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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63화 (63/97)

63화

“아드리안!”

“황제!”

산샤와 아니타는 여전히 다툼 중인 듯한 어조로 둘을 불렀다.

그러고는 멍하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고, 한참 후에 아니타가 빼먹은 호칭을 붙였다.

“…폐하!”

모두의 시선이 아니타에게 몰리고,

“우와악! 내 정신 좀 봐.”

아니타는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과를 내오겠습니다. 집사님, 가요 가. 가서 차를 준비합시다.”

그렇게 아니타와 벤야민이 가버리고, 다시 세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

같은 장소에 서 있으나,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사람들.

그 고요를 깨지 못하는 시간이 한참 지나고, 조나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이름으로 불러달라니까….”

* * *

아드리안과 조나스.

둘을 놓고 누가 더 좋으냐고 말싸움한 걸 들켜서 수치스러운 걸 잊어버릴 만큼, 그걸 의식하고 있는 둘을 보는 게 부담스러웠다.

얼굴을 바로 볼 수도 없었다.

산샤는 아드리안과 조나스를 살짝살짝 훔쳐보고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아니타는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어딜 간 거야, 대체.

차를 가져오겠다더니, 찻잎을 따러 차드라 왕국까지 날아갔나.

또 한숨이 나오려는데, 불쑥 조나스가 말했다.

“우리는 같이 온 거 아니고, 요 앞에서 만났다.”

“……?”

“우리 안 친하다고.”

누가 물어봤나?

산샤는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레이디 없는 혼자만의 길’을 가겠다더니, 왜 왔을까.

사과하려고 왔어야 하는데 말이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은 농담으로 넘겨버리긴 했지만, 무지하게 신경이 쓰였다.

오랜 시간 아드리안을 외롭게 만들었지 않았나.

기억상실로….

절대 본의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아드리안에게는 기나긴 시간이었겠지만, 자신에게는 기억이 있기 전후로 나뉠 뿐이어서 그다지 긴 시간으로 체감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아드리안이 어떤 마음일지 도통 모르겠다.

정말 지쳤을 수도 있겠다 싶고, 아니타 말처럼 ‘절교’하고 싶은지도….

그저 서로의 관계에서 헤어나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불쑥 조나스가 말했다.

“난 너와 결혼할 거다, 레이디 산샤.”

이건 또 뭔 헛소리냐.

산샤가 멍하니 쳐다봤고, 아드리안도 놀라서 돌아봤다.

아드리안과 산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조나스가 턱을 쳐들었다.

“뭐? 왜?”

“누구 마음대로 결혼해요?”

“나는 너의 이름을 들으며 자랐어. 결혼하게 될 거라는 말도 함께.”

“…누구한테요?”

“태어나자마자 그랬지. ‘이 아이는 산샤 디아머드와 결합할 겁니다’라고 했지.”

“누가…요?”

“끊임없이, …20년간 듣다 보니까 이젠 너 아니면 다른 짝은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누가 그러더냐고요.”

조나스가 산샤를 똑바로 바라보며 강조하듯이 말했다.

“산샤, 나는 너와 결혼할 거다.”

“아니,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누가 그런 헛소리를 20년간 속삭였냐니까…요?”

어이가 없으니까 존댓말이 안 나온다. 이러다가 정말 황제 이름도 막 부르겠어.

조나스가 멀쩡한 얼굴로 말했다.

“나의 외숙부. 이름은 알지? 호레스 밀란이라고….”

“기막혀라….”

산샤에게 호레스 밀란은 이름만으로 이미 악당이었다. 좋은 쪽으로 언급된 적이 한 번도 없어.

역시나 한 번 악당은 영원한 악당, 뭘 해도 악행이구나.

본인이 뭔데 남의 이름을 들먹이며 커가는 아이에게 헛된 망상을 심어 줘?

“산샤, 너는 나에게 희망이었다. 너와 결혼하면 내 삶이 달라질 거라고 믿게 되었지.”

황제도 그렇다.

희망을 그런 데서 찾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당신의 희망이 있을 리가 없지.

“우습지 않니? 결합이라니…. 그래서 나는 나 편할 대로 결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산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우스운 것은 이 대화 자체인 것은 모르나?

도저히 안 되겠다.

헛된 희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이부터 해결해야겠다.

산샤는 조나스를 똑바로 마주 보고 진지하게 불렀다.

“폐하!”

조나스가 느물느물하게 웃으며 딴청을 피웠다.

“이름을 부르라니까.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면 안 듣겠다.”

“조나스 폐하!”

“폐하 빼고….”

“…조나스!”

“조나스 악셀이라니까!”

조나스가 ‘악셀’을 강조하여 발음했다.

“조나스라는 이름은 너무 흐리멍덩하지 않니? 악셀까지 붙여야 근사하게 느껴진단 말이다.”

확, 때려 버릴까?

말로 설득하지 말고 주먹으로 해결할 수도 있잖아. 알아들을 때까지 패?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산샤는 솟구치는 화를 가라앉히면서 천천히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결혼은 둘이 하는 겁니다. 혼자 결정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나는 황제잖아. 황제는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진짜 …때릴까?

산샤는 주먹을 불끈 쥐고 억지로 미소 지었다.

“황제라고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순간 조나스가 엄청나게 원망스럽게 산샤를 흘겨보더니,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래, 지금은 전혀 그러지 못하고 있어. 나는 이름만 황제인 신세니까. 호레스 밀란의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삐죽삐죽,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갑자기 태세를 전환해도 되는 거야?

저렇게 슬픈 표정이어도 되는 거냐고?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왠지 위로해주고 싶어져서, 산샤는 주먹에서 힘을 풀고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폐하?”

“조나스 악셀이라니까!”

그랬더니 조나스는 언제 삐쭉거렸냐는 듯이 해사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너와 결혼하는 건, 나의 외숙이 원하기도 하니까. 결국은 이뤄지겠지, 우리 결혼.

밀란 대공은 너를 황후로 맞이하고자 나를 여기에 보냈다. 너는 황후가 되고 마정석 광산은 제국의 것이 될 거야.”

산샤는 당장이라도 날아가려는 주먹을 다른 손을 꼭 움켜쥐고 말했다.

“제가 황후가 되어도 마정석 광산은 디아머드의 것입니다.”

“아하! …그러니까 너도, 네가 황후가 될 걸 알긴 아는구나? 그러니까 너는 나랑 결혼하는 거야. 그렇지?”

어떻게 이야기가 그렇게 되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혀버렸는데,

“레이디가 황후가 될 거라면, 황제가 누구인지부터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아드리안이 말했다.

뭐라고?

뭐라고 한 거지?

말의 뜻을 곰곰 생각하며, 무심한 아드리안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는데….

짝, 짝, 짝.

조나스가 천천히 손뼉을 쳤다.

“드디어 결심하셨군요, 전하!”

전하?

‘폐하’가 부르는 ‘전하’라니, 호칭이 어떻게 꼬이는 거야?

“역시 이런 자극에 움직이실 줄 알았습니다.”

‘드디어,’ ‘결심’, ‘자극’?

이건 또 무슨 이야기?

자극당하면서까지 당신이 결정해야 할 일이 뭐야, 아드리안?

정말 나 없는 당신만의 길을 가기로 한 거야? 황제가 될 거냐고?

나는 디아머드를 떠날 수 없는데, 당신은 황제가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해?

아니타 말마따나 ‘절교’를 결심한 거야?

“…나는….”

아드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타!”

갑자기 산샤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아니타, 왜 안 와? 다과를 준비해 오겠다더니….”

눈도 깜빡하지 않고 아드리안의 입만 바라보고 있던 조나스가 조금은 짜증스러운 듯 물었다.

“차를 꼭 마셔야겠어요? 지금 전하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데….”

“미안, 조나스 악셀! 미안해요, 아드리안! 차를 마셔야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타가…!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설명하고 있을 새가 어디 있나. 산샤는 손을 내젓고 급하게 뛰어나갔다.

“아니타! …벤야민! 다들 어디 있어?”

* * *

“으으으….”

아니타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아픔에 신음하며 눈을 떴다.

험하게 굴 수도 있을 거라고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키다니!

얼마나 추가 수당을 요구해야 하는 거야? 이건 진짜 한두 푼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라고.

애초에 추가 수당에 눈이 멀어 위험해서 안 된다던 아가씨를 들쑤셔 여기까지 왔으니, 제대로 벌어보자고!

아니타는 이리저리 목을 움직여 머리통이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아주 낯익은 장소, 디아머드 성의 지하 저장고였다.

아가씨는 닐스에게 말을 흘린 이상 모리츠가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납치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 바로 구해주겠다고도 했는데….

그건 모리츠 하우스로 끌려갔을 때 이야기고.

여기 잡혀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거 아냐? 괜히 오며 가며 시간만 버리고…. 그동안에 고문만 더 세게 당하면 어쩌지?

쩝쩝, 아니타는 입맛을 다셨다.

이것도 추가 수당 감이다.

대체 오늘 수입이 얼마야?

“여기 있었구나, 아니타!”

아니타는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봤다.

저장고 선반 그림자에 숨어 있는 사람이 보였다.

얼굴 안 보인다고 모리츠의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는데, 굳이 얼굴을 숨겼으면 모르는 척해줘야 하나?

이것도 추가 수당에 넣을 수 있으려나?

이왕 하는 거, 텃밭 좀 넉넉하게 딸린 농가를 하나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타는 없는 연기력까지 발휘해서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뭐, 그렇게 겁낼 건 없다.”

그림자에 숨은 사람이 서서히 밝은 빛으로 걸어 나왔다.

놀랄 것도 없이 모리츠였다.

“자작님?”

아니타는 어색하게나마 일단 웃었다.

웃는 입술 끝이 바르르 떨리는 거 보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몸이 먼저 느끼는 공포랄까.

그만큼 모리츠의 표정은 살벌했다.

냉기가 흐르다 못해 넘쳐서 주변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디아머드 집안이 얼음여황의 후손이라더니….

이건 좀….

추가 수당만 받아서는 안 되겠는데….

아니타는 암담해졌다.

산샤 아가씨는 어디쯤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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