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어디에서인지 살랑 바람이 일었고, 아드리안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모리츠는 튀어나올 듯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두리번거렸다.
창문 하나 열린 데가 없는데, 어디에서 바람이 불어와?
그때 아드리안이 빙긋이 웃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군요. 클라이드의 수호자에게 은신 마법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그게….”
모리츠는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입 안이 말라서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이제 와서 보니 아드리안이 선 황후를 닮은 것 같았다.
선 황후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결혼식 즈음해서 그들의 초상화가 돌았다. 물론 그때는 황태자비였지만….
당시 모리츠는 황태자비의 초상화를 보고 너무 설레서 몇 날 며칠 잠도 못 잤다.
그때는 마리에를 사랑하는 마음을 접을까도 했었지.
그만큼이나 아름다웠던 황태자비였는데 …닮았다.
아니다. 똑같다.
넋이 나간 모리츠의 표정에 아드리안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에서 나가는 게 좋겠어요. 시간의 틈에 들어서기도 전에 미아가 된 표정이군요.”
“…내, 내가 말인가?”
“예, 영혼이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린 표정입니다.”
“그렇지는 않은데…. 내가 정신은 올바로 박혀 있는….”
횡설수설하면서 모리츠는 아드리안에게 이끌려 은신처에서 나왔고, 클라이드 호텔 로비에 섰다.
기다리고 있던 프리스가 냉큼 달려와 모리츠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자작님?”
걱정하는 프리스의 말에 갑자기 다리에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부축도 없이 아픈 줄도 모르고 막 뛰어다녔다.
그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가볍게 눈인사하고 돌아서는 저 아드리안이 ‘바람을 다스리는 자’ 같다.
아무래도 정말 그런 것만 같았다.
멍하니 아드리안의 뒷모습만 바라보는데, 프리스가 물었다.
“여기 계속 서 계실 건가요… 자작님?”
여전히 멍한 얼굴로 모리츠가 돌아봤다.
“북부 행궁에 가시려면 지금 움직이셔야 하는데요. 까딱하다간 알현 시간을 놓치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것처럼, 눈을 껌뻑거리기만 하더니 모리츠가 물었다.
“자네는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아는가?”
프리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그게 저….”
모리츠가 손가락으로 콕, 이젠 멀리 가버린 아드리안을 찍었다.
그러나 이내 손을 거둬들였다.
하마터면 아드리안이 바람을 다스리는 자라고 할 뻔했다.
아직 모르는 일이다. 입조심해야지.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느낌일 뿐인데.
그런데 점점….
어째서 여태 모르고 있었을까 싶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아드리안이야말로 ‘바람을 다스리는 자’다.
갑자기 나타나서 클라이드를 평정한 사람 아닌가.
클라이드가 지금이니까 이렇게 평화롭지. 예전 클라이드는 어마어마하게 거칠었다.
야만인들과 변방 무역을 하는 자들이라서 그들 자체가 이미 야만인이었다고나 할까.
그들의 우두머리가 수호자인 건데, 수호자가 되려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관문을 거쳐야 했겠나.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다 죽여야만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드리안은 소리 소문 없이 수호자 자리를 쟁취하더니, 순식간에 지금의 평화를 만들어냈다.
이제 와 말이지만, 특별한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째서 몰랐을까? 몰랐던 게 이상한데….”
“…뭘 말입니까?”
“아니네, 어서 가야겠네. 황제 폐하를 알현해야지.”
모리츠는 프리스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또 부축 없이 허둥지둥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찾았다.
팔커의 경비들을 다 잡아 족쳐도 단서 하나 없었는데, 바로 코앞에 두고도 모르고 있었어.
모리츠는 신나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저러다가 진짜 다리뼈가 평생 안 붙겠는데요. 부러진 데 또 부러지는 거 아니야.”
루카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아드리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자에겐 지금 다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
루카는 너무나도 평온하고 무심한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전하는 괜찮으시고요?”
“내가 안 괜찮을 게 뭐겠어?”
“이렇게 다 걷어내 버려도 되겠냐고요.”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의 능력 중에 ‘망각의 기운’이라는 게 있었다.
말 그대로 잊게 하는 능력이었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보고도 잊는다.
눈앞에 있을 때는 존재 자체에 압도당하지만, 눈앞에 없으면 얼굴 생김이 잘 기억나지 않고 머리색도 헷갈린다.
그런데 또 그게 전혀 이상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받아들이게 되었다.
‘망각의 기운’은 굳이 펼치려 노력할 필요도 없이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감싸고 있는 공기 같은 거였다.
뇌리에 박힐 만큼 어마어마한 돌풍을 불러온다든가 하지 않으면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찾기 힘든 이유였다.
그런데 아드리안은 일부러 모리츠 앞에서 그것을 걷어냈다.
그러자 모리츠는 아드리안 곁에 머무르는 작은 바람을 느끼고, 선 황후와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다.
“모리츠는 자신이 알아냈다고 생각하겠지.”
“자신이 알아낸 걸 우리는 모른다고 믿을 테고요. …되돌이표 노래 같군요.”
아드리안은 의아한 듯 루카를 바라봤다.
“제가 살던 세상에 그런 게 있었어요.”
루카는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했었다. 이쪽 세계와는 체계가 많이 다른 곳이라고.
그래서인지 간혹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
지금도 되돌이표 노래라고 하더니, 처음 들어본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되돌이표 노래가 정확하게 뭔데?”
“돌고 돌고 도는 노래예요. …나는 너를 안다. 네가 아는 걸 내가 안다. …내가 아는 걸 네가 안다는 것을 내가 안다. …네가 아는….”
“그만해.”
아드리안은 황급히 루카의 말을 끊었다.
괜한 걸 물었다. 밤새라도 계속 말의 내용을 돌릴 수 있는 게 루카라는 걸 잊고 있었다.
“그 노래의 마지막은 내가 아는 걸로 끝내고 싶군.”
“이미 그렇습니다. 모리츠가 아는 걸 우리가 아는데 모리츠는 모르니까요. 저만 안다고 생각하잖아요.”
“본인만 아는 이 엄청난 비밀에 맞춰 새로운 계획을 짜게 되겠지.”
“동맹을 모집할 텐데, 누구부터 찾아갈까요?”
아드리안이 빙긋이 웃었다.
“우리가 다 짐작하고 있는 그 사람?”
* * *
조나스는 늘어져 있던 소파에서 더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끈질긴 자로구나. 이렇게 뻔질나게 다닐 일인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리자, 시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나지 않으시겠습니까? 돌아가라고 할까요?”
탁, 마르틴이 책을 덮으며 나섰다.
“아니야, 만나신다. 다만….”
흘러내리다 못해 소파 끝에 엉덩이만 겨우 걸치고 있는 조나스를 보며 마르틴은 말했다.
“기다리라고 해라. 폐하가 지금 바쁜 일이 있으시니, 기다려야 볼 수 있다고.”
“얼마나 기다리라고 할까요?”
“…글쎄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는지 한번 볼까? 기약이 없다고 해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종이 물러가고 문이 닫히자, 조나스는 ‘아아아-’ 하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만나야 한다고? 디아머드에 와서 산샤보다 그 작자 얼굴을 열 배는 더 봤다.”
“그 머리로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흥미롭지 않으십니까?”
“흥미로울 게 그렇게 없나? 대체 무슨 수로 나와 외숙을 갈라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그 어리석음에 하품이 나온다.”
피식, 마르틴이 웃었다.
“포기를 모르는 모리츠…라는 별명이 있다죠.”
조나스가 짜증스럽게 마르틴을 흘겨봤다.
“너야말로 포기를 모르는 게 아니냐? 대체 왜 돌려보내지 않아? 왜 자꾸 만나라는 거냐?”
마르틴이 다시 책을 펼쳤다.
“노력 대비 결과물이 너무 없으니까 안타깝기도 하고, …언젠가는 쓸 만한 의견을 가져오지 않을까 싶어서요.”
“백날 다녀 봐라, 의미 있나. 쓸데없이 부지런한 자가 아니냐. 들쑤시기만 할 뿐, 뻔히 눈앞에 있는 것도 못 알아보는데….”
“못 알아보게 하니까요.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조리 망각의 기운을 깔고 다니는데, 모리츠 같은 자가 어떻게 알아봅니까.”
읽던 곳을 찾으며 마르틴은 중얼거렸다.
“뭐, 이쪽은… 망각의 기운 자체를 이제야 깨달았지만…. 그런 건 비밀이니, 말하면 안 되겠지만….”
조나스가 소파에 올라앉으며 마르틴을 흘겨봤다.
“너는 읽지도 않으면서 책을 끼고 있는 이유가 뭐야?”
“지루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나 혼자만이라도 살겠다는 몸부림입니다.”
노려보는 시선을 피하며 마르틴이 느물거렸다.
“그렇게 귀찮으면 약속을 해주든가요.”
“무슨 약속을? 어떻게?”
“책임지고 산샤와 결혼해서 아드리안과 갈라놓겠다. …그건 폐하도 원하는 일이니까 문제없고.
결혼하고 나면 책임지고 산샤를 황궁으로 데려가겠다. …이것도 폐하가 원하시잖아요. 아드리안하고 갈라놓고 싶어서.
산샤를 황궁으로 데려가면 디아머드는 네 것이다. 마음대로 찧고 까불어라. 이건 폐하가 원하는 건 아니지만, 별 상관없으시잖아요. 마정석 광산 따위.
다 약속해 줘 버리세요.”
“모리츠 같은 놈과 그런 약속 …할 생각도 없고, 지킬 생각도 없다.”
“약속이라는 게 뭐 꼭 지키려고 하는 건가요? 어기려고 하는 거지. 서류로만 남기지 않으면 뭐, …서류로 남겼대도 뭐….”
그때였다.
“이렇게 막 들어가면 안 됩니다.”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콰당 문이 열리고 모리츠가 뛰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외쳤다.
“폐하,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