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모리츠의 외침에도 조나스와 마르틴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멀뚱멀뚱 보고만 있자, 기쁘게 뛰어 들어왔던 게 무색해진 모리츠가 눈치를 살폈다.
“폐, 폐하? 제가 하는 말을 들으셨는지요?”
가타부타 말없이 쭈욱 조나스가 소파에 늘어졌다.
모리츠는 얼른 마르틴을 바라봤다. 지금껏 알현할 때마다 황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마르틴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책에서 눈을 떼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뭐라고 하긴 한 것 같은데, 굉장히 황당한 소리라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다니요.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찾았다니까요!”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 어쩌라고?”
“예?”
마르틴의 뜨악한 반응에 모리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조나스를 바라봤다.
아무리 명목상 황제라지만,
호레스 밀란의 허수아비일 뿐이라지만,
당신은 알아듣겠지.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바라봤지만, 변함없이 조나스는 ‘나 몰라라, 귀찮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갈 곳 없는 모리츠의 시선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황제가 이 모양이니, 제국을 통째로 호레스 밀란에게 뺏기고 허수아비 노릇이나 하고 있지.
결국 모리츠는 기를 쓰며 외쳤다.
“죽었다던 클라우스 황태자를 찾았다지 않습니까. ‘바람을 다스리는 자’요!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실 일이 아니라고요.”
“하아….”
조나스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마르틴도 한숨을 쉬더니, 난감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모리츠 자작,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바람을 다스리는 자’와 ‘클라우스 황태자’는 같은 말이 아니에요.”
“예?”
“황가에서만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나왔던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바람을 다스리는 자’라고 해도 비바람을 운용할 정도의 능력이 아니라면, 뭐 굳이… 호들갑을 떨어야 하나?”
모리츠는 분했다.
이 반응들은 뭐야?
기껏 일급 기밀 정보를 알려주러 왔더니, 헛소리하는 얼뜨기 취급을 해?
모리츠는 외쳤다.
“그자는 황태자가 분명합니다!”
“증거는 있나요?”
“예?”
“장례를 치른 지 벌써 십 년이 지났어요. 죽은 클라우스 황태자를 봤다고 할 요량이라면, 증거는 확실하겠죠?”
모리츠는 입술을 깨물었다.
증거랄 게 있을 리가 있나.
자신이 본 거라고는 마법을 몇 겹이나 둘러놓은 은신처가 있다는 것과 선 황후를 닮았다는 것밖에 없는데….
모리츠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동자만 굴리고 있자, 마르틴이 다시 물었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에 대한 증거는 있겠죠?”
“예?”
이번에도 모리츠가 대답하지 못하자, 마르틴은 더 할 말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책을 펼쳤다.
아니, 이것 보시오.
이렇게 무시해 버리면 곤란하지.
“황제 폐하에 대한 저의 충심을 이렇게 하찮게 취급하십니까?”
순간 조나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리츠를 돌아봤다.
그런 말을 듣게 될지 몰랐다는 표정이랄까.
놀라기는 마르틴도 마찬가지인 듯 책에서 눈을 떼고 껌뻑거리고 있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왜 그렇게 낯설다는 표정으로….”
부르르 조나스가 몸을 떨더니 홱 다시 외면해 버렸고, 마르틴이 배시시 웃었다.
“충심이라니, 낯설기는 하군요.”
그러고는 탁- 책을 덮으며 일어섰다.
“어쨌든 증거는 없는 것 같고…. 오늘도 별 성과 없는 알현이었군요. 폐하께서 피곤하신 듯하니, 이만 가보시죠.”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시종이 정중하게 팔을 뻗어 나갈 길을 가리켰다.
마르틴이 책을 덮어 버리면 그걸로 끝, 예외는 없다.
어쩔 수 없이 모리츠는 공손하게 절을 하고 물러났다.
빠드득 이가 갈렸다.
기껏 최고의 정보를 주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괄시해?
폐하께서 피곤하시긴 뭐가 피곤해?
뭐, 한 게 있어야 피곤하지.
소파에 거의 드러누워서 시선 한 번을 제대로 안 줬는데 뭘 했다고 피곤하냐고.
그렇지만 자신이 성급하긴 했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왜 뛰어왔던 거지?
황제 폐하께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제대로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무조건 달려왔네?
입조심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질러 버린 거지?
귀신이라도 쓰였나?
모리츠는 정말 귀신이라도 쓰인 얼굴을 하고 멍청하게 돌아봤다.
* * *
모리츠가 나가고 한참 적막했다.
마르틴은 책을 들어 시선을 가리고 조나스의 눈치를 살폈는데, 조나스는 아예 동상이라도 되어 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큽.”
괴상한 소리에 깜짝 놀라 쳐다봤더니, 조나스가 몸을 떨며 ‘크크크’ 하는 소리와 함께 웃고 있었다.
그러고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면서 중얼거렸다.
“아…. 정말 재미있었다. 집안 내력인가? 모리츠도 제법 귀엽네.”
“뭔가에 홀렸나 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달려올 일이 아닌 걸 알 텐데….”
“우리가 제대로 반응해줬으면 달려온 보람을 느꼈겠지.
그렇게나 나와 밀란 대공은 갈라놓고 싶어 했는데, 이미 갈라진 사이이고….
황태자를 찾았다고 빵 터트리고 싶었는데, 이미 알고 있잖아.”
마르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타깝네요. 매번 꽝이라니….”
“안타깝기는 뭐가?”
조나스가 ‘쳇’ 혀를 찼다.
“쓸데없이 부지런하니까 꽝이 많은 거잖아. 제 무덤 제가 파는데, 뭐?”
“예에…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폐하께서 게으르다고 부지런한 사람을 죄다 우습게 여기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조나스가 못 들은 척 외면하는데, 마르틴이 다시 말했다.
“모리츠가 저 정도로 눈치를 챘다는 건, 이제 아드리안이 전면전을 선포했다고 봐야겠지요?”
조나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르틴이 다시 말했다.
“올 테면 오라는 거잖아요. …대연회가 정말 재미있겠어요.”
* * *
밤이 깊었다.
하늘의 별도 반짝였지만, 디아머드 성의 불빛은 더욱 찬란했다.
바야흐로 연회의 시간이다.
산샤는 연회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깊고 길게 숨을 쉬어도 안정이 되지 않는다.
심장 뛰는 소리가 원래 이렇게 큰 거였나?
평생 심장 한 번 뛰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거세게 울려대니 머리가 흔들려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 옆에서 차분히 아드리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산샤가 해야 할 싸움.
스스로 만족스러울 만큼 준비가 된 다음에 움직이는 게 옳으니, 언제까지라도 기다려 줄 참이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채로 심호흡하고 있는 산샤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자신의 심장이 거세게 뛰고는 있지만 기다릴 수 있다.
마침내 산샤가 입을 열었다.
“잘할 수 있을까?”
아드리안이 무심함을 가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하는 일이니까….”
산샤가 희미하게 웃는 걸 보며, 아드리안은 덧붙였다.
“내가 널 지킬 테고….”
순간 산샤의 눈빛이 흔들렸다.
입은 열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드리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산샤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말을 알고 있다는 듯 아드리안은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한 결정이야, 산샤.”
아드리안은 시선으로 산샤의 머리에서 눈으로, 코를 지나 입술까지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대연회를 선택한 것도 나라는 걸 잊지 마. 행여 일이 잘못되더라도….”
산샤는 황급히 제 손으로 아드리안의 입을 막았다.
“너야말로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잘못될 일은 없으니까.”
아드리안이 눈으로는 여전히 산샤를 어루만지며 손을 돌려 잡더니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짜릿한 전율에 산샤는 짧게 숨을 삼키고 부끄러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드리안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산샤의 얼굴을 감싸 자신을 보게 했다.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이 얽히고 숨소리가 섞였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자리를 잡고, 산샤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었다는 듯이.
아드리안이 한 걸음 물러서 산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가볼까요, 레이디?”
산샤는 등을 곧게 펴고,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 * *
연회장에는 라인하르드 제국의 귀족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디아머드가 라인하르드 제국의 가장 북부 끝인지라,
원래는 계승자의 대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가문이 많았는데 이번엔 무리해서라도 참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산샤 디아머드가 궁금했다.
밀란 대공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멸문당하지 않은 유일한 가문의 계승자가 아닌가.
밀란 대공이 디아머드 가문을 살려둔 것은 오로지 그들만 여닫을 수 있는 마정석 광산 때문이었다.
그만큼 마정석 광산이 가진 재산적 가치가 어마어마했는데, 그게 다 신이 내려 준 거라지?
그걸 또 나눠 먹겠다고 구혼자들이 몰려들었는데, 누가 승자가 될 것인지….
오랜 시간 백치라고 소문났던 아가씨가 어떻게 후견인을 몰아내고 가문을 차지할 수 있었는지….
앞으로도 계속 가문을 유지할 힘이 있을지 어떨지,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었다.
마침내 산샤의 입장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회에 모인 이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흥분을 고조시켰다.
산샤가 입장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드디어 산샤가 들어섰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아, 신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가문이라더니….”
그만큼 산샤는 등장만으로 모두의 뇌리에 박혀 버렸다.
오롯이 산샤의 매력에 집중하게 만드는 단장은 라베나의 장인정신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런데 라베라도 미처 생각 못 한 것이 바로 눈빛이었다.
무심한 듯 당당하게 좌중을 훑어보는 산샤는 이미 디아머드 백작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