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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69화 (69/97)

69화

확실하냐니, 뭐가?

산샤는 글라키에스의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드리안이 도망 다녀야 하는 전직 황태자인데, 반려를 할 수 있겠냐는 뜻인가?

그러니까 호레스 밀란까지 잡겠다는 거잖아. 아드리안을 자유롭게 해주려고.

아드리안을 반려로 하고 싶은 내 마음이 확실하냐는 뜻일까?

어린 마음에 태양처럼 빛나는 아이를 사랑했다가, 까맣게 잊어버리기를 몇 년.

기억이 났다고는 하지만, 그때의 그 마음 그대로인지 모호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부분을 묻는 거라면,

…어쩌면,

그러나 이내, 산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아무 문제 없다. 어릴 때 마음이 그대로인 게 오히려 문제지.

그때는 아이의 사랑, 지금은 어른의 사랑을 해야 하는걸.

“나는 아드리안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걸 상상도 해본 적이 없어요.”

쳇, 글라키에스가 혀를 찼다.

그게 아니면 뭐?

“네 마음 말고 아드리안 마음을 묻는 거야. 아드리안도 너처럼 생각할까? 확신할 수 있어?”

“당연하죠.”

이런 걸 질문이라고.

아드리안의 사랑이야말로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자신의 마음이 아닌 아드리안의 마음을 꼽을 터였다.

“아드리안은 나를 사랑하고, 나의 반려가 되기를 원해요. 다른 건 원해 본 적이 없을걸.”

“흐음, 그렇단 말이지?”

글라키에스가 한쪽 입술만 쳐올리며 미소 지었다.

비웃는 게 분명한 얼굴에 산샤는 불쾌하면서도 불안해졌다.

혼자 다 안다는 얼굴로 저러고 있을 일인가. 따로 아는 게 있으면 가르쳐 주든가.

“물어봐.”

“뭘요?”

“아드리안이 어떤 마음인지 가서 물어보라고.”

“…그걸 꼭 물어봐야 아나요? 아드리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꽉 차고, 온전하게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헐, 글라키에스가 헛웃음을 웃었다.

“이 미물이 똑똑한가 싶으면 이렇게 미련한 소리를 한다니까.”

어디가 미련하다고?

분한 마음에 홱 고개를 쳐들었지만, 얼른 눈에서 힘을 풀었다.

노려보지 말자. 순한 눈으로 쳐다보자.

괜히 글라키에스를 화나게 해서 또 소리를 지르고 나서면 힘들어진다.

알아서 조심해야 하는 게 너무 싫지만, …조심해야지. 안 그랬다간 머리가 깨져버릴지도 몰라.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글라키에스가 코웃음을 쳤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 자신이 미련하지?”

“…하고 싶은 말이나 하시죠.”

“네 마음 말고 아드리안 마음을 생각하라고. 꽉 차는 건 네 마음, 믿는 것도 네 마음이잖아. 아드리안도 그런지 직접 물어보란 말이야.”

자꾸 따지고 드니까 자신감이 사라진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위험해도 달려오는 아드리안이었다.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그렇지만 나로 인해 충만해지는지는 모르겠다.

“아드리안도 차…겠죠.”

“그런 애가 핑계만 생기면 너를 떠나려고만 하니?”

“위험하니까, …나를 생각하는 마음에….”

아니지, 사랑하면 함께하고 싶은 게 먼저지.

위험하면 둘이서 힘을 합쳐 위험을 없애는 게 맞다. 헤어져 있을 게 아니라.

글라키에스가 말한 대로 가서 직접 물어보는 게 좋겠다.

산샤는 글라키에스의 제안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가서 뭐라고 물어보죠?”

“간단하지. 나는 네가 좋다, 너도 내가 좋으냐?”

“아….”

“그럼 자자.”

“으응?”

산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앞에 서 있는 신을 바라봤다.

“정말 그렇게 말하라고요?”

“나는 그렇게 했어. 그랬더니 넙죽 달려들던데? 너 알지? 우리가 얼마나 금실 좋은 부부였는지.”

글라키에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을 꾸듯 나른하게 웃더니 금세 서글퍼했다.

“그래도 영원히 안 있어 주더라. 결국 나만 두고 가버렸잖아.”

“그건 그쪽 분이 신이고, 카이 백작은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글라키에스가 산샤의 말을 끊었다.

“너도 오늘이 아니면 다신 물어볼 수 없을지도 몰라.”

“…뭔가 알고 있는 거예요?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잔뜩 냄새만 피우지 말고 그냥 말을 해 줘요.”

“아드리안의 마음 따위 몰라도 상관없다면…. 너 좋을 대로 하고.”

글라키에스는 산샤의 질문은 무시하고 자신의 말만 했다.

“…기껏 열어놓은 대연회에 반려 없이 참석해도 좋지, 뭐, 신선하네.”

더 말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산샤는 그대로 휙 돌아섰다.

가서 묻자.

나는 네가 좋다.

너도 내가 좋지?

여기까지만 하자. ‘그럼 자자’는 하지 말고.

산샤가 나가는 걸 지켜보던 글라키에스가 중얼거렸다.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너희들 하는 짓이 지루하다는 거지. 잘해 봐라, 나의 현신.”

* * *

떠나는 게 옳은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산샤가 위험에 처한다면 절대 스스로 용서할 수 없다.

그로 인해 산샤와 헤어져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일 테지.

어차피 자신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클라우스 아드리안 라인하르드, 절대 행복해지려고 하지 마라. 너는 행복해질 수 없어. 행복해지면 안 돼.]

어머니의 유언이었다.

유언이라기보다는 저주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에게 아드리안은 불행 그 자체였다.

황제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고, 황제의 아이는 낳지 않기를 바랐는데.

하필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낳았고, 황제의 견제를 당해야 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아이를 낳은 탓에 죽을 때까지 병에 시달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도망가자고 했다.

[같이 가자. 황궁만 벗어난다면 나는 다시 건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아. 행복해질 수도 있을 거야. 나를 어머니라 생각한다면 가자, 같이.]

팔을 틀어쥔 앙상한 손에 도드라진 핏줄을 보며 아드리안은 더럭 겁이 났다.

아드리안은 어머니의 손을 뜯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고.

자신은 황제가 되어서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고. 그게 황태자로서 지켜야 할 의무라고.

그러자 어머니는 아이처럼 엉엉 목 놓아 울었다.

한참 울고 나서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며 그랬다.

행복해지려고 하지 말라고.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막았으니, 너도 행복하면 안 돼.]

어머니의 저주는 효과가 있었다.

불행했고. 산샤로 인해 행복할 때 마음 한쪽은 언제나 불안했다.

로베르트 백작이 사고를 당하고 모든 게 뒤집혔을 때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모든 게 다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 어머니가 자신에게 내린 저주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억울하다.

처음부터 자신에겐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 줄 능력이 없었고, 어머니도 알고 있었다. 그저 내키는 대로 원망을 퍼부었을 뿐이었다.

아드리안은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째서 행복해지면 안 돼?

무엇을 위해서 산샤를 떠나야 하지?

산샤가 자신이 아닌 다른 자와 결혼해도 어쩔 수 없다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괜찮을 리가 없잖아.

닐스 미켈이나 타마라커 같은 자들만 얼쩡거릴 때는 산샤가 다른 자와 결혼한다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 했다.

산샤의 주먹에 나가떨어지는 자들에게 위협을 느끼려야 느낄 수가 없잖은가.

조나스가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알았다.

산샤가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게 어떤 것인지.

그렇게 둘 수 없다.

산샤와 자신은 이미 서로에게 속한 사람이었다.

산샤는 아드리안의 것이고,

아드리안은 산샤의 것이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고리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순간!

문이 활짝 열리더니 거짓말처럼 산샤가 달려 들어왔다.

“아드리안!”

아드리안이 미처 뭐라 말할 겨를도 없었다. 산샤는 아드리안의 품에 파고들며서 외쳤다.

“사랑해. 너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기억하지 못하던 시간에도 너를 사랑했어.”

허리를 끌어당기며 산샤는 몸을 뒤로 젖혀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지금, 어느 때보다 더 깊이 사랑하고 있어. 나를 두고 떠난다고 하지 마. 너 없는 디아머드는 상상할 수도 없어.”

아드리안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긴 숨을 겨우 뱉어낼 뿐이었다.

손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산샤를 안을 수도 없고 밀어낼 수도 없어서 엉거주춤 떠 있는 상태였다.

산샤가 진심을 말한다는 건 알았다.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는 거니까.

그렇지만 지금 산샤는 정상이 아니었다. 가끔 그러하듯 정신은 자고 있는데 몸만 움직이는 중이다.

며칠째 이렇다. 모리츠가 다리가 부러진 날부터였던가.

꿈에 글라키에스와 이야기하다가 미처 깨지 못한 상태로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때마다 아드리안은 산샤를 달래고 재워 왔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할 수 있긴 했지만….

빌어먹을 글라키에스.

광산 문을 닫아야 했건만 신에게 대적했다고 산샤의 기억을 지워버리더니, 여전히 산샤를 조종하려 든다.

잠결에 제게 달려오게 만드는 건 대체 무슨 이유지?

비몽사몽 제정신이 아닌 산샤에게 뭘 하라는 거야?

산샤가 멀쩡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스스로 뭘 하는지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걸.

산샤는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완전히 밀착해 오며 속삭였다.

“어째서 사랑한다고 하지 않아? 내가 얼마나 그 말을 기다리는지 모르는 거야?”

백만 번이라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산샤가 기억하지 못할 상태일 때는 싫다. 더는 혼자만 기억할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팔을 뒤로 돌려 산샤의 손을 풀어내기 위해 잡았다.

“산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좀 더 자는 게 좋겠어.”

“아니야. 꿈꾸는 게 아니란 말이야.”

산샤가 강하게 고개를 흔들며, 손을 엮어 잡았다.

산샤의 손을 풀어내려고 했는데,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이 묶여 버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산샤의 눈동자는 그렁그렁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이대로 괜찮겠어? 정말 내가 없어도 괜찮아?”

비통한 울림이 아드리안의 자제력을 무너뜨렸다.

더는 참을 수 없다.

아드리안은 그대로 산샤의 입술을 덮쳐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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