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쿠궁!
온 성이 흔들릴 만큼 강한 진동에 모리츠는 멈췄고 아니타는 몸을 움츠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모리츠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아니타는 설령 그게 자신에게 물어본 말이라고 해도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기는 자신도 마찬가지니까.
큰 진동 지나가고 따라온 작은 진동에 달그락달그락 흔들리는 선반을 붙잡으며 모리츠는 또 중얼거렸다.
“…신이 노하셨나?”
끄응, 아니타는 몸을 더 작게 말아 웅크렸다.
그래도 저건 아니다. 알 만한 분이 저런 헛소리를 하네. 신이 그렇게 한가하겠나. 쓸데없이 노를 왜 해?
북부에 지진 같은 게 났으니,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하지만….
아니타는 확신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가씨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뭔가 하시는 게 분명하다고.
그때였다.
콰당!
문이 거칠게 열리고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여기 사람 있어요? 대피해야 합니다. 사람 있으면 바로 나오세요. …여기 사람, …아니 자작님!”
뛰어 들어온 사람은 벤야민 집사였다.
“여기에서 뭐 하십니까? 어서 나오세요. 어서요. …아니, 아니타, 너까지…!”
놀라는 모습이 엄청나게 어색하다는 걸 집사님은 알까?
누가 봐도 여기 있는 걸 뻔히 알고 들어온 것 같은데.
“아니타! 그러고 멀거니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와라, 어서. 일어나!”
벤야민이 마구 몰아내는 통에 모리츠와 아니타는 정신없이 지하 저장고에서 밀려 나왔다.
나와 봤더니 산샤가 급하게 뛰어가던 척을 하면서 외쳤다.
“어머! 모리츠 자작! …아니, 아니타! 어쩌다 둘이 같은 데서 나와요? 지하 저장고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모리츠가 당황하여 우물쭈물하는데, 아니타는 몰래 혀를 찼다.
아가씨도 연기력이 엉망인 건 집사님이랑 마찬가지네. 이렇게 어색해서야 자작님은 의심받고 있다는 걸 알고도 남겠네.
그러다가 아니타는 생각했다.
어쩌면 알게 하려고 일부러 서툰 연기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연기는 자신 있다고 말해 왔던 아가씨니까.
팔커의 근거지에서도 자신의 연기로 엄청난 공을 세웠다고 자랑했으니까.
아니타는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는 모리츠를 훔쳐봤다.
이쪽 분도 아가씨의 행동을 보고 생각하는 바가 있었을 터,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크흠, 아니타와 시선이 부딪친 모리츠가 헛기침을 하더니 뜬금없이 물었다.
“지진이 난 거냐? 땅이 흔들렸는데….”
“지진이라니요. 북부에서요? 그럴 리가 있나요. 갑자기 돌풍이 불더니 잠깐 성이 흔들리지 뭐예요.”
“…돌풍?”
모리츠가 깜짝 놀라 산샤를 봤다.
“어디에서, 어떻게, 왜? 돌풍이 불었단 말이냐?”
급하게 묻는 모리츠가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지는 확실했다.
팔커의 경비들에게서 알고 싶었던 것도 오직 하나 ‘바람을 다스리는 자’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갑자기 때아닌 바람이 불어 성이 흔들릴 정도라면 ‘바람을 다스리는 자’의 능력일 만했다.
그러나 산샤는 모리츠의 애타는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무구하게 고개만 젓고 말았다.
“모르죠. 말 그대로 돌풍이잖아요.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 어디에서, 어떻게, 왜…를 어떻게 알아요?”
그러고는 아니타를 돌아봤다.
“아니타, 다과를 준비해 온다더니 저장고까지 갔어? 뭘 얼마나 대단한 걸 가져오려고 했던 거야?”
“예에, 그게….”
아니타는 말끝을 흐리고 눈치를 살폈다.
‘뒤통수를 맞고 기절했었는데, 깨어나 보니 지하 저장실이었고, 그 자리에 모리츠 자작이 있더라.’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모리츠 자작을 지금 잡는 건가? 아님 나중에 잡는 건가?
그때 산샤가 슬쩍 아니타의 등을 밀어내며 말했다.
“가서 집무실에 다과나 준비해줘.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목이 마르구나.”
이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뜻이려니….
“예, 아가씨. 지금 가서 냉큼 준비하겠습니다.”
아니타가 부리나케 뛰어가고.
산샤는 다시 모리츠에게 시선을 돌리고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은 웬일이신가요? 언제나 달고 다니던 혹도 없이?”
“혹이라니?”
닐스 미켈을 말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리츠는 괜히 한번 되물었다.
그러나 산샤는 모리츠의 반문은 못 들은 척 자신의 이야기만 계속했다.
“왔으면 저부터 보지 않고, 지하 저장고에 하녀와 함께 있었단 말이죠. 그건 또 왜?”
“…아니타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산샤는 무심하게 끄덕였다.
“…그러셨구나. 그래서 아니타를 저장고에 끌고 들어갔어요?”
“무 …무슨 소리냐!”
모리츠가 외쳤다.
“아니타가 거기 있길래 갔던 것뿐이다. 내가 왜 끌고 가? 나는 그런 몰상식한 짓은 하지 않는다.”
“예에…. 정말이신 것 같네요.”
“그, 그야….”
정말로 진실이어서 그렇다고 말하려는데, 산샤가 냉큼 모리츠의 말을 끊어버렸다.
“아니어도 큰 상관은 없겠죠. 아니타는 무사하니까. 그냥 좀…. 아니타에게 물어볼 말이 뭐였을지, 그건 궁금하네요.”
산샤는 고개를 갸웃하며 모리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둘이서 사적인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나요?”
“사적인 대화는 아니었다.”
“어머!”
산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공적인 대화? …둘이서 공적인 대화를 한다는 게 더 이상한데?”
모리츠가 산샤를 봤다. 한참 보면서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더니 불쑥 물었다.
“아니타가 닐스 미켈을 만나고 다니는 걸 알고 있었니?”
“아니요.”
산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타가 만나는 사람도 많네요.”
“돈이면 뭐든 다 하는 아이 아니냐. 미켈 남작을 만나서 너에 대한 정보를 전해줬다더구나.”
“어머나….”
산샤는 저절로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켈 남작과 내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다지 뭐냐. 내가 남작을 무시하느라 대연회를 안 열고 딴짓을 했다는 거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지….”
꿀꺽! 산샤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겨우 물었다.
“정말이에요? 정말 남작을 무시하느라 대연회를 안 열었어요?”
“헛소리!”
모리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집안의 어른으로서 이것저것 챙겨야 할 일이 많아서 지체된 것뿐이지. …너까지 하녀 말에 홀려 쉽게 넘어가다니 실망스럽구나!”
순간 산샤는 넙죽 고개를 숙였다.
“실망 시켜서 죄송하군요.”
“…뭐?”
너무나 빠른 사과에 오히려 모리츠는 혼란스러웠다.
오늘 산샤가 목적하는 바가 있어서 나름의 계산으로 움직이는 건 알겠는데,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절대적으로 자신에게 좋을 리가 없는 일일 텐데….
이 아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산샤가 순진해 보이게 눈을 깜빡거리더니 말했다.
“…대연회가 너무 지체되는 건 사실이니까요. 선대의 경우를 생각하면 벌써 열렸어야 하는 시간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몇 가지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다.”
“그렇군요.”
산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만 괜찮아요. 곧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말이냐?”
산샤가 입술을 꼭 붙이고 헤벌쭉 웃었다.
“지금은 비밀이에요. 아직 결정된 게 없어서 말씀드릴 수는 없거든요. …깜짝 놀라겠지만, 마음에 들 거예요.”
모리츠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비밀이라곤 하지만 벌써 아니타에게 들었다. 자신은 젖혀 버리고 황제가 대연회를 열 거라는 걸.
그렇게 열린 대연회에 호레스 밀란 대공까지 참석한다면, 자신의 사람을 반려로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 차린 밥상인데 다른 놈이 홀라당 다 털어먹게 한단 말이냐.
모리츠는 밀란 대공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대연회를 열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아, 그리고… 수일 내에 재판을 열려고 해요. 준비해 주세요.”
이건 또 뭔 소리냐.
모리츠 얼굴이 확 구겨졌다.
“지금 말이냐?”
“…수일 내라니까요. 며칠 안에.”
“너는 아직 완전한 영주도 아니고….”
“에이, 디아머드 법을 알면서 그런다.”
산샤는 손사래를 치더니, 확정적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레 후에 재판을 열겠어요. 준비하세요.”
모리츠가 까드득 이를 갈면서 물었다.
“누구 재판을 열 건데?”
“아… 그 말을 안 했구나.”
산샤가 씨익 웃었다.
“비밀이에요. 재판을 요청한 사람이 비밀 재판을 열어달라고 했거든요. …이것도 깜짝 놀라겠지만, 마음에 들 거예요.”
모리츠는 눈을 질끈 감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물론 얀의 재판이겠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자신이 저지른 일인가?
그동안 해 온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한 것 같지만, 누군가 염탐했을지도 모른다.
모리츠는 불안해졌다.
얀도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다.
그때 산샤가 물었다.
“아니타에게 물어볼 건 다 물어봤어요? 아무래도 내 전담 하녀니까, 내가 있는 자리에서 대답하게 해줄까요?”
“아니다, 됐다. 대충 들었다.”
모리츠는 격하게 거부하더니,
“내 정신 좀 봐라. 내가 할 일이 잔뜩 밀려 있었는데…. 다음에 다시 보자.”
허둥지둥 달려 나갔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산샤는 마침내 긴 숨을 내쉬었다.
“모리츠가 누구에게 갈지는 뻔하군요.”
나직한 목소리가 산샤 뒤에서 들려왔다.
산샤가 미소 지으며 돌아봤다.
“아드리안!”
그러나 아드리안은 웃지 않았다.
“나를 따돌리고 레이디 혼자 이런 일을 벌이다니….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