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산샤의 말을 듣고 난 벤야민은 습관처럼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고 한 번은 맞닥뜨려야 할 일이니까. 이왕 맞을 매라면 빨리 맞는 게 좋다잖아.”
벤야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말이 있었나요?”
“응, 우리 어머니 말씀이야.”
벤야민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 밖으로 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산샤가 ‘어머니의 말씀’이라고 하는 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말씀하신 대로 특급우편을 따로 보내겠습니다.”
산샤가 벤야민에게 지시한 것은, 호레스 밀란이 대연회에 늦지 않게 참석할 수 있도록 특급우편을 다시 보내라는 거였다.
모리츠가 어떻게든 따돌리고 싶어 하는 밀란을 데려다 놓자고.
그렇게 하면 아드리안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산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드리안과 결혼할 테니까.
결혼하면 작위 계승을 위해 제도에 가게 될 테고, 결국 만나게 되고야 말 거다.
그때 만나는 것보다는 대연회에서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매를 빨리 맞으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그게 맞다.
산샤는 큰 유리문을 양손으로 밀고, 어머니의 허브 정원으로 나섰다.
열심히 밭을 갈고 씨를 뿌렸는데도 여전히 민둥민둥한 정원.
모리츠가 싹을 틔울 기운까지 갈아 없애 버렸는지 잡초 하나 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정원을 다시 살리고 싶었는데, 모리츠를 욕하고 복수의 의지를 다지는 장소로 쓰고 있다.
“좀스러운 모리츠 놈.”
지겨워질 정도로 실컷 욕을 하고 돌아서던 산샤는 문득 굳어 버렸다.
눈을 깜빡깜빡 떴다 감았다 하는데도 여전히 보이는 저것은?
“오오오!”
산샤는 뛰어가 그것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싹이 텄다.
싹이 텄어.
한 개만이 아니었다. 땅에 바짝 붙어야 보일 만한 작은 싹들이 여기저기 오소소 돋아나고 있었다.
내가 늦었구나.
땅은 이미 시작하고 있었어.
산샤는 땅바닥에 볼을 댄 채로 새싹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서 와라, 모리츠와 밀란. 너희들을 위한 판은 다 짜 놨다.”
* * *
순간 모리츠는 귀를 후벼 팠다.
귓속에 날벌레라도 들어갔나, 윙윙하는 작은 날갯짓이 들린 것 같고 가려움도 느껴졌다.
그렇지만 손가락에 묻어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적이지만 심각하게 가려웠는데, 뭐였지?
무의식중에 다시 귀로 손이 가는데, ‘쯧’ 작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모리츠가 홱 돌아보자, 질세라 닐스 미켈이 모리츠를 흘겨보고 있었다.
“뭐 하십니까? 더럽게.”
모리츠는 멍이 빠지느라 얼룩덜룩한 닐스의 얼굴을 훑어보며 콧방귀를 꼈다.
“누가 누구한테 더럽다는 거야? …그 얼굴 좀 어떻게 하고 그런 말을 하던지.”
닐스는 입을 삐쭉거리면서도 아무 소리 못 하고 화장대 앞에 앉아 토닥토닥 분칠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닐스의 호텔 방.
모리츠는 닐스를 디아머드 성으로 불러들이기도 했지만,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직접 나오곤 했다.
디아머드 성이나 모리츠 하우스에서는 누군가가 감시하는 것 같아서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없었으니까.
요즘에는 아예 산샤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게 있으면 닐스를 불러 들였다.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면, 틀린 정보를 잔뜩 안겨 줄 작정으로.
그리고 아무도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할 때는 자신이 밖으로 나왔다.
덕분에 다리는 더 욱신거렸고, 닐스의 분칠을 구경하게 되었다.
챙 넓은 모자만 쓰고 다니는 건 자신의 타고난 미적 감각을 거스르는 일인 것 같아서 안 되겠다며, 분을 바르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가관이었다.
멍은 가려졌지만, 하얗고 번쩍거리는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고 해야 하나.
분이 특별한 것이라 그렇다고 했다. 진주를 빻아 만든 가루라던가.
가격을 듣고는 뒤로 넘어갈 뻔했다. 역시 닐스 미켈은 돈 잡아먹는 귀신.
그래도 대연회에 참석하려면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는 곤란하니까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분을 다 칠하고 이리저리 거울에 비춰보던 닐스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앉았다.
“자, 어떻습니까?”
모리츠는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달걀귀신 같더니 제법 말끔하게 꾸밀 줄 알게 되었단 말이지.
“콘스탄틴의 특별 지도를 받는다고 했나?”
닐스가 야릇하게 웃었다.
“지도도 받고 지도를 하기도 하고. …그렇죠.”
쩝, 모리츠는 입맛을 다셨다.
닐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으니까.
저 음흉한 미소를 짓게 하는 그 ‘지도’에는 또 돈이 얼마가 들어가는지….
요즘 닐스의 씀씀이를 책임지는 모리츠로서는 속이 쓰리다 못해 신물이 넘어올 것 같았다.
이게 다 닐스의 아버지라는 작자 때문이었다.
닐스 미켈이 빌려 쓴 돈을 갚지 못하면 손가락을 잘릴 거라더니, 그 상대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제도에서 악명 높은 사채업자.
모리츠가 닐스를 버릴 작정을 한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라는 작자가 쳐들어와서는 모리츠의 손가락을 자르려고 했다.
닐스 미켈이 이자 갚는 날을 어겼다나.
모리츠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니, 닐스의 빚은 곧 모리츠의 빚이라고 했다.
말도 안 된다고.
닐스가 빌려 온 돈은 자기 사치하고 즐기는 데 다 썼는데, 어째서 책임을 져야 하냐고.
열심히 항의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가 말하면 그대로 되는 것이란다. 그게 사채 업계의 법칙이라고 했다.
결국 모리츠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절대적으로 닐스를 산샤와 결혼시키겠다고 맹세도 했다.
그리고 다른 반려를 찾아보겠다는 계획은 전면 수정에 들어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닐스가 산샤의 반려다.
모리츠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닐스는 당연히 반려가 되지 못할 것이다.
진주 분칠한 저 얼굴로 어떻게 아드리안을 이기고 황제를 이기겠나.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닐스는 산샤를 죽이게 될 거다.
반려가 되지 못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산샤에게 덤벼들고, 격투로 이어지다가 실수로 죽이게 될 거다.
그리고 닐스는 자살할 거다.
그가 원한 것은 산샤의 재산으로 사치하며 즐기는 거였지, 누굴 죽이는 건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나 자살했다고 죗값을 치른 건 아니다.
모리츠는 집안의 어른으로서 미켈 가문에 산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악명 높은 사채업자인 미켈의 가주는 모든 상황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겠지.
자신의 손가락은 안전해질 테고.
이런 계획을 짜고 실행하느라 모리츠는 바쁘게 움직였다.
자신이 닐스를 아주 버리고 황제에게 공을 들이는 것으로 산샤가 생각하게 만들었고,
닐스는 모리츠의 속내는 상상도 못 하고, 마음껏 돈을 써재끼게 했다.
닐스가 손거울로 이리저리 얼굴을 비춰보며 말했다.
“자, 제 미모를 되찾으니….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모리츠는 입술을 쭉 늘리며 미소 지었다.
“오늘은 딱히 할 말이 있어서 온 게 아니라네. 행궁에 가던 중에 잠깐, …자네 분칠한 얼굴도 확인할 겸.”
“아, 그럼 잘 오신 거네요. 완벽해진 걸 보셨으니까요.”
모리츠는 그냥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자칫 입을 열었다가는 닐스에게 욕을 한바가지 퍼부을 것 같았다.
끄응, 모리츠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콰직, 부러진 다리에서 통증이 확 올라왔다.
이러다가 정말 평생 다리를 절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데, 닐스가 말했다.
“가는 길에 라베나의 부티크에 좀 들러주세요. 대연회를 위해선 최소 다섯 벌은 맞춰야 한다는데, 세 벌만 했어요.”
“…알았네.”
“제대로 세련된 디자이너를 만났는데 대연회 날짜가 촉박해서…. 너무 아까워요. 열 벌은 하고 싶었는데….”
모리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적으로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저놈이 자살하고 나면, 기필코 저놈 아버지에게 다 받아낼 것이다.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악명 높은 사채업자가 내 발 앞에 기어 다니는 꼴을 보고야 말 것이다.
자살도 곱게는 안 시켜주겠다.
최고로 고통스럽게 천천히 제 생명을 스러지는 걸 느끼게 만들어 줄 것이다.
모리츠는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말아 쥐고 닐스의 방에서 나왔다.
모리츠가 방에서 나오자마자 복도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프리스가 달려와 부축했다.
모리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프리스가 집사 일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시중을 어찌나 잘 드는지, 이젠 프리스 없으면 어딜 나다니기가 힘들다.
“…아예 저한테 완전히 기대세요. 다리에 무리 가지 않게요.”
프리스의 말에 모리츠는 프리스에게 몸을 탁 맡겨 버렸다.
훅 던져진 무게에 휘청거리면서도 프리스는 모리츠에게 불편이 없게 했다.
“가만히 앉아 계시는 게 좋다는데, 이렇게 바쁘셔서는 원….”
그러면서 슬쩍 닐스의 방을 돌아봤다.
“왜 자꾸 여긴 오시는지…. 방에 들어가시면 뭘 해드릴 수도 없는데….”
“뭐, 됐다. 나라고 오고 싶어서 오겠니. 대연회에 맞춰서 준비를 시켜야하니까 오는 거지.”
말은 자애롭게 하면서, 모리츠는 프리스의 뒷덜미를 매섭게 노려봤다.
일도 잘하고 입 안의 혀처럼 굴고 있는 프리스는 이게 문제다.
자꾸 뭘 캐물어.
이놈은 분명히 산샤에게 다 일러바치고 있을 것이다.
모리츠 하우스에서 일어난 일을 산샤가 알고 있다면, 다 이놈 때문이지.
프리스가 산샤의 정보원이라는 것을 알고부터 모리츠는 프리스를 더욱 가까이 뒀다.
하루 스물네 시간 딱 달라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침대에 눕지 않을 뿐, 같은 방에서 자기도 한다.
다리가 불편해서 시중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산샤에게 전해지라는 거였다.
산샤는 프리스가 자신의 정보원인 줄 알지만, 모리츠의 조종대로 움직이는 끄나풀인 거다.
얄미운 계집애.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꿈 깨라.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얼뜨기다.
그때였다.
“어머, 모리츠 자작님 아니세요?”
화려한 여자가 눈부시게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모리츠는 삐뚜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또 하나 있군, 정보원 콘스탄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