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멀리에서 아침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팔을 베고 깊이 잠들어 있는 산샤를 내려다봤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산샤의 입술이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화끈거려서 산샤의 입술을 오래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키스를 해버렸다.
산샤가 기억 못 할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는데, 또 혼자서만 간직해야 할 일을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는 밤새 인고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키스가 한없이 달콤해서 끝내기 힘들었지만, 필사의 노력으로 멈췄더니, 산샤는 계속 품을 파고들며 보챘다.
그렇지만 아드리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산샤가 스스로 뭘 하는지 인식 못 하는데, 그걸 이용해서 자신의 욕망만 채울 수는 없으니까.
겨우겨우 달래서 눕히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지금까진 산샤의 방에 데려다줄 수 있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자신의 침대에 눕히기도 힘들었다.
제 팔을 베게 했으니, 뒤척일 수도 없었고 숨도 크게 못 쉬었지만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글라키에스를 욕하면서.
산샤가 달큼한 숨을 내쉬며 한숨을 쉬듯 아드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아드…리안.”
무엇을 하기에 이토록 다정하게 부를까.
꿈속의 자신에게 질투가 났지만, 다른 이를 만나는 것보다 낫겠지.
저 입술로 얼마나 뜨겁고 애절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댔던가.
열에 들뜬 산샤의 목소리가 다시 울리는 것 같아, 아드리안은 눈을 감아버렸다.
“아드리안?”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초롱초롱한 산샤의 눈.
움찔 놀랐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는데, 생각나는 말이 없는 게 문제.
아드리안이 머뭇거리는데, 산샤도 말이 없었다.
어쩌다가 한 침대에 누워있게 되었냐고 물어볼 만도 한데,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깼어요?”
한참 고르다가 한 말에 산샤가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깬 게, …맞겠지?
눈의 초점을 보면 깨어 있는 것 같긴 한데, 지난밤에도 이와 똑같았던 것 같다.
아드리안은 아무래도 잘 모르겠어서 확인차 불러봤다.
“레이디?”
풉, 산샤가 터지려는 웃음을 얼른 삼키더니 말했다.
“그냥 산샤라고 해. 밤새 천만번도 넘게 부르고선 날 밝았다고 ‘레이디’라니 우습잖아.”
“…레…이디?”
산샤가 슬쩍 흘겨보며 또 웃었다.
“그토록 애타고 뜨겁게 불러놓고선 정말 이러기야?”
“……!”
아드리안은 입은 벌렸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산샤가 아드리안의 품에 파고들며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산샤의 입술이 가슴을 간지럽혔고 온몸에 전기가 도는 것처럼 짜릿했다.
산샤가 속삭였다.
“…깨어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꿈꾸는 거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긴 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그조차 잠꼬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고?
“…깨어 있었어, 정말?”
“응, 어제도 처음엔 비몽사몽 간이었지만…. 꿈꾸는 거 아니라고 했던 순간부터는 분명히 깨어 있었단 말이야.”
산샤가 또렷하게 초점 잡힌 눈으로 아드리안을 빤히 응시했다.
“그걸 억지로 재우다니…, 바보.”
그러고는 배시시 웃었다.
“아….”
아드리안은 떨리는 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깨어 있었다면 부끄러운 게 너무 많다.
열에 들떠 있기는 산샤뿐만 아니라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산샤를 진정시키면서 자신도 진정시켜야 했다.
참느라 괴로웠던 걸 다 알아차렸어?
문득 산샤가 속삭였다.
“키스해.”
명령인지 유혹인지 모호한 말에 아드리안은 말문이 막혔다.
산샤가 조금은 수줍은 듯 다시 속삭였다.
“키스해 줘, 아드리안. 지난밤처럼 그렇게.”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키스만으로 끝낼 수가 없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산샤는 아드리안을 끌어당겼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키스했다.
* * *
대연회의 날짜가 정해졌다.
앞으로 일주일 후.
모리츠가 마차를 타도 좋다고 치료사가 정해준 바로 그날이었다.
모리츠는 언제 늦장을 부렸냐는 듯이 모든 일을 신속하게 진행했다.
먼저 제국의 모든 귀족 가문에 초대장을 돌렸다.
연회 날짜가 촉박한 관계로 마정석으로 특급우편을 이용했는데, 초대장을 돌리는 데에만 비용이 어마어마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제국의 북쪽 끝인 디아머드의 위치상 참석하지 못할 귀족들도 있었지만, 초대장만큼은 돌려야 했고 참석 의사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게 제국에서 디아머드 백작 가문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었다.
그 와중에 모리츠는 호레스 밀란에게 가는 초대장은 시간이 더 걸리도록 하는 깨알 같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모리츠가 대연회를 빨리 열려고 하는 건 호레스 밀란을 따돌리고 싶어서였으니.
대연회가 닥치자 표면적으로 바쁜 건 의상을 준비해야 하는 라베나였다.
“아무리 작은 연회라도 드레스를 세 벌 정도는 준비해놓고 시작하는 법인데, 어떻게 ‘대, 연, 회’를 일주일 안에 준비해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정이라고 분개하는데 옆에서 아니타가 살짝 말을 얹었다.
“정 안 되겠으면 원래 거래하던 부티크에 연락해 볼까요? 거긴 장인정신이 없어서 그냥 냉큼 만들어 올 텐데….”
그에 라베나는 잡아 죽일 듯이 아니타를 노려보더니, 그야말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바쁜 건 역시 모리츠였다.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일보다는 물밑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할 일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모리츠에게 대연회는 디아머드 백작 가를 접수할 마지막 기회일 테니 허투루 처리할 수가 없겠지.
첩보에 의하면 모리츠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닌다고 했다.
마차를 타면 안 된다는 치료사의 경고는 아예 고려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대로 뼈가 제대로 붙지 않아서 평생 절뚝거린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네. 다리는 멀쩡한데 다 뺏기면 그건 또 무슨 소용이겠어.”
…라고 했다나.
과연 모리츠다운 말이었다.
뻔뻔스럽기가 그지없다.
애초에 자신의 것도 아니었으면서, ‘뺏긴다’니. 누가 누구의 것을 빼앗는다는 거야?
어쨌든 부지런한 모리츠는 닐스 미켈을 몇 번이나 불러다가, 산샤 디아머드 공략법을 알려준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이번에 제대로 산샤를 함락시키지 못하면 너나 내나 다 죽는다고 협박했다나?
듣던 중에 산샤는 어쩔 수 없이 황당하다는 표정이 지어졌다.
“나를 공략하는 법이 따로 있었어?”
보고를 하던 벤야민이 이마의 땀을 닦는 척하더니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그런 게 있으면 제가 먼저 배우고 싶은걸요.”
“그러게. 그런 게 있으면 나도 배우고 싶은데….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했는데?”
벤야민이 보고서를 넘기며 조심스럽게 주의를 줬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자작님이 하신 말이라는 걸 잊지 마시고요.”
그러고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내놓은 것은.
첫째, 무시해라.
둘째, 윽박질러라.
셋째, 강력한 힘을 보여줘라.
벤야민이 보고를 마치고 슬그머니 산샤의 눈치를 살폈다.
산샤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린 채로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제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아마 자작님은 미켈 남작님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이런 말도 하셨거든요.”
벤야민이 보고서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이렇게까지 맞춤 조언을 해줬는데도 결국 산샤를 함락시키지 못하면 자네에게 일을 그르친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어.”
헐, 산샤는 헛웃음만 웃었다.
“가주님이 보시기에도 책임을 전가하려고 엉터리 공략법을 가르쳐 준 거로 보이시죠?”
“……!”
“그동안 가주님의 지시대로 아니타가 열심히 속닥였던 효과를 본 것도 같고요.”
“그런가?”
“가주님에게 맞아서 시퍼렇게 멍들어 다니는 것도 못마땅했을 텐데, 하는 말이 족족 어이없었겠죠.”
“…닐스 미켈이 불쌍하게 생각될 때가 있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쨌든 닐스 미켈이 폭주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만약을 위한 준비는 해야 하니까요.”
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닐스 미켈이 폭주하는 게 오히려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가 폭주한다면 원인은 모리츠일 테고, 그 연결 고리에 관한 증거는 이미 갖고 있으니까.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모리츠 자작님이 북부 행궁에 드나들고 있다고 합니다.”
“북부 행궁? …설마, 황제 폐하를 뵈러 다닌다는 말은 아니지?”
벤야민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를 뵈러 간다는 말입니다.”
“아니 왜? 호레스 밀란을 따돌리고 싶은 거, 아니었어? 밀란이 나랑 결혼시키겠다고 보낸 게 황제인데….”
“무슨 생각으로 그러시는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제가 짐작하기로는요.”
벤야민이 조심스럽게 웃어 보였다.
“황제 폐하와 밀란 대공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게 아닐까요? 갈라놓고는 대공 자리를 쓰윽 차지해서는….”
“그게 말이 돼? 대공과 황제는 외숙과 조카야!”
“어쨌든 평생 다리를 절어도 상관없다면서 뻔질나게 북부 행궁에 다니시니까요.”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다리를 절어도 상관없어?”
벤야민이 모호하게 웃었다.
“그게… 황제 폐하가 계신 북부 행궁이지 않습니까. 그 안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저희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요.”
“하아….”
산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황제 조나스 악셀!
어떻게든 걸림돌이 될 것 같더라니.
궁리하던 산샤가 입을 열었다.
“좋아, 이건 그렇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