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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60화 (60/97)

60화

벌써 몇 번째 시도인지 모른다.

말을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고, 산샤는 아드리안을 가운데 앉혀 두고 왔다 갔다 하면서 한숨만 내리 쉬고 있었다.

“레이디….”

보다 못한 아드리안이 먼저 말하려고 하면, 손을 들어 막기도 몇 번.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줘요.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란 말이에요.”

결국 아드리안이 산샤 못지않게 크게 숨을 내쉬더니,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밤새 이렇게 앉아 있을 수도 있어. 그렇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는 눈빛이 호소하듯 일렁거렸다.

“하려는 이야기가 어떤 종류인지 힌트는 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어느 정도로 긴장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 있어야 하잖아.”

어? 이건 무슨 소리지? 아드리안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산샤는 너무나 여유만만해 보이는 아드리안을 가만히 훑어보다가 물었다.

“…긴장돼요?”

“당연하지. …보자마자 잡아 앉히더니 말은 안 하고 무섭게 노려보면서 한숨만 쉬고 있어. 긴장 안 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건 좀 억울한데? 내가 언제 노려봤어?”

그렇지만 조금 노려봤을지도 모르겠다.

행선지도 밝히지도 않고 사라져서 걱정했고, 화가 났으니까. 그래서 인상을 조금 쓰긴 했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보다는 살짝 더 많이? 이마에 주름이 많이 잡혔나?

손으로 이마의 주름을 쫘악 눌러 펴는 걸 보면서 아드리안의 입꼬리가 실룩 움직였다.

웃는 건가 생각하는 순간 무표정이 되어 버렸지만.

“게다가, …내가 없는 동안 생각할 시간은 많이 있었을 텐데, 아직도 정리가 안 되었으면 …정리는 안 될 거라고 봐야 하지 않나?”

“아닌데?”

산샤는 반항하는 심정으로 냉큼 받아쳤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데? 조금만 더 생각하면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건데…. 그럴 수 있는데….”

말꼬리를 흐리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드리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조나스를 만나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멀쩡하게 별일 없을 거라면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일까 싶기도 하고….

당신을 걱정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는 것은 우습기도 하고.

머뭇거리는 산샤를 보고 아드리안이 미소 지었다.

“그러니 내가 하는 말부터 듣는 게 어때요?”

“그래요. 할 말이 있으면 먼저 해요.”

산샤가 허락하자, 아드리안은 일어나서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산샤를 앉혔다.

그러고는 요만큼의 망설임도 없이 간결하게 말했다.

“나는 바람을 다스리는 자예요.”

“아악!”

산샤가 그야말로 깜짝 놀라서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알아요, 안다고. 이미 알고 있었어.

전직 황태자잖아.

‘바람을 다스리는 자’, 제국에 영광을 가져올 자로 백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잖아.

그렇지만 그걸 자기 입으로 저렇게 크게 말해 버리면 어쩌나.

루카는 황태자의 ‘황’만 나와도 벌벌 떠는데….

산샤는 아드리안에게 바짝 다가가서 속삭였다.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어떻게 해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바람에도 듣는 귀가 있다면서?”

아드리안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산샤의 양팔을 잡더니, 다시 자리에 앉혔다.

“먼저 내가 하는 말을 들어요. 의견이나 질문이 있으면 내 말을 다 듣고 난 다음에. …괜찮죠?”

“괜찮죠, 그렇지만, 아! …각성했어요? 능력이 생겼다는 거야? 당신의 각성을 온 백성이 기다리잖아. 제국에 영광을 가져올 거라고….”

산샤는 정신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마구 떠들다가 슬슬 입을 다물었다.

아드리안이 말없이 가만히 무표정하게 보고만 있는 게, …조금 무섭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이랄까. 이래서 루카가 이름만 불러도 꼬리 내렸구나.

“그래요. 얌전히 듣고 있을게요. 말해요.”

산샤는 어쩔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고,

아드리안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라고는 하나, 백성들의 기대치에는 못 미쳐요. 제국에 영광을 가져온다거나…. 그런 건 못 해.”

“왜요?”

“정령의 돌로 계약을 맺어 능력을 증폭시켜야 했는데, 못 했으니까.”

“으음, …왜요?”

“정령의 선택을 받았다는 걸 밝힐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산샤?”

산샤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안다.

질문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궁금한 게 너무 많은 걸 어쩌란 말이냐.

“능력이 어느 정도인데 미약하다고 하는지 궁금해요.”

“내가 가진 능력은 정령의 장난 같은 단계랄까. 내 시야가 미치는 범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제약조건이 있고….”

아드리안이 손을 들어 가볍게 밀어내는 모양새를 취하자, 살랑 산샤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산들바람을 만들거나… 바람에 실린 속삭임을 듣는 정도로….”

“바람에 실린 속삭임을 들어요? 설마 바람이 정보원 노릇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람에도 귀가 있다고 했던 거야?”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말을 끝낼 때까지 산샤가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을 걸 인정했다는 표정을 하고서.

‘바랄 사람한테 바라야지’라는 표정이랄까.

산샤는 그것도 못 알아차릴 정도로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약간 흥분 상태였다.

“어디가 미약한 능력이라는 거예요? 엄청난데…. 그거 말고는 또 뭐 할 줄 알아요?”

문득 콘스탄틴과 책 정리를 하던 모습이 떠올렸다.

책장이 뒤집힌 게 큰바람이라도 불었던 것 같았지.

“그때 콘스탄틴이랑…. 그것도 당신이 뭔가 한 거였죠? 그땐 산들바람 수준이 아니었는데?”

“돌풍을 불러왔어요. 그 정도까지가 내 능력. …그러니 미약하죠. 백성이 바라는 건 비바람을 불러와 가뭄에 비를 내릴 수준은 되어야 하니까.

겨우 이 정도일 뿐인데, 호레스 밀란은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두려워하죠.”

“능력이 어느 정도이든…. 황제로 운명 지어졌다는 증거이니까. 자기는 갖지 못한 거니까 그렇겠죠.”

아드리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시체를 찾지 못한 황태자의 행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흔적이 보이면 그 주변까지 초토화시켰어요.

그러니 나는 바람은 아예 잊고 살기로 했어요. 나 때문에 피해 보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니까. 그렇지만….”

아드리안이 산샤는 똑바로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바람을 불러오는 일이 생겨요. 그래서 흔적을 남기게 되었죠.”

나 때문에 아드리안이 자신의 원칙을 어겼다는 건가?

산샤는 아드리안의 시선에 괜히 불안해졌다.

“…팔커의 근거지에서?”

쿵쿵 문을 내리치던 게 바람이었구나.

산샤는 믿을 수 없는 마음에 입을 벌리고도 쉽사리 말하지 못했다.

“그 문에…. 흔적이 남았어요?”

“흔적뿐 아니라 증인들도 많이 있었죠.”

“아니 그럼….”

이야기를 더 듣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야말로 한시가 급하지 않은가.

“떠나요.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당장 짐을 꾸리러 가려는 산샤를 아드리안이 막았다.

“레이디, 내가 아직 말을 다 끝내지 못했어요. 앉아서 끝까지 다 들어요.”

“앉을 새가 어딨어. 클라이드도 위험하겠지? 어디가 좋을까?

…애플힙에 오두막이 하나 있는데, …아! 은신 마법을 써야 하나?”

아드리안은 말도 못 꺼내게 혼자서 떠들던 산샤는 멈칫 섰다.

그러고는 더 키울 수 없을 만큼 눈을 크게 뜨고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나를 두고 혼자 떠나버릴 생각이었어?”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슬쩍 시선을 피하는 건,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산샤는 이번엔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흥분 상태가 되어서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어떻게 혼자 떠날 생각을 해? 우리가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우리가 떨어졌던 것도 네가 혼자 결정해서 그랬던 거잖아. 혼자 결정하고, 혼자 희생하고, 혼자 괴롭고….”

“레이디, 내 말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니까요.”

“혼자 떠나겠다고 말하려고 온 거면 입을 딱 다물어. 우리는 이젠, …어디든 같이 움직이는 거야.”

“내가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뭐?”

“내가, …레이디가 홈통을 기어올라서 봤던 그 아이가, …이젠 아니라고.”

“그거야 당연히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보은이라고 했던가요? 로베르트 백작이 나에게 해준 것을 갚기 위해 레이디를 도왔던 거고, 이젠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요.”

“보은이라는 말, 싫어했잖아.”

“싫어했다는 게 사실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죠.”

산샤는 아드리안이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은이라고? 사랑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철없던 사랑이었을 수는 있고….”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외쳤다.

“…키스했잖아!”

“어렸을 때는….”

“어렸을 때 수없이 했던 장난 같은 키스 이야기가 아니야.”

산샤는 아드리안에게 다가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아드리안의 가슴에 손을 대고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속삭였다.

“지금도 결코 거부할 수 없을…, 어른의 키스를 말하는 거야.”

작은 숨을 내쉬고 산샤를 보는 아드리안의 눈빛이 아련했다.

산샤는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아드리안이 조금 더 다가와 둘의 숨이 달콤하게 섞였고, 산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가주님?”

집사 벤야민의 노크.

“프리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모리츠의 집사 프리스는 벌써 몇 번이나 모리츠에 대해 알려왔고, 그의 연락이라면 나중으로 미룰 수가 없었다.

산샤는 어쩔 수 없이 아드리안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프리스가 전해온 소식은 이랬다.

모리츠가 팔커의 경비들을 잡아들이고 있다.

그들에게 묻는 것은 ‘누가 바람의 능력을 썼는가?’

경비들은 처음엔 몰라서 답을 못하더니, 나중엔 그게 의미하는 바를 알고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찾는다는 소리 아닌가.

황태자를 해코지하려고 묻는 건데, 어떻게 알려주나. 제국에 영광을 가져올 분이신데….

보고를 마친 벤야민이 나가고, 산샤는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이래서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보은이니 뭐니 한 거야? 모리츠가 경비들을 잡아들이고 있어서?”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내가 내 마음을 속였다고 생각해요? 레이디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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