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모리츠는 마법 통신구를 붙잡고 징징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 계집애를 황후 만들겠다고 생각하실 수가 있냐고요. 전하께 바친 내 충성이 얼만데….”
[하아, 모리츠….]
모리츠를 부르는 묵직한 목소리가 짜증으로 가득했다.
[넌 정말 어쩌면 이렇게 생각이라는 걸 할 줄 몰라.]
“약속하셨잖아요. 그때 그 일을 해내면, 디아머드를 주신다고…. ”
[모리츠!]
“그런데 바로 주시지는 않았죠. 갖고 싶으면 노력하라고만 하셨잖아요. 그래도 저는 군소리 안 했어요.
최선을 다하고 죽도록 노력하기만 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뭐라고? 뺏어간다고요? 손도 안 대고 코를 푼다고요?”
[모리츠! 품위 있는 말을 좀 쓰도록 해!]
“품위가 다 뭐예요? 내 것을 빼앗기게 생겼는데….”
[하아…. 모리츠.]
마법 통신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조금 다정해졌다.
[디아머드는 네 거야. 누가 그걸 뺏겠니. 어차피 네 거였는데, 어떻게 뺏어가겠어?]
달래보겠다는 의도가 분명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모리츠는 더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누굴 바보로 아나?
산샤 디아머드를 황후로 만들어 마정석 광산 소유권을 가져가겠다면서….
“마정석 광산이 없는 디아머드가 무슨 소용인데요?”
[마정석 광산은 너보다는 내가 관리하는 게 제국을 위해 옳은 일이다. 대의를 생각해 봐라.]
“대의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갖지 못할 바에야 다 부숴버려야죠.”
그것만 문제인가?
절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제일 문제는 산샤를 황후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 계집애 지위를 그렇게 올려놓으면 내가 어떻게 이기겠어요?
써먹을 대로 써먹었으니 이젠 나를 버리겠다는 뜻입니까?”
순간 마법 통신구가 잠잠해졌다.
잠시 후, 상대편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는 소리가 길게 들려 왔다.
화가 날 대로 난 모양인데, 다시 흘러나오는 목소리만은 다정했다.
[모리츠, 내가 너를 어떻게 버리겠니? 너의 충성을 내가 다 안다.]
“다른 말은 다 필요 없고요. 우리가 했던 약속만 생각하십시오. 안 그러시면 저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모리츠!]
노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더니 빠직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리츠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설마 사람 잡는 소리는 아니겠지?
화가 났을 때 아무 데나 화풀이를 하는 인간이라….
그래서 평소엔 성질을 안 건드리려고 노력해 왔지만, 이번만은 모리츠도 참을 수가 없었다.
디아머드가 아닌가.
어떻게 내 것을 뺏어 갈 생각을 해?
[휴우….]
상대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선택해라. 마정석 광산 없는 디아머드라도 갖든지. 아니면 다 포기하든지.]
“대공!”
외쳐 불렀지만, 통신은 끊겨 버렸다.
모리츠는 부르르 몸을 떨었지만, 비싼 마법 통신구만은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내려놨다.
“호레스 밀란, 이 나쁜 놈! 이런 식으로 기어이 배신을 하겠다는 거지?”
모리츠는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분을 삼켰다.
포기하라니, 누구더러 포기하라 마라야?
모리츠는 지금껏 한 번도 포기라는 건 해본 적이 없었다.
글라키에스의 예언을 알게 된 그 순간, 글라키우리를 찾아 얼음땅을 다스리고 싶었다.
먼저 가문의 계승자가 되어야 해서, 차남으로 태어난 약점을 극복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마법을 쓸 줄 알아야 선택받을 수 있다길래 열심히 공부했다.
로베르트가 마리에랑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닐 때도 공부만 했다.
그렇지만 마법은 선택받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잘못된 정보를 준 놈은 벼락 맞아 죽어라.
거기에서 포기했어야 했을까?
아니, 절대.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기필코 이루고 싶었다.
그래서 명부의 신, 오르쿠스를 소환했다.
로베르트를 명부로 끌어가달라 기원했더니, 오르쿠스는 순결한 영혼 백 개를 요구했다.
그때 모리츠가 아는 순결한 영혼은 고양이뿐이었다.
결국 백 마리를 다 채우지도 못했는데, 아버지에게 들켰고 그길로 집에서 쫓겨났다.
[생명의 존귀함을 모르는 놈은 디아머드 백작 가에서 살 자격이 없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내 생명의 존귀함은 어쩌고요?
백작가의 차남으로 태어나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고, 제 손으로는 세수도 해본 적이 없는데….
땡전 한 푼 없이 쫓아내면, 나가서 죽으라는 소린가?
처음엔 정말로 죽을 뻔했다.
굶주리다 못해 뒷골목의 쓰레기통을 뒤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리츠는 디아머드 백작가의 사람답게 미모가 출중했고,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는 법을 알았다.
덕분에 조금씩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었는데, 생활이 안정될수록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로베르트가 장남이라고 디아머드를 차지한 것도 억울했고,
아름다운 마리에를 차지한 것도 억울했다.
자신이 쫓겨나서 디아머드를 떠나 살아야 하는 것이 제일 억울했다.
억울해, 억울해.
돌아갈 거야.
돌아가서 다 죽여 버릴 거야.
밤마다 울면서 다짐했다.
디아머드에 돌아가 디아머드 돌멩이 하나까지 다 내 것으로 하겠다고.
그것 하나만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손에 묻혔던가.
호레스 밀란을 위해서는 또 얼마나 죽였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홀라당 삼켜버리겠다고?
“잘못 생각했어. 호레스 밀란. 내가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너의 가장 큰 죄악의 증거를 내가 쥐고 있다고!”
모리츠는 비릿하게 웃었다.
게다가 호레스 밀란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는 ‘바람의 다스리는 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령의 돌’로 능력을 키울까 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놓기까지 했다.
황태자를 죽이고 십여 년,
‘바람을 다스리는 자’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안심하는 모양이다만, 팔커의 근거지에서 흔적이 나왔다.
모리츠가 비싼 값을 치르고 마법 통신구를 샀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호레스 밀란이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탐색하려고….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조나스 악셀을 보낸 거지.
모리츠는 낄낄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렇게 계속 몰라라.
모르면서 잘난 척만 죽도록 하다가 뒤통수 맞고 죽어버려라.
팔커의 근거지에 그렇게 많은 놈들이 있었는데, 그 능력을 쓴 자를 기억하는 놈이 한 놈도 없다.
기억을 정말 못 하는 건지.
매수를 당한 건지.
아니면 그 힘이 뭔지도 모르는 천하 무식한 놈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제 모리츠는 팔커의 근거지에 있었던 놈들을 하나씩 족칠 생각이었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쥐고 호레스 밀란까지 굴복시켜야지.
모리츠 디아머드는 포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니까.
* * *
황제의 북부 행궁.
조나스는 축 늘어져 무료한 얼굴로 빈둥거리고 있었다.
산샤에게 보여주던 해맑은 미소도 아드리안을 못 만나게 했을 때 터졌던 분노한 얼굴도 조나스의 진짜 얼굴은 아니었다.
세상에 재미를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무료한 표정, 그게 조나스의 얼굴이었다.
“아드리안이라고 해서 달려왔는데, 뭐…. 만나주지도 않고.”
혀를 차려다 말았다.
혀를 차는 것도 짜증 내는 것도 귀찮아.
만사가 귀찮아.
그러다가 잠깐 산샤를 생각하면 미소가 번져 나왔다.
자신을 막겠다고 팔 벌리고 서서 따박따박 말대답하던 게 얼마나 귀엽던지.
어떻게 반응하나 궁금해서 귀찮아도 꾹 참고 화를 내봤더니, 겁먹었어.
겁먹어 놓고 안 그런 척하는 것도 귀여웠다.
자신의 삶에서, 귀찮은 걸 참고 뭔가 하게 만든 두 번째 사람이었다.
첫 번째는 아드리안이었다.
아드리안은 처음 본 그 순간부터 형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끝내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건, 그러려니 했다.
말만 아버지일 뿐 아버지였던 적이 없는 분이었고, 원래 황제는 갑자기 시해당하고 그러는 거니까.
역사책에도 다 나와 있다. 그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드리안이 죽었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드리안은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거든.
아드리안은 애초에 쉽게 죽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자신은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그런데 아드리안이 죽었다며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자 정말 드물게 화가 났었다.
그렇게 원했는데 형이라고 불러보지도 못했잖아.
“어…?”
멍하던 조나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까!
“형이라고 불러봤으니까, 이젠 죽어도 되는 거야?”
풉…, 푸…, 하하하….
조나스는 갑자기 빵 터진 웃음을 참지 않고, 마음껏 웃어댔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까지 찔끔 났다.
웃음 끝에 조나스는 중얼거렸다.
“산샤 디아머드, 진짜 귀여웠지.”
“그만 좀 하십시오.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조나스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은 마르틴 바이다였다.
같은 방에 있을 뿐 멀찌감치 떨어져 각자 생각에 잠겨 있다고 봐야겠지만….
“아드리안은 연락 없어?”
“없습니다.”
“대체 언제쯤 나를 만날 준비가 된다는 거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 지루해….”
조나스는 다시 늘어졌고, 조나스를 요모조모 뜯어보던 마르틴이 쯧쯧 혀를 찼다.
“뭔데?”
“폐하는 참…. 뭔가 한 가지가 미진하단 말입니다. 아드리안과 닮았는데도 비어 있어. 그래서 안타깝게도 그만큼 아름답지가 않아요.”
“흥…. 황제에게 혀를 차? 혀를 잘라버린다?”
“그러시든가요.”
위협하는 조나스나 당하는 마르틴이나 심드렁했고, 조나스는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아드리안이 확실히 아드리안은 맞아?”
“예? 무슨 말씀이신지….”
“어릴 때 봤던 황태자처럼 안 생겼어. 황태자는 머리색이 분명히 검정이었던 것 같거든. 근데 지금은 백금발이잖아.”
“아…. 그래요?”
“머리색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어?”
“바람을 다스리는 자의 특성이 그렇다던데요?”
조나스가 뭔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마르틴을 돌아봤다.
“바람을 다스리잖아요. 공기 중의 뭔가를 건드려서 자신을 감싸는 막을 만들어 낼 수 있대요. 그래서 머리색이니 뭐니…, 본인이 원하는 대로 보게 한다네요.”
흐음, 조나스가 말없이 가만히 마르틴을 쳐다보더니 콧방귀를 꼈다.
“아무 말이나 지어서 막 한 거지?”
마르틴은 대답 없이 그저 헤실헤실 웃기만 했고, 조나스는 더욱 길게 늘어지며 중얼거렸다.
“십 년 동안 기다려왔는데, 이젠 하루도 더 못 기다리겠어.”
마르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폐하가 황기사 단장인 걸 알면 아드리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저도 빨리 보고 싶은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