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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67화 (67/97)

67화

“그러니… 앞으론 결혼하겠다 말겠다 하지 말고, 마음에 꾹 담아놓으셨다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서 이기십시오.”

“아니… 그게….”

조나스가 이번에도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황제에게 그럴 수는 없다.”

“그럴 수 있습니다. 저의 반려를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저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산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는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결정하면 그대로 됩니다. …물론 상대가 그럴 마음이 있어야 하겠지만요.”

산샤는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바꿨다.

“자, 그러니…. 모리츠가 무엇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부터 챙겨 볼까요?”

* * *

모리츠는 디아머드 성 한쪽 구석에 있는 나무 그늘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마차를 타고 모리츠 하우스로 돌아가는 척하다가, 몰래 정원으로 숨어들어왔다.

디아머드 성에서 태어나 자란 모리츠가 아니던가.

이렇게 숨어들어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얀을 만나야만 했다.

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재판을 열어 달라고 하는지 알아내야만 하니까.

처음 아니타의 말만 듣고는 반신반의했다.

얀이 재판을 열어달라고 할 놈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단 말이다. 게다가 아니타가 어디 신뢰할 수 있는 계집이던가.

닐스에게 아니타를 잘 이용해보라고 조언했던 건, 산샤를 꼬시는데 필요한 자질구레한 정보를 얻으라는 거였다.

정말 중요한 정보를 얻을 생각은 아예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아니타가 닐스와 자신을 이간질하는 게 보였다.

아니타는 닐스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닐스를 떼어놓으려 한다고 계속 말하고 있었다.

닐스가 머리가 나빠서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길 망정이지.

그래도 촉은 좋아서 아니타의 말에 좌지우지되면서 찡찡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모리츠는 닐스를 떼어내고, 다른 놈을 반려로 세우고 싶어서 이래저래 알아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정해지기 전에 닐스가 그 사실을 알면 곤란했다.

정리가 안 된 상황에서 닐스가 돌아버리면 감당할 수가 없을 테니까.

그래서 헛소리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경고를 해 줄 생각이었다.

모리츠 하우스로 끌고 가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들키면 안 되니까.

산샤는 이제 밀란 대공까지 나서서 탐내는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조심해서 나쁠 게 없지.

그런데 자신이 아니타를 잡아갔다는 걸 아는 것 같단 말이야.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았을까?

한참 고민을 하다가, 모리츠는 콧방귀를 뀌고 걱정을 털어버렸다.

흥, 알긴 뭘 알아?

철딱서니 없는 계집애.

제 능력인 줄도 모르고, 오러가 보이자 겁에 질려 눈과 귀와 입을 다 닫아버린 아이가 아니었나.

용케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났을 뿐.

그 운이 언제 다할지 모를 일이지.

모리츠에게 산샤 디아머드는 여전히 무시해 치울 수 있는 어린 계집애일 뿐이었다.

“제법 가주인 척, 위엄 있는 척하지만, 흥.”

마차가 아직 있어서였을 거다.

그래서 자신이 아니타를 잡아갔으리라 생각했을 거다.

타고 온 마차는 있는데 사람이 안 보여. 그런데 아니타도 안 보여.

혹시 같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그러니 마차를 안 보이게 숨겨놓고, 얀을 만나러 가자.

빨리빨리 움직여야 했다.

자기를 젖혀놓고 대연회를 열 거라지 않던가. 밀란 대공도 부를 거라지.

대공이 보고 있으면 황제 아닌 다른 사람을 반려로 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 황제가 말을 꺼내기 전에, 자신이 먼저 연회를 열어야 했다.

대공이 참석할 여유도 없이 재빠르게 해치워야 한다.

그때 후환이 없도록 얀부터 해결을 봐야 했다.

산샤 그 얄미운 계집애가, 제가 사법관 노릇을 해서라도 얀에게 재판을 열어주겠다는 걸 보면,

분명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물론 얀이 정신 줄을 놔버리지 않은 다음에야, 함부로 입을 놀리지는 못할 거였다.

알고 있는 일들이 다 제가 한 일과 관련이 있으니까, 자신의 죄를 고하는 것과 같단 말이지.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정말로 정신 줄을 놔버렸을지도 모르고.

모리츠는 부리나케 기사단 합숙소로 달렸다.

* * *

북부 행궁.

조나스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와 소파에 늘어졌다.

마르틴이 멀거니 바라보다 물었다.

“이 행동은 뭔가요? 산샤와 아드리안을 볼 거라고 신나서 가시지 않았던가요?”

“뭐긴 뭐야? 쫓겨나서 기분이 안 좋단 거지.”

“누구한테 쫓겨나요?”

“나는 거기 있을수록 방해라더군.”

“…레이디 산샤가요?”

“그럼 누구겠어? 같이 있고 싶었는데…. 재미있는 건 둘이서만 하고….”

“허어….”

마르틴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뭐냐, 그 표정은?”

“웃고 싶은데 웃음이 안 나오는 표정이랄까.”

“왜 웃고 싶은데?”

“폐하가 뭘 하고 싶다는 말은 처음 들어서요.”

“하아….”

이번엔 조나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읽히는 한숨과 표정.

만사 귀찮아서 늘어져 있던 예전의 조나스는 흔적도 볼 수 없었다.

조나스가 중얼거렸다.

“이상하지? 아드리안을 보면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동경하는 형을 바라보는 외로운 아이가 된 기분이야.”

“오래 기다리셨으니까….”

“그런데 아드리안은 나에겐 일말의 관심도 없어. 오직 산샤뿐이지.”

“허어….”

마르틴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이번엔 또 뭐야?”

“갑자기 관심이 생기겠나요? 원래도 관심이 없으셨잖아요. 항상 바라보기만 했다면서요.”

“그렇지만 이렇게 오래 기다려왔는데…. 황제위를 돌려주려고 갖은 수모를 견디며 지켜왔는데…. 한 번 정도는 알아봐 줘도 되는 거잖아.”

“그거야… 그 자리를 그분이 원하셨는지부터 먼저….”

“시끄럽다.”

조나스가 매섭게 마르틴의 말을 끊어버렸다.

“원해야 해. 원하게 만들 거야. …너, 바이다 후작. 전해야 할 건 제대로 다 전했지?”

“…정령의 돌을 폐하가 가지고 있다는 거요?

…했죠. 황제가 보관한다는 걸, 이미 알고 계시던데요? 명색뿐인 황제라도, 황제가 된 이상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권한이라고….”

“언제든지 내줄 수 있다는 말도 했어?”

마르틴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나스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근데 왜 달라고 안 해?”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 말만 안 하는 게 아니야. 아예 아무 말도 안 해. 나하고는 말을 섞으려 하지를 않아.”

마르틴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하세요, 폐하. 필요하면 달라고 하시겠죠.”

“이게 다 산샤 디아머드 때문이야.”

“뜬금없이…?”

“둘 사이를 갈라놓을 거야. 멀리 떼어놓을 거라고!”

“아니, 왜요? 전하를 움직이게 하려면 레이디가 있어야 한다는 걸 아시면서….”

조나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아냐. 없어도 돼. 산샤는 치워버리고 아드리안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위를 넘겨줄 거야.”

끄응, 마르틴이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앉았다.

“드디어 작전 시작이군요.”

* * *

모리츠는 자신이 당한 일을 믿을 수 없어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방금 뭐가 지나갔지?

무엇이 밀어냈나?

연무장에 덩그러니 주저앉아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

정원에서 기사단 합숙소까지 오는 건 일사천리, 걸리적거리는 게 없었다.

누구와 맞닥뜨린 사람도 없고 감시의 눈도 없었다고 확신했다.

기사단 합숙소에 왔더니, 마침 대부분 클라이드에 갔다고 했다.

팔커가 허둥지둥 디아머드를 떠난 다음 정리할 것이 많다는 소리는 들었다.

잔당을 소탕하고 치안을 재정비하느라 바쁘다지?

합숙소를 지키고 있던 종자는 모리츠를 잘 알아보지도 못했고, 순순히 얀에게 안내해줬다.

얀이 자신의 방에 있길래 좀 놀라긴 했다.

지하 감옥 쯤에 갇혀 있어야 하지 않나? 가주에게 칼을 들이댄 자인데….

그런데 너무 멀쩡하고 자유롭잖아.

놀란 건 일단 덮어놓고, 물었다.

“재판을 열어 달라고 했다지? 무엇 때문이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괴로워서요. 다른 사람의 악행을 못 본 척했던 것은 양심에 찔리고, 막심 경에게 한 짓은 너무 미안했습니다. 디아머드 백성에게 모두 밝히고 마땅한 죄를 받고 싶었습니다.]

모른 척했던 악행이 뭐냐고 묻자, 얀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다 아시면서 뭘 묻냐’고 했던가.

순간 모리츠는 치솟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 합숙소는 비어 있겠다.

얀 하나쯤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망치를 들어 얀의 뒤통수에 대고 휘둘렀다.

돌아보던 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튀기며 ‘사람 살려.’라고 외쳤다.

그리고 몰아친 것이 바람이었던가?

아니, 눈보라였나?

모리츠는 그대로 날아가 연무장에 내동댕이쳐졌다.

정신을 잃었나 보다.

얼마나 연무장에 누워 있었을까?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여전히 합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연무장에 내동댕이쳐진 자신만 있을 뿐이었다.

멍했으나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금방이었다.

얀은 이름 난 검사가 아니던가.

아무리 그쪽이 빈손이고 이쪽에 망치가 있다고 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눈에 보인다고 망치를 휘두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한 거지?

오히려 몰아친 바람인지 무엇인지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게 아닌가.

바람에 당하고서야 자신이 ‘바람을 다스리는 자’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떻게 그걸 잊어버렸을까.

지진을 일으킬 정도의 바람이 있었잖아?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산샤와 함께 있었어.”

누굴까? 그 자리에 누가 있었나?

갑작스럽지만 황제?

그도 황가의 자손이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그렇지만 그토록 무능한 황제였는데, 그럴 리가….

그렇다면 설마 아드리안?

정말….

어쩌면….

가능성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동안 심장은 벌렁벌렁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어서 돌아가야겠다고 몸을 일으킨 순간,

우두둑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면서 모리츠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종자가 빼꼼히 내다봤다.

“자작님, 거기에서 뭐 하십니까?”

모리츠는 고개를 젓고 넋이 나간 채 대답했다.

“글쎄, 모르겠다. 귀신에게 홀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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