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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61화 (61/97)

61화

아드리안은 산샤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팔커의 근거지에서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바람을 불러들였던 마음.

산샤의 기억에서 자신이 깨끗하게 지워진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마음.

신에게 대적한다는 게 무엇인지 계산해 볼 겨를도 없이 글라키에스를 협박하여 광산을 닫아 버렸던 마음.

어느 것 하나 보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마음이 산샤에게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자신의 길은 점점 위험한 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산샤에게 함께하자고 할 수는 없으니까.

팔커의 근거지에서 공개적으로 바람을 불러들였으니 호레스 밀란에게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검술 단련할 때 더 예민하고 까다롭게 굴었던 것도,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고 싶어서였다.

때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리라.

산샤와 영원히 분리되어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조나스가 나타난 순간, 절망스러웠다. 떠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깨달아 버렸다.

그래서 조나스가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기억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황궁에서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던 사람은 루카와 조나스뿐이었으니까.

조나스가 밀란의 지시를 받아 자신을 해하러 온 건 아닐 거라는 기대를 했다.

마르틴 바이다가 밀란의 오른팔이라는 칭호를 갖고도 자신을 기다렸다고 말했던 것처럼.

기대했던 대로 조나스는 자신을 기다려 왔다고 말해줬다.

마르틴 바이다는 조나스가 자신의 증거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호나스는 가장 측근에 제대로 적을 둔 셈이었다.

조나스는 말했다.

[전하를 기다렸던 건, 제가 살고 싶어서예요. 내 것이 아닌 걸 돌려주고 제대로 숨을 쉬면서 살고 싶어요.]

아드리안에게 황제 자리를 되찾아 가라는 말이었다.

호레스 밀란을 죽이고, 그를 따르는 세력을 쳐서 굴복시키라는 뜻이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로베르트 백작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존재만으로 호레스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그래서 아드리안은 움직이기로 했다.

밀란을 죽이느냐 자신이 죽느냐.

일생 가장 큰 도박을 벌일 참이었다.

그럼에도 산샤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했을 때, 산샤의 반응은 뻔했다.

[악행을 저지르고 뻔뻔하게 제국의 주인인 척하는, 호레스 밀란을 그냥 두면 안 되지. 뭐 할까? 나는 뭐부터 해야 해?]

그러고는 아드리안보다 앞서서 밀란을 단칼에 베어 버리겠다고 하겠지.

산샤를 그런 위험한 지경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우리가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산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설령 거짓말을 하게 되더라도, 산샤를 안전하게 지켜내야 했다.

아드리안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째서 내가 내 마음을 속였다고 생각해요? 레이디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산샤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한참을 보다가 말했다.

“내가 모르면 당신이 보여줘. 그럼 되잖아.”

“나는 내 길을 가고 싶어요. 레이디가 없는 나만의 길.”

산샤는 입술을 깨물고 또 한참 아드리안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당신에게 나 없는 길이 있을 줄은 몰랐네.”

그러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그럼. 당신 길을 가요. 나는 내 길을 갈 테니.”

산샤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내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았잖아. 앞으론 당신 스스로 그렇게 해요.”

의례적으로 웃기도 했다.

“당신에게 좋은 것으로 결정해요. 그게 나에게도 좋은 거니까.”

“이미 그러기로 했어요.”

대답하면서, 아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바로 받아들이다니.

분리되자고 먼저 말한 건 자신이었지만, 내쳐짐을 당한 것도 자신인 것 같았다.

산샤가 다시 한참 아드리안을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조나스 악셀이 호레스 밀란을 잡자고 해요? 그래서 황제가 되라고?”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걸 알리지 않으려고 갖은 폼을 다 잡았는데, 이렇게 단박에 들켜 버린다고?

내쳐짐을 당했다고 쓸쓸해지고 있던 참인데?

“그렇지만 황제를 꼭 해야 하나?”

“……?”

“황제는 수도에 있는 황궁에서 살아야 하잖아. 당신은 내 반려인데, 나랑 살아야지. 여기 디아머드에서.”

제법 비장하게 그토록 많은 말을 했는데…. 하나도 못 알아들은 건가?

아드리안은 암담한 마음으로 산샤를 바라봤다.

그때 산샤가 슬그머니 웃었다.

입술이 나른해진다 싶더니 끝이 살짝 올라갔는데, 순간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까르르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것 같았다.

“내가 말을 어렵게 했나요? 알아듣기 힘들었어?”

“아니야. 알아들었어. 숨은 뜻까지 알아차렸는걸.”

“……?”

“당신에게 좋은 건 당신이, …나에게 좋은 건 내가 결정하자는 거잖아. 그렇게 해.

…그러니까 당신은 황제가 된 다음에 어디에서 살지부터 결정하자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아드리안은 겨우 말했다.

“나는 레이디의 반려가 되겠다고 동의한 적이 없는데….”

“으응?”

“진짜 반려를 정할 때까지 위장 반려가 되어주기로 했을 뿐이지.”

“흐음…. 그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산샤는 아드리안을 가볍게 흘겨보더니 또 깔끔하게 받아들였다.

“그것도 좋아. 당신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따를게.”

아니야. 이렇게 간단하게 받아들여 버리면 아무래도 이상해.

아드리안은 오리무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산샤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신중’하게 작전을 짜야지. 먼저 모리츠부터 잡아볼까?”

* * *

모리츠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하도 이를 갈아댔더니 이젠 턱까지 시큰거렸지만, 이 갈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팔커는 산샤에게 한 번 털리고는 미련 없이 디아머드를 떠나버렸다.

벌 만큼 벌었으니 미련은 없다나.

그 말에 미련이 생긴 건 모리츠였다.

가슴 한 가득찬 미련을 풀 길이 없어 그저 이만 갈고 있었다.

미련 없는 거야 제 사정이고, 그동안 돈을 벌게 해준 신의는 지켜야 할 게 아닌가.

물론 매달 1만 골드씩 수수료를 받긴 했지만, 그깟 돈이 문제냐.

모리츠가 팔커를 끌어들인 이유는 로베르트가 노예시장을 허락했다는 서명이 필요해서였다.

그게 되겠나 걱정했던 것이 비해 너무 쉽게 서명을 받아내더니, 팔커는 자신이 보관하겠다고 했다.

자신도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모리츠와 자신의 신의를 위한 보험이라며,

그랬는데 그걸 내놓고 가라고 했더니, 이제 와서 없다네.

도둑맞은 적은 없는데 사라졌대.

억울하게도 어이없고 뻔뻔한 그 말을 제대로 따지지도 못했다.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호레스 밀란의 배신이 코앞에 닥쳐서 과거의 서명에 매달릴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건 또 뭐야.

세상이 자신을 농락하기로 했나 보다.

팔커의 경비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놈 중에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본 놈이 한 놈도 없어.

돈을 준대도 몰라.

고문을 해도 모른다는 소리뿐.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찾아 호레스 밀란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는데, 다 허사가 되어 버렸다.

이러니 모리츠는 턱이 시큰해지도록 이를 갈고 있을 수밖에.

그때 닐스 미켈이 찾아왔다.

닐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리츠는 턱뿐 아니라 얼굴 전체가 아려오는 것 같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꼬실 수 있다고, 지금껏 노린 여자를 갖지 못한 적이 없다던 놈의 몰골하고는….

“어째 멍이 더 짙어지는 것 같네?”

모리츠의 인사에 닐스는 챙 넓은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며 삐딱한 소리를 얹었다.

“이대로 디아머드는 레이디 산샤 차지가 되는 겁니까? 자작님은 쫓겨나고?”

까드득, 모리츠가 이를 갈았다.

“무슨 소리야, 그게?”

“그렇지 않습니까? 클라이드의 수호자에, 황제까지. 그중 누구라도 골라잡아 백작위를 꿀꺽하게 생겼는데…. 자작님 하는 꼬락서니라고는….”

“꼬락서니?”

“팔커의 경비들은 왜 긁어모으고 있습니까? 경비를 강화하시는 겁니까? 왜요? 레이디 산샤가 무서워서요?”

모리츠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저렇게 피곤한 인간인 줄 왜 몰랐을까.

처음에 닐스 미켈을 선택했을 때는 잘생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사람 얼굴은 돌아서면 변하는 건가.

볼수록 못났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니,

호레스 밀란의 배신이니,

말해 봐야 모를 게 뻔한 놈을 데리고 뭔 말을 하나.

눈을 감고 끓어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 모리츠에게 닐스가 말했다.

“저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결국엔 산샤 디아머드와 결혼하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각자도생하세.”

“뭐요?”

“각자 살아남아 보자고. 자네랑 같이 일을 도모할 수가 없어. 결혼은 자네가 알아서 해.”

닐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렇게 날 버리겠다고?”

“버리다니? 자네가 실적을 내지 못하는 거지.”

“내가 가져다 바친 게 얼만데? 당장 여기 오는 데만 든 돈은 또 얼마고?”

“누가 돈을 쓰랬나. 쓸 필요 없는 것까지 돈으로 처바른 건 자네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거지.”

닐스는 점점 더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게 다, 네가 약속해줬기 때문이잖아. 레이디 산샤의 반려가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 하나 꼬시기는 일도 아니라고 했던 건 너야.”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가 아니었어.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 여잔데?”

닐스가 모자를 벗어 던지며 코를 들이밀자, 퍼렇게 든 멍이 선명하게 보였다.

“당신 믿고 펑펑 썼는데, 그 돈 다 못 갚으면 손가락부터 잘린다고! 내 손가락이 잘리면 당신 손가락은 무사할 줄 알아?”

닐스가 바락바락 악을 쓰고 달려들자 모리츠는 어쩔 수 없이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어쩌겠나. 부족하지만 고쳐서 쓸 수밖에. 당장 다른 사람을 구할 수도 없으니까.

“이보게. 닐스 미켈 남작, 왜 그렇게 조급해?”

모리츠는 마음속으로 욕을 하면서 얼굴로는 살살 웃어 보였다.

“나에게 보여주던 자신감은 다 어딜 갔냔 말이야. 나는 자네를 믿고 시작한 일인데, 자네가 먼저 나가떨어지면 어떻게 큰일을 해낼 수 있겠어?”

“조급하지 않게 생겼어…요? 클라이드 수호자에, 황제까지….”

“그런다고 포기해? 포기할 수 있겠어?”

모리츠는 닐스의 손을 부여잡았다.

“하얗고 길어서 아름다운 이 손가락을 포기하겠냔 말이야.”

그러자 닐스는 금세 그렁그렁해져서는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포기할 거면 내가 자작님을 찾아왔겠냐고요. 절대 포기할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해달라고 온 거지.”

“그러니까 나한테 화부터 내지 말고, 나를 믿고 따라야지. 나는 자네만 믿고 있는데.”

닐스가 원망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아까 각자도생하자더니….”

“그건 나도 화가 나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거고, 그런데 말이야. 닐스 미켈 남작?”

“예?”

“내가 팔커의 경비들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자네가 알 만한 일이 아닌데?”

닐스가 무구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타에게 들었죠. 레이디 산샤의 전담 하녀.”

“그 하녀가 어떻게?”

“자작님이 경비들 모으는 걸 알고, 레이디 산샤가 준비하는 게 있다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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