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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66화 (66/97)

66화

아니타가 디아머드 성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걸 알고는 난감하기는 잠깐.

아드리안이 바람에 실린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금방 떠올랐다. 바람을 정보원으로 둔 사람이란 말이지.

아니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짐작대로, 아드리안은 금세 두 사람이 있는 곳을 알아냈고, 돌풍을 일으켜 지진과 비슷한 느낌도 내줬다.

그렇지만 능력이 능력이다 보니까, 은밀하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해야만 했고….

산샤는 아드리안이 능력을 사용하는 동안 조나스를 떼어놓고 망을 봐야 했다.

일이 다 되자, 자연스럽게 아니타가 있는 지하 저장고로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일분일초가 급한데 어떻게 기다려. 아니타가 한 대라도 덜 맞게 해야지. 아프잖아.

“나를 따돌리고 레이디 혼자 이런 일을 벌이다니….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드리안의 말에 산샤는 웃어 보였다. 웃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뭐라고 하긴요. 감탄해야죠. 아니타와 벤야민 그리고 나. 정말 잘 해냈잖아요. 최고의 팀이라고요.”

아드리안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드글드글 들끓는 마음이 너무나 확연히 느껴졌다.

그래도 산샤는 모르는 척, 해맑게 웃어 보였다.

화내지 마. 어쩌겠어. 당신이 봐줘야지. 나를 봐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단 말이야.

산샤의 마음이 통했는지, 아니면 아드리안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건지….

아드리안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대단한 팀이에요. 인정해요.”

“다들 훌륭하죠? 손발이 척척 맞잖아.”

“그래요. 사람을 잘 뒀군요.”

“사람은 정말 중요하거든요. 나한테 특별한 능력이 없어서,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하니까요.”

“…레이디에게는 능력이 있잖아요. 내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걸로.”

“으응?”

산샤는 새삼스럽게 아드리안을 쳐다봤다.

자신에게 있는 거라고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후회뿐인 줄 알았는데, 바람을 다스리는 것보다 더 좋은 능력이 있다고?

“사람을 끌어 모으는 능력. 다들 레이디를 위해 일하고 싶어 하잖아요.”

“…아?”

“아니타, 벤야민, 랄프, 딕키, 자크, …그리고 나까지. ”

“…프리스도 있어요.”

이런 걸 능력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산샤는 프리스를 빼지 않고 챙겼다.

“그렇지만 그건 능력이라기에는 좀…. 민망한데? 내가 잘해서 그들이 돕는 게 아니에요.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걸 줄 뿐이죠.

맛있는 음식을 감사해하고, 이름을 불러주고, 돈이 필요하다면 벌게 해주고…. 그런 거.”

“그게 능력이에요. 일을 잘할 수 있게 판을 짜주는 거.”

명쾌한 결론에 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신도, 정말 어마어마한 능력자네요! …바람 어쩌고 그거 말고 그 전에 이미.”

“내가?”

“내가 일할 수 있게 해주잖아. 기다려주고, 구해주고, 봐주고, 조언해주고, 용기를 주고,

그 힘으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판을 짜니까, 결국은 당신이 모두에게 일하게 해주는…. 어?”

산샤는 말하다 말고 흐지부지 말꼬리를 흐렸다.

아드리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민망한 듯 시선 둘 데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반응 뭐야?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이러니까 괜히 부끄러워지잖아.

산샤는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해서 아드리안을 바로 볼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입을 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드리안만 놓고 가버릴 수도 없었다.

멀뚱멀뚱 서 있자니, 더 창피해서 산샤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그때였다.

“여기 있었구나!”

조나스였다.

“레이디 산샤, 나를 떼어놓고 가버리다니…. 너 정말 나빴어!”

산샤는 귀찮기 그지없던 조나스가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반가운 만큼 웃었더니, 멈칫 조나스가 물러섰다. 그러고는 아드리안과 산샤를 번갈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너. 수상하게 왜 반가운 척해? 둘은 왜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야? 지하에 숨어서 뭐 한 건데?”

말이 왜 저래?

숨어서 하긴 뭘 해?

서로 칭찬밖에 한 게 없다!

산샤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둘이서만 있었던 거 아니에요.”

조나스가 휘휘 둘러보더니,

아드리안과는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하면서 산샤에게 따지고 들었다.

“둘이서만 있었던 거 아니면, 뭐? 여기 투명 인간이라도 있다는 거야? …아무리 봐도 내 눈엔 둘밖에 안 보이는데?”

“여럿이서 있다가 둘이 남은 거란 말이죠.”

“흐응, 그래? …그러니까, 여럿이 있다가 둘만 남아서 뭐 했냐고 묻는 거잖아.”

“그게….”

쉽게 말을 나오지 않았다. 진짜 별거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부끄러울까?

“…하긴 뭘 해요. 대화했지.”

“대화?”

조나스가 팔짱을 끼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얼굴도 바로 볼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대화가 뭘까?”

산샤는 느물느물 웃는 조나스를 노려봤다.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닙니다.”

“내가 뭘 생각할 줄 알고?”

웃는 거 보면 무슨 생각 하는지 뻔히 알겠는데, 뭐?

굳이 그걸 내 입으로 말하게 하려는 건 무슨 이유냐?

“부끄러워하면서 말 못하니까 더 궁금한데…. 뭐지? 뭘까?”

뺀질뺀질 얄밉게 저럴 일이야?

놀림감이 될 일이 아닌데,

그런 거 절대 아닌데,

말을 못 하는 나는 또 뭐람.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도 부끄러워서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건 또 뭐고?

분하지만 무려 황제 폐하라서 함부로 할 수도 없고, 산샤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무엇을 했든 둘 사이의 일이지요.”

마침내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둘의 일은 둘에게 맡겨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폐하?”

조나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드리안을 바라봤고, 아드리안은 무심한 대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나스가 팔짱을 풀더니 바로 섰다.

“…그러지요, 전하.”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조나스를 보면서 아드리안이 설핏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조나스가 고개를 숙이는데….

‘어라?’

산샤는 제 눈을 의심했다.

수줍어하는 것 같다?

세상 얄밉게 뺀질거리더니, 아드리안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하고 순한 아이가 된다고?

아드리안이 다시 말했다.

“레이디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길까요? 우리 셋이서 같이 해야 할 대화가 많은 것 같은데.”

“그게 좋겠습니다.”

조나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드리안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산샤도 아드리안을 따라가려는데, 홱, 조나스가 잡아당기더니 물었다.

“어떻게 한 거냐?”

“…뭘요?”

“전하가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준 건 처음이란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아까 집무실에 같이 있었을 때도 말은 했던 것 같은데….”

산샤는 아드리안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산샤가 황후가 될 거라면 황제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고 했었다.

그게 조나스에게 한 말이 아니었으면, 누구에게 한 말인데?

“말을 하긴 했지. 나에게 직접은 아니고….”

“그럴 리가요.”

“지금껏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공중에 대고 말을 하면 알아서 들어야 했단 말이야. 아니면 마르틴을 통해서 하거나….”

산샤는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몰라도 상관없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까. 그걸로 됐단 말이다.”

조나스가 감격스러운 듯 제 가슴을 부여안았다.

새삼스럽다는 듯이 산샤를 위아래로 훑어보기도 했다.

“대단하구나, 너! …너만 건드리면 전하가 달라져.”

그러고는 덥석 산샤의 손을 잡더니 외쳤다.

“역시 너와 결혼해야겠어. 너를 놔주지 않을 거야!”

* * *

산샤와 아드리안 그리고 조나스는 다시 집무실에 앉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게 다 조나스가 산샤를 끌어안고 결혼하겠다고 외친 것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라인하르드 제국의 황제는 인격이 여러 개인가 듯했다.

변하는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도무지 맞춰줄 수가 없다.

지금도 봐라.

분위기 묘하게 만든 장본인인 주제에 혼자 신났다.

콧노래라도 부를 듯 싱글거리면서 차를 마시는데, 아드리안은 무표정하게 찻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산샤는 곤혹스러웠다.

둘의 눈치를 살피느라 차 한 모금을 넘길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상대해야 할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 부지런한 모리츠가 아닌가.

벌써 얀에게 달려갔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고요함을 즐길 여유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산샤가 말을 시작하자, 조나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너를 황후를 맞이하겠다는 건, 전하를 자극하기 위해서 한 말만은 아니었다. 내 진심이었어.”

이 상황에 굳이?

아드리안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데?

“줄을 서요.”

산샤는 결국 말해버렸다.

“제가 인기가 아주 많은 신붓감이거든요.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어요. 그러니 폐하도 결혼하고 싶으면 그들 사이에 서라고요.”

“…어….”

조나스가 머뭇거리다가 겨우 말했다.

“…나는 황제인데? 그런데도 줄을 서?”

“그러니까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안 그랬으면 기회조차 얻지 못하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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