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누가 무엇의 단장이라고?”
나직한 목소리에 조나스는 바닥으로 미끄러져 널브러지고, 마르틴은 벌떡 일어났다.
방문이 언제부터 열려 있었는지, 아드리안이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전하.”
마르틴이 아드리안을 아는 체하며 조나스가 일어나는 것을 부축하는 동안,
아드리안은 방으로 걸어 들어와 자연스럽게 가장 상석에 앉았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어 둘을 보자, 마르틴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고, 조나스는 외면했다.
그리고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공기까지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르틴이 슬쩍 조나스를 찔렀다.
아무 말이나 해요, 좀.
그러나 조나스는 더 먼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행여 아드리안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조심하는 것 같았다.
언제 만나게 되냐고 조급해하던 사람 맞나?
만나자마자 너무 수다스럽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더니, 이건 또 뭔 상황이냐.
마르틴은 별수 없이 자신이 둘 사이에서 다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황스럽군요, 전하. 연락도 없이 갑자기 이렇게….”
“당황스럽기는 내 쪽이 더 하지 않겠어?”
그런데 아드리안이 마르틴의 말을 끊어버렸다.
“네가 나의 충신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가져오겠다더니, 마르틴 바이다 후작. 증거는 어디 있지?”
마르틴은 얼른 조나스를 앞으로 밀어냈다.
“이분이 바로 증거입니다. 황기사, 황태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단장을 소개합니다. 조나스 악셀 폐하이십니다.”
또 침묵.
아드리안과 조나스는 서로 말을 섞어 볼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괜히 가운데에서 애가 탄 마르틴은 둘의 눈치만 살피다가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폐하? 뭐라고 한 말씀 좀 하세요.”
그러나 조나스는 여전히 아드리안과 눈 마주칠 시도도 하지 않았고.
“전하, 하실 말씀 없으세요? 궁금한 게 많으실 것 같은데요.”
아드리안도 조나스와 말 섞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뭐 이런 형제가 다 있어?
마르틴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두 분이 이야기하셔야 한다고요! 할 말 많으셨잖아요, 폐하.”
그래도 조나스는 고개를 외로 꼬기만 했다.
아, 답답해라.
마음 같아서는 말 없는 형제의 등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마르틴은 제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다.
“뭐라도 해야 다음으로 넘어가죠. 종일 이렇게 수줍어만 하실 거예요? …정 할 말이 없으면, 주먹질이라도 하시든가요.”
그때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악!”
순간 마르틴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조나스도 번쩍 고개를 들어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내내 외면하더니 어째서 이 순간에 저렇게 눈을 똑 뜨고.
마르틴은 조심스럽게 조나스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폐하, 조금만 뒤로 물러서는 게….”
조나스가 매몰차게 마르틴의 손을 뿌리쳤다.
“물러선다고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그렇다. 아드리안이 돌풍을 불러오기라도 한다면 물러난다고 살겠나. 방에서 도망 나간다 해도 죽을지 몰라.
마르틴은 조심스럽게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진짜 때릴 건 아니시지요?”
그러고는 또다시 기겁했다.
아드리안이 조나스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눈빛으로 구멍을 낼 수 있다면, 벌써 구멍이 뚫리고 또 뚫려 바사삭 가루가 날 정도로….
그러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이대로 침묵 속에 죽겠구나 싶을 즈음.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나를 기다렸다니, 의외로구나.”
조나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목덜미가 붉어진 것 같았다.
조나스 악셀 황제는 매사에 심드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드리안의 말에는 토씨 하나까지 반응하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마르틴은 아드리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죽은 사람이었다. 호레스 밀란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던데, 너는 왜 달리 생각한 거지?”
아드리안의 질문에 조나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쉽게 죽을 분이 아닌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
다시 침묵.
아닌 걸 알고 있었으니, 돌아오면 뭘 하려고 했다 …이런 말을 하셔야죠.
너무너무 답답한 마르틴이 소리라도 지르려던 순간.
아드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죽지 않은 걸 확인했으면 이번엔 제대로 죽이려고?”
* * *
아드리안이 성 안 어디에도 없다는 건 이미 확인했다.
그렇지만 산샤는 벌써 몇 바퀴째 성을 돌며 아드리안 못 봤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아휴, 그만 좀 하세요, 가주님. 물어보고 가신 지 한 시간도 안 됐어요.”
한스는 손사래를 쳤고.
“어딘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외출했다고 말했잖아요.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시는 거예요?”
아니타는 아예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했으며.
“그렇게 심심하면 나랑 같이 땅이나 파든가.”
급기야 트리스는 곡괭이를 쥐여 줬다.
트리스와 티몬 남매는 팔커의 경매장이 완전히 정리된 후 디아머드 성에서 지내고 있었다.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거라 해서 자유롭게 지내라고 했더니, 성 한쪽에 텃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노는 땅이 너무 많아서 아깝다나.
수확하면 디아머드 성의 식재료로 납품할 거라고도 했다.
내 씨앗을 내 땅에서 키워서 나에게 납품하겠다고? 날강도가 따로 없네.
그럴 거면 땅 사용료라도 내라고 했더니, 트리스는 대차게 콧방귀를 꼈다.
[땅과 씨앗만 있으면 먹을 채소가 나오나? 정성스럽게 가꾸는 노력이 있어야 하잖아. 노력 값을 받겠다는데, 뭐?]
그래서 식재료 값을 미리 지불해 놓은 상태였다. 질 좋은 채소를 먹고 싶으면 선불해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노력까지 끌어다 쓰면 계산이 어떻게 되는 거지?
산샤가 곡괭이를 든 채 안 되는 계산을 하느라 인상을 구기고 있자, 티몬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가주님인데, 어떻게 땅을 파라고 해?”
흥, 이번에도 트리스는 대차게 콧방귀를 뀐다.
“가주는 채소 안 먹는대? 땅 파기 싫으면 방해 안 되게 저어기 멀리 가버리든가. 방해하는 값을 내든가.”
산샤는 두말없이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트리스가 입만 열면 묘하게 설득된단 말이지.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아드리안이 어디에 갔을지 뻔히 알면서도 찾으러 다니는 것은 머리가 복잡하기 때문.
이럴 때는 곡괭이질로 잡생각을 파내버리는 게 좋겠다.
아드리안이 행선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갈 곳이라고는 뻔했다.
황제의 행궁에 갔겠지.
황제와 할 이야기가 많겠지.
동생이니까 회포를 풀고 싶기도 하겠지.
그래도 그냥은 안 된다고, 준비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기어이 혼자 가버리다니.
모리츠가 호레스 밀란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알아낸 이 시점에!
호레스 밀란의 조카가 황제인데!
“기어이 꼭 혼자 가버렸어야만 했. 냐. 고!”
팍. 팍. 팍.
말에 맞춰 휘두르는 곡괭이엔 힘이 응축되어 들어갔다.
“아휴, 진짜!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트리스가 왜 역정을 내지?
하는 순간에 홱 손에서 곡괭이가 사라져버렸다.
빈손을 허공에 든 채로 멍하니 돌아보는데, 트리스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하면 되잖아. 이 지경으로 만들어야겠어?”
“곡괭이질을 하라고 해서 했는데, 뭐? 왜?”
“가주님이 무슨 짓을 했는지 좀 보고 말하시지? 채소 씨 좀 뿌리자는데, …사람을 묻겠다는 거야?”
어?
그제야 산샤는 자신이 해놓은 것을 봤다.
한 자리만 죽자고 파놔서, 텃밭 한중간에 깊은 구덩이가 생겨 있었다.
짧은 순간에 얼마나 전력을 쏟았는지, 몸집 작은 사람 하나쯤은 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샤는 민망하면서도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뭐?”
“여기에 아드리안은 안 들어간다고. 얼마나 키가 큰데.”
트리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더 말해 뭐 하겠냐. 답이 없다, 답이 없어.”
“곡괭이 내놔. 아직 부족하다니까.”
“부족하긴 뭐가 부족해. 사람 묻을 구멍 파는 게 아니라니까.”
“알아. 이젠 잘할게. 채소 씨 뿌릴 만큼만 살살 파겠다고.”
“됐어. 그냥 가. 방해하지 말고 멀리 가라고.”
“곡괭이 내놓으라니까. 내 돈으로 산 거잖아.”
“돈도 많으면서 치사하게 곡괭이 값을 따지고 있냐?”
티몬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누나, 그만해. 가주님도 힘든 일이 있으시니까 이러시겠지.”
“…티몬, 가주님 좀 모셔다드려라. 이왕이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어디에다 꽁꽁 묶어 버리든가.”
“누나아….”
“가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농사를 짓자는데 연애질을 하고 있어. …부정 탄다고. 멀리 가라고.”
산샤는 또 설득되었다.
귀한 채소를 키울 땅에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신성한 농사의 현장에서 아드리안 생각으로 방해를 하다니.
그래도 벌레를 쫓듯 손을 휘휘 내젓는 건 너무 하잖아.
“됐어, 티몬. 데려다줄 건 없다. 얼마든지 혼자 갈 수 있어. 내 집이고 내 땅이니까!”
흥, 트리스가 콧방귀를 꼈다.
“아무리 그래 봐라. 집 없고 땅 없다고 서러워하나. …뭐 있다고 없는 사람 앞에서 잘난 척하는 게 잘하는 짓이라 생각하나 보지?”
짜증 나. 저 말도 딱 들어맞아.
산샤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트리스가 말할 때마다 설득되는 편이긴 하지만, 대꾸도 제대로 못 해보고 완벽하게 당했다.
트리스가 워낙 말을 잘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오늘은 걱정하느라 대꾸할 정신이 없는 게 컸다.
그러니까 이게 다 아드리안 때문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걱정을 시키냐고!”
산샤는 울컥 치미는 분노를 그대로 담아 길가의 돌멩이를 걷어찼다.
휘이이이!
돌멩이가 멋지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러다가….
“아악!”
저 앞에 걸어가는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칠 것 같은 위기일발의 순간!
척!
그가 돌아보면서 한 손으로 돌멩이를 받아내 버렸다.
“아드리안….”
산샤는 멍하니 아드리안의 손에 잡혀 있는 돌멩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받아내 버렸어.”
아드리안이 돌멩이에 맞지 않아 다행인지, 돌멩이가 잡혀버린 게 아쉬운지 아리송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