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모리츠를 만나기 직전.
언제나처럼 아니타를 만나던 공원 벤치에 축 늘어진 닐스는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산샤와 결혼해서 마정석 광산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여기저기에서 끌어다 쓴 돈이 숨구멍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원금은 감히 어찌해 볼 수도 없었고, 이자의 압박이 어마어마했다. 작은 오두막 한 채 정도가 오락가락할 정도랄까.
돈을 끌어올 때 미리 이자 낼 돈까지 계산해서 빌렸는데, 그땐 서너 달이면 끝날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벌써 얼마냐.
넉 달이 넘어 다섯 달이 되어가는데, 대연회는 열릴 기미도 보이지 않고, 황제까지 등판했다.
누가 등판했든 말든 자본금만 넉넉하면 승산이 있겠는데, 돈이 바닥을 보인단 말이지.
제일 싫은 건 자신이 알뜰해지려는 거였다.
사고 싶은 것도 두 번, 세 번 생각하게 되고, 구차하고 옹색했다.
내가 누구냐.
곧 죽어도 닐스 미켈! 삐까번쩍한 부티가 매력 포인트인 사람 아니냐. 그런데 이건 뭐….
정말 이렇게 쪼들려야겠어?
아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이구우, 정말…. 땅 꺼지겠네요. 언제까지 이렇게 축 늘어져 있을 거예요?”
언제 왔는지 아니타가 퍽 등짝을 두들기며 큰소리부터 쳤다.
닐스는 발을 동동거리며 소리치고 싶었다.
짜증 나. 신경질 나.
이 하녀에게 계속 금화 주머니를 바쳐야 하는 것도 싫다.
만나는 것부터가 짜증 난다고.
조심성도 없고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얘랑 같이 있으면 어마어마하게 부끄럽기까지 하단 말이다.
대연회가 빨리 열려서 산샤만 차지하면 된다.
디아머드 백작 가를 접수하자마자 이 하녀부터 쫓아내면 만사 해결.
그런데 대연회가 열릴 기미도 안 보인다고!
닐스는 울상이 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닐스를 보더니 아니타가 쯔쯔 혀를 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닐스는 더 격하게 울고 싶어졌다.
하녀의 동정을 받아야 하는 신세라니, 정말 싫다!
“힘을 내요. 황제라고 뭐 대순가?”
“그런 거 아니다.”
“그런 거 아니기는 뭐…. 내가 그 마음 다 알아요. 황제가 나타나서 황후로 삼겠다니까 괴롭잖아.
괴롭기야 하겠지. 사실 남작님이 내놓을 게 뭐 있어요? 신분이 높기를 하나, 돈이 많기를 하나, 그렇다고 잘생기기를 했나….”
이 하녀가 진짜!
위로를 하는 거야, 돌려 까는 거야? 아니다. 돌려 까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지르고 있잖아.
오늘 내가 이 하녀에게 제대로 매운맛을….
“그렇지만 남작님은 황제에게 없는 게 있으니까요.”
홱 치켜들었던 주먹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닐스는 물었다.
“그게 뭔데? 황제에게는 없는 내 장점이?”
아니타가 쩝 입맛을 다시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를….
“뭐를 던져도 결론은 ‘나 잘났다’로 가네.”
…라고 했나?
“누가 ‘나 잘났다’로 간다는 거야? 황제가? …황제가 잘난 척하는 게 내 장점이 된다는 거냐?”
아니타가 손을 내저었다.
“남작님에게 장점이 있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남작님에게 장점이라니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있습니까?”
닐스는 다시 인상을 확 구겼다.
정말 이 하녀가 편들어주는 척하면서 자꾸 왜 나를 까는데?
“…그렇지만 뭐? 장점이 밥 먹여 줍니까? 결혼을 시켜주는 건 더더욱 아니죠.”
아니타는 술술 잘도 말했다.
“진짜 중요한 건 결혼이잖아요. 결혼해서 마정석 광산의 주인이 되셔야 하잖아!”
기분 나쁜데 하녀의 말에 끌려가게 돼. 이 하녀야말로 헤어날 수 없는 수렁이구나.
닐스는 눈도 깜빡 못 하고 아니타에게 집중했다.
“황제님에게는 없고 남작님에게는 있는 것은 바로 정! …입니다.”
“정?”
“…남작님은 우리 아가씨랑 얽힌 사건이 많았단 말이지요.”
“좋은 사건은 없었는데?”
아니타가 멈칫, 중얼거렸다.
“알기는 아는구나.”
그러고는 닐스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헤벌쭉 웃어 보이더니 말했다.
“미운 정이라도, 정은 정이죠. 사건 하나당 정 하나. 주먹질 한 번에 정 하나! 남작님과 우리 아가씨는 미운 정 고운 정 쌓인 사이!”
“아무리 들어도 장점 같지는 않은데….”
“장점 아니라니까요. 어쨌든!
이렇게 남작님과 우리 아가씨만의 역사가 만들어져 가는 지금 딱 이때에 대연회가 열려야 하는데…, 참 안타깝네요. 모리츠 자작님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하니….
대연회는 집안의 어른이신 그분 소관인데. 경비나 끌어모으고 있고….”
으응? 닐스가 의아한 눈을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경비를 왜 끌어모으고 있어?”
“그거야 저는 모르죠. 제가 아는 것은…. 지금이 딱 남작님에게 좋을 때인데, 경비를 모으는 일에 밀려서 좋은 때 다 지나간다. 이거죠.
앞으로 황제하고 아가씨하고 미운 정 고운 정 쌓일 시간인데 말입니다. 그러면 남작님이 개밥에 도토리 되는 건 또 금방이니까.”
“어, 어…. 그래. 그러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닐스는 벌떡 일어났다.
“모리츠 자작에게 가서 대연회를 빨리 열어달라고 요청해야겠어.
그야말로 네 말이 정답이다. 황제가 대순가. 내가 레이디 산샤와 쌓은 게 있는데!”
닐스는 떡하니 막고 서서 손을 벌린 아니타에게 금화 주머니를 주고는 허둥지둥 달려갔다.
아니타는 주머니를 챙기며 닐스의 뒷모습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황제는 대수랍니다. 백날 달려 봐라. 황제를 이길 수 있나.”
* * *
“하라는 대로 그대로 다 말하고 왔어요.”
“수고했어.”
산처럼 쌓인 서류에 파묻혀 가주로서의 업무를 보고 있던 산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아가씨가 말한 대로, 당장 모리츠 자작님에게 대연회를 열어달라고 하겠대요.”
“그랬겠지. 대연회만 열리면 다 해결될 걸로 믿고 있을 테니….”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차례 의논했던지라 아니타는 다음 순서를 챙겼다.
“정말 모리츠 자작님이 저를 찾아올까요?”
“오지 않겠니? 자기 딴에는 은밀하게 일을 진행하고 있는데, 네가 중요한 정보를 말해줬다고 하니까. 두려워서라도 오겠지.”
“예.”
산샤는 열심히 놀리던 펜을 내려놓고 아니타를 돌아봤다.
“정말 괜찮겠어? 모리츠가 험하게 굴지도 몰라.”
“당연히 괜찮죠. 약속하신 특별수당이나 잘 챙겨주세요. 돈이면 다 됩니다.”
“너는…. 동생들 다 아카데미에 보낼 거고, 전처럼 가난하지도 않은데 왜 계속 돈이면 다 된대?”
“이렇게 철모르는 아가씨라니까. 원래 그런 거예요. 하나를 가지면 그 옆에 있는 것까지 다 갖고 싶은 거죠. …궁핍해 봤어야 뭘 알지.”
“그래, 너는 철 알아서 좋겠다.”
산샤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고 일에 집중하는데, 아니타가 물었다.
“근데 모르겠는 건 그 느끼한 양반이에요. 왜 아직도 반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죠?”
“흐음….”
산샤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건 좀… 나도 이해가 안 되긴 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알아듣게 거절 의사를 밝혔잖아. …너무 약했나?”
아니타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거기서 더 강하게 하려면, 진짜로 허리를 똑 분질러야 할걸요? 아가씨는 할 만큼 하셨죠.”
“그렇지?”
산샤는 여전히 서류를 보면서 업무보고 하듯이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사람이 불쌍하기도 해. 왜 그렇게 헛된 희망을 품는지. 없는 돈 들여가면서….”
“그 양반 운명이려니 해야죠. 그렇다고 진짜로 허리를 부러뜨릴 수는 없잖아요.”
산샤가 서류에 빠져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리고 뭐, 아가씨가 지금 남 걱정할 때예요? 날마다 읽고 서명해야 하는 서류가 산더미인데?”
아니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날마다 읽어대도 다음날 되면 더 많아져. 끝날 생각을 안 해. 디아머드 가주야말로 극한직업 아니냐고요.”
“그러게. 재산이 많으면 그만큼 검토해야 할 서류가 많아지나 봐.”
“아드리안 경은 전엔 서류 처리하는 것도 도와주고 그러더니, 요즘엔 왜 코빼기도 보기 힘들어요?”
문득 산샤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새삼스럽다는 듯이 옆에 쌓을 서류를 보고 한숨을 내쉬더니, 아니타에게로 돌아앉았다.
“아니타, …나랑 관계없는 자신만의 길을 간다는 게 무슨 뜻일 것 같니?”
뜬금없이 뭔 소리냐는 표정을 하고서도 아니타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가씨랑 관계없는 길이요? 그런 길을 왜 간대요?”
“글쎄….”
“아가씨랑 절교하자고요?”
산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 뜻인 거 같니?”
“누가 그랬는데요?”
“뭐 그건 알 거 없고….”
산샤가 말을 흐리는데, 아니타는 산샤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절교해요.”
“뭐?”
“아가씨한테는 황제가 있잖아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가씨가 먼저 하자는 것도 아니고 아드리안 경이 먼저 하자는 거잖아요. 절교해 버리시라고요.”
“아드리안이라고 하지도 않았잖아.”
“그거야 척 보면 모르나요? 그냥 끝내 버려요. 아가씨한테는 황제가 딱이라니까요.”
“어디가 어떻게 딱이야? 나보다 돈이 더 많아서? 황제라고 디아머드보다 더 부자일 것 같니?”
“잘생겼잖아요.”
“잘생기기는 아드리안이 더 잘 생겼지.”
아니타가 입을 실룩였지만, 산샤의 말에 반대는 못 했다. 그렇지만 또 결론은 단호했다.
“누가 봐도 아가씨한테는 황제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요.”
“그런 소리 하지 마.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아드리안밖에 없어.”
헛, 아니타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예나 지금은 무슨…. 그런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다면서.”
“그러니까 아드리안이라고!”
“황제라니까요.”
“아드리안!”
“황제!”
“가주님!”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든 외침에 산샤는 깜짝 놀라 돌아봤다.
그리곤 더 크게 놀라서 ‘으헉’ 낮은 비명까지 지르고 말았다.
열린 문 앞에 집사 벤야민이 난감한 듯 식은땀을 흘리고 있고,
그의 뒤에는 아드리안과 조나스가 나란히 서서 산샤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