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모리츠의 다리가 부러지기 두어 시간 전.
산샤는 모리츠가 마차를 숨겨두고 다시 디아머드 성으로 잠입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역시나 부지런한 모리츠, 잠시도 지체하지 않는구나. 그럴 줄 알고 이쪽도 만반의 준비를 해놨다.
기사단 합숙소는 미리 비워두었다. 요즘 기사단이 바쁠 때라서 아주 쉬웠다.
조나스는 돌려보냈고, 아드리안의 도움은 거부했다.
아드리안이 처음엔 못마땅해했지만,
얀과 모리츠의 대화를 듣기만 할 건데, 아드리안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각자의 길을 가자면서 이런 것까지 따라오면 어떻게 내가 내 길을 갈 수 있겠냐니까 수긍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글라키우리를 챙겼고, 얀의 옆방에 편한 의자도 가져다 놓았다.
준비는 완벽했다.
그중 가장 확실한 준비는 얀의 결심이었다.
얀이 자신과 모리츠의 악행을 자백하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렇게 하자고 그게 옳다고 설득한 건 맞지만, 이렇게 빨리 결심할 줄은 몰랐다.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물었더니, 얀은 진심이라며 자신이 결심한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막심은 그야말로 깨끗한 사람이었는데 작정하고 털어대니까 결국 발목 잡힐 일이 나오더라.
그때는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 하고 그저 흥분되고 좋았다. 막심의 자리를 뺏어 앉을 테니까.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고 보니 불안해졌다.
언젠가는 자신도 똑같은 꼴을 당할 것 같았다.
기사단 모두가 단장에게 없는 죄를 만들어서 쫓아낸 것을 보지 않았나.
단장을 쫓아내면 누구든 단장이 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단 말이지.
아니나 다를까.
한스와 기사들은 자신을 체포하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히려 산샤가 말한 것보다 더 꽁꽁 묶고 싶어 했다.
그러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거기까지 말하고 얀은 새삼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맞습니다. 막심을 북부 지역에서 추방한다고 하고서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죽여버렸습니다. 후환은 그대로 두면 안 되는 법이니까요.”
얀은 죽고 싶지 않았다.
입으로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소리쳤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 죽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나를 제대로 재판해서 북부 지역 멀리 추방해 주십시오. 혼자 가라고 하지 말고, 정말로 멀리 갔는지 확실하게 확인도 해주십시오.”
산샤는 그러겠다고 했다.
원한다면 라즐로 제국까지 호송해주겠다고도 했다.
얀은 또 하나 조건을 달았다.
“내가 한 일은 나 혼자 한 게 아니야. 모리츠가 사주한 거라고요. 그러니 모리츠도 잡아줘요. 나는 쫓겨났는데, 그놈은 호의호식하고 살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렇지만 모리츠가 사주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모리츠는 애초에 증거를 남기는 작자가 아니라고 했다.
“내가 모르는 악행도 엄청날 텐데…. 막심은 물론이고 집사, 하녀장을 죽인 건 확실해요. 그건 내가 봤어요.”
그렇지만 얀의 증언만으로는 판결을 확정 지을 수 없었다.
모리츠는 얀이 앙심을 품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반박할 테고, 그러면 얀은 할 말이 없어지니까.
“그러니까 증거를 모아줘요. 빼도 박도 못하게 확실한 증거로 모리츠를 죽여 달라고. 나 혼자 쫓겨나지 않게 해 주라고요.”
산샤는 그것도 그러겠다고 했다.
모리츠는 ‘증거를 남기는 작자가 아니라’고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고 따지지 않았다.
대신에 모리츠의 자백을 유도해 보자고 했다.
자신이 얀의 옆 방에서 듣고 있을 테니 모리츠와 제대로 한번 싸워보라고.
몸으로는 싸우지 말고 말로 싸우라고.
얀은 흔쾌히 승낙했다.
혼자 쫓겨나지 않을 수 있다면, 없는 죄라도 만들어 씌울 작정인 것 같았다.
정말 그럴까 봐서 걱정이 될 정도였다.
사실대로 있었던 일만 말하기로 약속하고, 산샤는 옆 방에 편한 의자를 가져다 놓고 기다렸다.
절대 엿듣는 건 아니었다.
가주는 엿듣지 않는다.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참관하는 거지.
예상대로 모리츠는 달려와서 얀을 추궁했다.
얀도 연습했던 대로 비열하게 웃으며 모리츠 입에서 먼저 자백이 나오도록 자극했다.
그런데 다음 행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거였다.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내려놓지 못해?”
누군가 호통을 쳤다.
처음엔 얀이 욱한 성질을 못 이겨서 그러는 줄 알았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가주인 산샤에게도 칼을 휘둘렀던 사람이니까.
게다가 모리츠 하나쯤 주먹으로도 해결 볼 수 있을걸.
그렇지만 모리츠가 이대로 죽어버리는 건 곤란하다.
죽더라도 자신이 저지른 짓을 낱낱이 다 밝힌 다음이어야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고 당하기만 한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했다.
산샤는 어쩔 수 없이 모리츠를 구하기 위해 얀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무기를 휘두르고 있는 건 모리츠였다.
얀에게 망치를 휘두르는 모리츠는 눈이 확 뒤집혀 뵈는 게 없는 것 같았고, 얀도 봐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죽이면 안 돼!”
산샤는 외쳤다.
그냥 두면 모리츠가 한 방에 죽어버릴 것 같아서, 급한 마음에 글라키우리를 허공에 휘둘렀다.
어떻게 해야겠다고 작정한 건 없었다.
상황은 급박한데 손에 검이 있으니 휘둘렀을 뿐.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다.
쐐액!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검이 바람을 갈랐고,
알 수 없는 기운이 모리츠를 강타했다.
퍼억!
몸이 반으로 접힌 모리츠는 그대로 날아가 연무장에 내동댕이쳐졌다.
산샤는 얀의 방에서 연무장까지 뚫린 벽의 흔적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리츠가 죽는 건 곤란했지만 널브러져 뒹구는 꼴은 볼 만했다.
산샤는 모리츠가 뻗은 것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모리츠가 미쳐가는 걸까?
망치가 있다고 내려치다니.
자신에게 당할 얀이 아닌 건, 누구보다 모리츠 본인이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니! 아니! 그 전에!
망치는 어디에 있었던 거야?
그런 건 준비한 적이 없다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해가 질 무렵에야 모리츠가 신음하며 깨어났다.
기어이 다리가 부러졌으니, 치료를 해줘야 할 모양이었다.
* * *
치료사는 모리츠의 다리뼈가 붙을 때까지 움직임을 최소로 해야 한다며,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모리츠 하우스로 돌아가는 건 최소 일주일 뒤여야 한다고 했다.
모리츠에게 쓰던 방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뒤에 마차를 타도 된다면 연회를 열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겠냐며,
모리츠는 대연회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뒤에 대연회가 열린다.
바라던 바였다.
그러라고 아니타를 통해 밀란 대공을 부르겠다느니, 황제가 알아서 해버릴 거라느니 등등의 정보를 흘린 거니까.
모리츠가 아직은 생각할 줄 아는 모양이다. 미치지도 않았고.
근데 왜 얀에게 망치를 휘둘렀을까. 쪽도 못 쓸 게 뻔한데.
이유는 그날 밤에 밝혀졌다.
이젠 꿈에 고정 출연하는 얼음여황 글라키에스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그랬어. 망치만 휘두르면 얀을 이길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지.”
어쩌면 저렇게 당당할까?
일을 그르칠 뻔했는데….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서 저러나?
“…왜요? 왜 그랬는데요?”
“모리츠가 뭐든 네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니까 재미가 없잖아.”
“뭐요?”
“…라고 말하면 네가 화를 내겠지?”
얼음여황님아!
장난질을 하면 화가 더 나거든!
“…궁금했거든. 네가 글라키를 잘 쓸 수 있을지.”
“잘 쓰려고 날마다 검술 수련을 하잖아요.”
“글라키는 검을 다루는 능력과는 관계없어. 얼마나 교감하느냐가 중요하지. …뭐, 잘 쓰더구나. 과연 내 현신이다.”
이분이 이렇다.
꿈에 고정적으로 출연하면서 ‘현신’이니, ‘영웅’이니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있다.
누가 그 ‘현신’ 하겠다고 했냐고.
어디 안 가고 딱 북부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을 뿐인데, 거기에 ‘글라키에스의 현신’같은 건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것을.
산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쉬지 마라. 주름 생긴다. 드디어 대연회를 한다는데, 예쁘게 보여야지.”
글라키에스가 변했다.
전엔 정신을 살짝 놔버린 아이 같더니, 요즘엔 어머니 같다.
진짜 어머니 마리에와는 완전히 다른, 끝없이 잔소리하면서 챙겨주는 일반적인 어머니랄까.
이런 어머니는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조금 귀찮기도 하고.
산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차면서 중얼거렸다.
“한숨 쉬어서 주름 생긴다는 말은 못 들어 봤는데….”
산샤 말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글라키에스가 물었다.
“기분은 좀 어떠니?”
“…갑자기 기분은 왜요?”
멀뚱멀뚱한 산샤에게 글라키에스가 호통쳤다.
“고지가 코앞에 닥쳤잖아.”
“예? …고지가 뭐요?”
“네가 목표했던 일을 곧 이루게 된단 말이야.”
그래도 산샤는 여전히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고, 글라키에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찮은 미물이여, 어리석도다.”
“…뭐가요?”
“…연회 끝나고 황제 승인까지 받으면 너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디아머드의 영주가 되잖아.
그러면 모리츠 집에 들어가서 응접실에 있는 부조를 떼어올 수도 있어. 집 소유권도 압수하고….
그래! 죽여버려도 되겠구나.”
산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게 쉽진 않을 거예요.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무너질 모리츠가 아니라구요.”
“그래도 너의 권한은 무시 못 할걸? 그러니 완전한 계승을 이루기 전에 죽여버리려고 했던 것 아니냐. 그걸 못 했으니 제가 죽는 거고. …그래서 다시 묻는다. 기분이 어때?”
“기분을 챙길 때가 아니에요. 모리츠를 잡았다고 끝날 일도 아니고요. 잡아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거든요.”
“뭐?”
“호레스 밀란도 잡아야죠. 그래야 아드리안이 도망 다니지 않고 지낼 수 있으니까요.”
피식, 글라키에스가 웃었다.
“과연 내 현신이다. 이러다가 세상을 구하겠구나. …그래서 반려는 누구니?”
산샤는 새삼스럽게 글라키에스를 쳐다봤다.
“아드리안이요.”
글라키에스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쉴새 없이 수다 떨던 이가 너무 오래 말이 없으니까 불안해질 무렵.
글라키에스가 물었다.
“확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