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빠바방, 연회장에 나팔 소리가 울리고 시종이 외쳤다.
“레이디 산샤 님과 클라이드의 수호자 아드리안 경이 입장하십니다.”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산샤와 아드리안에게로 다가왔다.
여황의 문을 열 때 참석했던 이들이야 새로울 게 없었지만, 대부분은 산샤를 자세히 보고 싶어 했다.
백치로 소문났던 게 몇 년인가.
보지도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면서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제국의 치료사란 치료사들이 모두 입 모아 말하기를 영영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멀쩡하게 말을 한다지?
이제 보니 제국의 치료사들이 하나같이 돌팔이였던 모양이야.
서로 속닥이거나 밀쳐내기도 하면서 조금이라도 보기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정작 두 사람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뚫고 모리츠가 다가왔다.
“산샤, 아름답구나. 과연 대연회의 주인공답구나.”
산샤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모리츠의 오러는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신나셨나.
곧 나를 죽이고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잡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계신가?
“…네 나이 때의 형수님이 생각나는구나. 얼마나 아름답고 청초했는지…. 봄 햇살의 데이지 같았지.”
“모리츠 자작, 연회를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다리까지 부러졌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산샤가 부채로 모리츠의 다리를 가리키며 쯔쯔 혀를 찼다.
순간 모리츠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신의 말을 끊어버린 게 짜증 나고 혀를 찬 것도 불쾌하겠지.
그렇지만 당신 입에서 나오는 내 어머니 이야기는 내가 싫은 걸 어쩌란 말이냐.
“그럼….”
산샤는 턱을 치켜들고 모리츠를 내려다봤다.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군요.”
그만 비켜 주시지?
…라는 산샤의 뜻이 제대로 전해졌을 터인데도 모리츠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내가 안내를 해주겠다.”
“고맙지만, 됐어요.”
촤륵, 부채를 펼치며 모리츠를 외면하고 산샤는 말했다.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니 나 스스로 만나고 싶군요.”
끄응, 모리츠가 신음했다.
머리끝에서는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숨을 크게 쉬더니,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내가 너의 후견인이 아니냐. 너는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고, 사교계 경험이라는 것 자체가 없으니까….”
“직관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후견인의 지루한 경험보다는 그게 더 유용할 겁니다.”
“이래서 어린아이들은 안 된다니까. 네가 다 잘할 것 같겠지. 그렇지만 말이다. 경험은….”
“아, 지겨워. 어른들의 잔소리라니….”
산샤가 어깨까지 들썩이고 한숨을 쉬다가, 오히려 깜짝 놀라며 웃었다.
“어머, 혼잣말을 한다는 게….”
산샤는 부채를 탁 접어서 모리츠의 어깨를 툭 쳤다.
“그렇지만 모리츠 자작. 나는 가문을 승계했어요. 어린아이라니… 설마 벌써 노망이라도 나셨나?”
“산샤 디아머드, 너!”
우르르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고, 모리츠가 외쳤다.
그러고는 주먹을 불끈 쥐고 성큼 다가섰다.
그러나 거기서 끝.
앞으로 더 나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나지도 못했다.
둘의 신경전을 흥미롭게 구경하던 연회 손님들이 술렁거렸다.
모리츠 자작이 동상이 된 듯 굳어 있는 건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정작 모리츠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무엇인가가 무겁게 찍어 누르는 것 같아 버틸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바닥에 넙죽 엎드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런 볼썽사나운 꼴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모리츠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죽은 자들의 아버지, 명부의 신 오르쿠스여!
이름조차 얻지 못한 파괴의 신이여!
디아머드를 살피는 얼음여황 글라키에스여!
아무 신이나 와서 도와주소서.
그러나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산샤 이름 좀 크게 불렀다고,
산샤를 향해 주먹 좀 쥐었다고,
이런 게 ‘바람을 다스리는 자’의 능력이었어?
모리츠는 겨우 눈을 돌려 아드리안을 쳐다봤다.
아드리안은 산샤의 곁에 느긋하게 서 있었다.
무슨 능력을 부리는 거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리츠가 왜 이러는지 의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너의 정체를 내가 안단 말이다.
모리츠는 아드리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 드, 리, 안, 너는…, 네가….”
빌어먹을!
숨이 차서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
그때 화악! 숨구멍이 열렸다.
내리누르던 압박감도 사라졌다.
손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였고, 발걸음도 떼어졌다.
죽을 뻔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움직여지니 오히려 짜증이 났다.
산샤도 의아하다는 듯이 보고 있더니 피식 웃어버렸다.
“뭐예요, 모리츠 자작. 그렇게 관심을 집중시키고 싶었던 거예요?”
빠드득 모리츠는 이를 갈았다.
모르겠지, 너는.
당한 나나 알지, 누가 알아.
정체 모를 것에 기진맥진할 정도로 당했는데 아무도 몰라.
모리츠는 산샤에게 한마디 해줄 기운도 남지 않았다.
털썩 쓰러지려는데,
“산샤 디아머드! 아직도 여기 서 있으면 어떻게 해?”
해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리츠는 언제 다가왔는지 조심스럽게 내미는 닐스의 팔을 잡고 가까스로 버텼고,
손님들과 산샤는 해맑은 목소리에 집중했다.
제대로 차려입은 이들 사이에서 유독 가볍게 입은 조나스 악셀이 해맑게 웃으며 들어섰다.
마치 잠시 마실 온 철부지 도련님 같다고나 할까.
그가 잔뜩 들떠서 소리 질렀다.
“와아! …북부의 연회라는 게 이런 거구나.”
다급하게 시종이 나팔을 불고 외쳤다.
“라인하르드 제국의 황제 폐하, 조나스 악셀 라인하르드 님이십니다.”
연회 손님들은 황급하게 무릎을 꿇어 예를 올리는데, 조나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는 척해 줘야겠다는 자각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반짝반짝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두리번두리번 정신없이 구경하더니, 갑자기 혀를 찼다.
“북부라고 별거 없네. 제도랑 똑같아. 날씨도 뭐, 얼음의 땅이라면서 왜 이렇게 덥니? 사시사철 눈이 오고 순록이 달려 다니고 그래야 하지 않아?”
산샤가 억지로 웃으며 대꾸했다.
“디아머드의 여름에 잘 오셨습니다, 폐하.”
조나스가 삐쭉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나는 여름이 싫다.”
그러더니 탁, 산샤의 팔을 잡아챘다.
“산샤, 나랑 춤추자.”
갑자기?
산샤가 슬쩍 몸을 뒤로 빼며 아드리안을 돌아봤다.
조나스가 산샤에게서 아드리안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또 입을 삐쭉 내밀었다.
“너에 대한 건 익히 들었다, 클라이드의 수호자 아드리안!”
아드리안이 슬쩍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네가 오늘 레이디를 에스코트한 파트너인 건 알지만, 잠깐 양보해줬으면 해. 첫 댄스는 내가 가져야겠다.”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고, 산샤가 물었다.
“춤은 왜요? 갑자기.”
“왜긴, 파티니까. 파티에서는 원래 춤추는 거잖아.”
조나스가 또 갑자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왜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해? 파티잖아. 파티에 왔잖아. 춤을 춰. 음악을 연주하라고!”
악단은 어영부영 연주를 시작하고, 조나스는 산샤의 팔을 잡아끌었다.
엉거주춤 눈치를 보고 있던 귀족들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회장 중심으로 뛰어 들어가며 조나스는 까르륵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즐거운 일은 처음이라는 듯이.
이렇게까지 해맑을 일이냐?
오늘은 또 무슨 설정을 하고 움직이는지, 산샤는 조나스가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춤을 춰야 하나 보다 반쯤 포기하고 있는데,
빠바방!
나팔 소리가 울리고 시종이 외쳤다.
“라인하르드 제국의 섭정 대공 호레스 밀란 님이 입장하십니다.”
뭐?
연회장의 사람들이 일제히 시종을 노려봤다.
모리츠는 경기가 난 듯 몸을 떨고 있었다.
호레스 밀란 대공이라니?
황제야 아무 때나 아무 데나 돌아다닐 수 있어도 밀란 대공은 그럴 수 없는 몸이다.
그야말로 진짜 제국의 주인.
제국을 다스리는 위대한 분께서 이런 북쪽 끝까지 오실 리가 없잖은가.
초대장은 모두에게 돌렸지만, 관행이라 그런 거지 정말 오라는 것도 아니란 말이지.
아무리 디아머드 백작 가문이라 해도.
아무리 신의 은총으로 부를 이룬 가문이라지만,
마정석 광산 때문에 멸문도 시키지 못했으나,
호레스 밀란 대공이라니!
그런 등장인물은 누구의 계획에도 없었는걸.
누구보다 밀란 대공 본인의 계획에 없었을 거라고 연회장에 모인 대부분은 생각했다.
시종은 날 선 사람들의 시선에 겁을 먹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면서 입장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날렵하고 완벽하게 꾸민 사내가 수행원들을 잔뜩 거느리고 등장하고 있었다.
생각을 짐작할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좌중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거만한 사람이었다.
“밀란 대공이다!”
누군가 외쳤고,
후다닥.
연회장에 모인 대부분은 무릎을 꿇었다.
직접 초대한 산샤와
대결해서 무너뜨릴 작정인 아드리안과
‘이긴 놈이 내 편’이라는 생각을 품은 조나스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