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산샤가 ‘아니타’를 외쳐 부르며 뛰쳐나오자마자 부딪친 것은 차와 과자를 잔뜩 실어놓은 트롤리였다.
평소 아니타가 밀고 다니던 거였다.
집무실 앞에 트롤리를 두고 이유 없이 사라질 리 없으니, 누군가에게 납치된 게 분명했다.
“혹시 자작님이 오지 않으셨습니까?”
뒤늦게 달려온 벤야민이 오히려 산샤에게 물었다.
“집무실 앞까지 안내해 드리고, 아니타에게 인계했는데요.”
역시 모리츠.
부지런하기도 하지.
닐스 미켈을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되었을 텐데….
“모리츠 하우스에 가야겠어요. 아니타를 끌고 갔을 거야.”
산샤는 말하는 중에 이미 달리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급하게 산샤의 팔을 잡았다.
“혼자 가겠다는 거예요?”
“아니, 혼자는 아니고…. 랄프도 있고 딕키도 있어요.”
순간 아드리안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산샤는 얼른 덧붙였다.
“아드리안, 당신도 같이 가줄 거예요? 아니, 같이 가요. 당신이 꼭 있어야만 해. …나 혼자는 아무래도 위험하죠. 그쵸?”
산샤가 해죽 미소까지 덧붙이자 미간이 좀 펴졌고, 아드리안이 앞에 섰다.
“가요.”
그때 옆에 있던 조나스가 끼어들었다.
“나! 나도…. 나도 같이 가.”
“폐하께서 끼어드실 일이 아니에요. 얌전히 행궁으로 돌아가 계세요.”
“왜에? 모리츠 자작이라면 나도 잘 아는 사람이라고. …계급으로 눌러줘야 할 일이 있다면 나 만한 사람이 어디 있어?”
그 말은 맞다. 그렇지만 이 사람 믿어도 되나? 모리츠 앞에서 딴소리하면 어떻게 해?
산샤가 돌아보자,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드리안이 믿어도 된다고 했으니까.
“좋아요, 그럼. 같이 가요.”
“야호!”
조나스가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금세 들떠서 외쳤다.
“나만 믿어.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모리츠 자작은 내 앞에서 꼼짝도 못 할걸?”
그럴수록 못 미더워서 산샤는 표정을 감출 노력도 하지 않고 말했다.
“절대 먼저 나서지 마시고…. 딱 뒤에만 계세요.”
“아, 왜? 공식적으로는 내가 계급이 제일 높으니까, 내가 제일 앞에 설 거야.”
“계급 때문에 그런 거예요, 계급 때문에…!”
“어?”
“원래 황제는 뒤에서 무게 잡는 사람이잖아요. 황제가 선봉에 서는 거 봤어요?”
“어?”
“…뒤에 서요.”
잠깐 궁리해보는 것 같더니 조나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뒤에서 무게를 딱 잡고 있겠다.”
“가죠, 그럼. 한시가 급해요. 아니타가 위험하다고요.”
“그런데 가주님!”
급한 벤야민의 부름에 산샤가 돌아봤다.
“자작님이 귀가하시는 건 못 봤습니다. 마차도 그대로 있는 것 같고요.”
“…마차가 그대로 있어?”
아니타가 닐스에게 ‘모리츠가 팔커의 경비를 잡아대고 있더라’라고 말하면 당연히 모리츠가 아니타를 닦달하러 올 줄은 알았다.
‘어디서 그걸 알았냐.’
‘그거 말고 또 뭐를 알고 있느냐.’
추궁하고, 어쩌면 고문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이쪽에서 원하는 정보를 흘릴 수 있어서 다음 일을 하기 쉬워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위험한 일이라 망설이는데, 아니타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추가 수당만 두둑하게 챙겨주면 자신이 맡아서 하겠다고.
이참에 집을 한 채 사고 싶다고도 했다.
그래서 산샤는 신신당부했다.
괜히 아픈 꼴 당하지 말고 물어보는 건 다 대답해주라고. 안 물어보는 것까지 모조리 다.
무엇이든 다 말해도 괜찮다고.
되도록 빨리 구하러 가겠다고.
그렇지만 ‘되도록 빨리’는 모리츠 하우스로 잡혀갈 경우에 가능했다.
거기엔 프리스가 미리 행적을 파악하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아직 디아머드 성에 있는 거라면….
벤야민이 고개를 저었다.
모리츠의 행적을 모른다는 거지.
벤야민도 아니타가 잡혀갈 줄만 알고 모리츠의 마차만 주시하고 있었을 테니까.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모리츠가 아니타를 데리고 갈 만한 곳이, 성안에는 너무 많다.
내 집에서 구멍이 뚫려 버리다니….
아니타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 * *
아니타는 주섬주섬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고 있었다.
“자작님, 제가 여기 왜 있을까요? 분명히 자작님을 집무실 앞에서 만났던 것 같은데요.”
이 말은 당신이 잡아 온 걸 다 안다는 뜻이잖아?
“자작님은 여기 왜 계세요? 지하 저장고는 저희 같은 하녀들이나 드나드는 곳이죠.”
이것도 아니고.
“저한테 뭐 물어볼 게 있으셨어요? 아무 말이나 다 해드릴 수 있는데요.”
이것도 아니다.
자신이 한마디 할 때마다 모리츠의 표정은 더 냉랭해지고 있었다.
겁나 무서워.
말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아니타는 짜증을 내고 말았다.
“뭐라고 한 말씀 하세요. 보고만 있지 마시고….”
아차차, 괜히 성질 돋우지 말고 고분고분하게 있으랬는데.
“너야말로 왜 여기 있니? 지나다가 저장고 문이 열려 있어서 내려와 봤더니, 네가 이러고 있더구나.”
“예?”
자기가 끌고 내려온 게 아니라는 건가? 얼굴은 냉랭한데 목소리는 다정하시네.
이게 더 무서워.
“기왕 이렇게 된 거. 아니타, 너에게 물어볼 게 있는데. …어떻게 알았니? 내가 팔커의 경비들을 찾고 있는 것을.”
우와!
아니타는 입을 쩍 벌렸다.
이렇게 확 꽂아버리는 질문을!
아가씨도 이런 건 예상 못 했다. 잡혀가서 고문당할 것만 대비하고 있었는데….
이렇든 저렇든 해줘야 할 말은 잔뜩 있다.
아니타는 연습한 대로 대답했다.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자작님께 불려 간 사람들 모두 팔커한테 급료 받던 사람들이잖아요. 마을 사람들도 다 알아요.”
“그거 말고 또 뭘 알고 있니?”
“그 사람들이 안 돌아왔다는 거? 마을 사람들은 아무래도 자작님에게 뭔가 있는 것 같다고 수군거리던데요.”
“…또?”
“아가씨가 밀란 대공을 대연회에 초청할 거래요.”
“뭐어?”
우웅, 모리츠가 배 속에서부터 끓는 듯한 소리를 냈다.
무서웠지만, 아니타는 추가 수당을 생각하며 헤벌쭉 웃으려고 했다.
“황제 폐하가 오셨잖아요. 대연회에 참석하러 오신 거니까. 그러면 대공도 오셔야 한대요.”
“누구 맘대로?”
“황제 폐하요.”
연습했던 2단계 시작. 아니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어갔다.
“폐하께서 기다리기 지루하다고 대연회를 열 거라고….”
“내가 집안의 어른인데, 황제가 왜 남의 집안일에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거냐?”
“폐하가 요구 안 해서 그렇지, 하면 하는 거라던데요. 원래 황제는 자기 맘대로 하는 거라고….”
“이잇….”
모리츠가 선반을 내리쳤다.
선반 위에 놓인 치즈 덩어리가 덜컹 튀어 올라서 아니타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저 정도 힘으로 맞으면 무사하지 못하겠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지.
한 대라도 맞으면 맞은 사람만 손해다.
모리츠가 분해 씩씩거리면서 중얼거렸다.
“호레스 밀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친단 말이지? 나를 이렇게밖에 대우를 못 한단 말이지?”
밀란 대공에게 화를 낼 거라더니, 딱 아가씨 말대로 되어 가네.
‘호레스 밀란과 모리츠 갈라놓기’라나?
이제 3단계로 넘어가야겠다.
아니타는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그런데 자작님, 얀 경비대장 이야기는 들으셨어요?”
모리츠가 분해서 씩씩거리던 그대로 아니타를 훑어봤다.
“얀이 왜?”
“얀 대장이 아가씨에게 재판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네요.”
“재판?”
“지난 십 년,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알고 있는 것을 다 자백하고 심판을 받고 싶다고 했대요.”
모리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가씨가 재판을 열어주겠다고 했다네요. 재판이라니…. 그런 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죠. 재미있는 구경거리겠어요.”
“…재판이라니, 사법관도 없는데 말이냐?”
“영주에게는 사법관의 자격이 있는 거라면서요? 아직 황제 승인이 안 나서 완전한 영주는 아니지만, 재판 정도는 열 수 있다는데요?”
비틀, 모리츠가 선반의 기둥을 붙잡아 몸을 지탱하며 심호흡을 했다.
그동안 모리츠가 대연회를 열지 않은 건, 산샤의 반려를 찾지 못해서였다.
처음엔 닐스 미켈이 딱인 줄 알았다.
도박과 여자, 수많은 빚으로 목줄을 움켜쥘 단점이 다 갖춰져 있었고,
철없는 소녀의 감성을 자극할 만한 외모를 갖고 있으며,
못 꼬셔본 여자가 없다고 자신만만했으니까.
그랬는데 쥐뿔.
산샤한테 얻어맞고 다니지를 않나. 어찌나 징징거리는지 꼴도 보기 싫어졌다.
닐스 미켈보다 더 괜찮은 놈, 그럼에도 자신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놈을 찾고 있는데….
그런데 밀란 대공이 치고 들어오고, 거기에 얀?
그놈이 야비한 주둥이로 무슨 말을 지껄일지 더럭 겁이 났다.
이러다간 다 빼앗기고 감옥까지 가게 되는 건 아닐까.
그때 아니타가 말했다.
“자작님은 좋으시겠어요.”
“뭐가?”
“대연회 그거 얼마나 귀찮은 일입니까? 귀찮은 일은 황제가 해주겠다고 하고….”
모리츠가 노려보든 말든, 아니타는 계속 종알거렸다.
“반려는 황제 아니면 아드리안 경 둘 중 하나가 될 테니, 그것도 자작님의 수고를 덜어주는 일이고요.”
슬쩍 모리츠의 눈치를 살피며 미소도 지었다.
“이제, 자작님은 편히 쉬실 일만 남았네요.”
“으으으으….”
모리츠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너, 이 건방진 하녀! 감히 나를 놀려?”
“예?”
자기가 건방지고 무례하다는 거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갑자기 왜 이 대목에서?
“제, 제가 왜요? 편히 쉬시라고 덕담한 건데….”
“입 다물어! 이렇게 된 이상 분풀이라도 해야겠다.”
아, 이런!
무례가 습관이 되어 버려서 아무래도 좋은 말을 할 수 없는 걸까?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약 올린 것처럼 들렸나 보다.
아니타는 울고 싶어졌다.
아가씨가 그렇게나 말하던 고문을 시작하려는 건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걸. 시킨 것만 했어야 했는데, 더 잘해 보려다가 일을 망쳤네.
“도,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자작님. 마음에 안 드시는 게 있으시면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그 입을 다물라고 했다.”
모리츠가 눈을 부라리며 다가섰고 아니타는 고개를 처박고 꺄악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쿠궁!
온 성이 흔들릴 만큼 강한 진동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