호레스가 앓는 소리를 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이렇게 먼 곳에서 보니 새롭군요, 대공.”

그때 호레스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호레스는 까딱까딱 모리츠를 향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예?”

“자네하고 나하고 대화가 필요하지? 조용한 방으로 안내하게.”

경련하듯 깜빡깜빡 눈꺼풀을 움직이며 모리츠는 허둥지둥 움직여 앞장섰고, 호레스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습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호레스가 가고, 누군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얼어버린 분위기가 풀린 듯 연회장의 초대객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조심조심 옆 사람과 속삭였고, 악단은 연주했다.

그러고 보니까 음악이 끊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산샤는 덥석 양손으로 아드리안과 조나스를 잡아끌었다.

호레스와 모리츠만 조용한 방에서 대화를 할 게 아니다.

대화는 산샤도 필요했다.

커튼 뒤 은밀한 장소로 끌고 들어가 산샤는 물었다.

“대체 뭐였어요? 왜 그렇게 다들 긴장하고 있었던 거지?”

이제 와 말이지만, 호레스 밀란은 오러도 미미했다.

모리츠의 악의로 가득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모리츠의 오러가 훨씬 왕성했으니까.

호레스가 한 거라고는 근거 없는 오만함을 발산하고 아드리안에게 질척거린 것뿐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앞에서 무릎 꿇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뭐, 별로 무서워 보이지도 않던데?”

산샤의 말에 조나스가 피식 웃었다.

“대공이 저래 봬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거든. 명예가 뭔지도 몰라.

무슨 짓이든 내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라서. 당하면 당한 사람만 손해인 거라…,

…알아서 조심하게 되는 거지. 그러다 보니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지고, 숨 쉬는 것도 어려워.”

“…폐하도 뭘 당했어요?”

“나한테까지 뭘 하진 않았는데, 봐야 할 것이 괴로우니까.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고….”

조나스가 쩝 입맛을 다셨다.

“내가 긴장하는 거 같으면 대놓고 무시해. …봤지?”

산샤가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더니 이번엔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아드리안은 왜 그런 거야? 그런 모습 처음 봤어.”

아드리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호레스 밀란이 그런 걸 좋아한다길래.”

“그런 거?”

“아름다운 남자가 자신에게 거만하게 구는 것.”

입이 저절로 벌어졌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것까지 계산해서 움직이는 줄 몰랐어.

그렇지만….

그러다가 부끄러움도 모르는 호레스가 그 자리에서 덤벼들었으면 어쩔 뻔했어.

산샤는 뻐끔뻐끔 입술을 움직이다가 겨우 말했다.

“…이걸로 호레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긴 했네.”

아드리안이 여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샤는 덧붙였다.

“호레스가 생각만큼 무섭지 않아서 실망스럽긴 했지만….”

거기에 아드리안이 답했다.

“어쩌면 우리가 그를 키워줬는지도 모르지. 과도하게 두려워하면서….”

“아닙니다.”

조나스가 고개를 저었다.

“모리츠 입장이 되면 그런 말은 못 할 겁니다. 모리츠는 지금 지옥을 맛보고 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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