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조나스 악셀 폐하!”
산샤가 근엄하게 조나스를 불렀다.
문틀에 나른하게 기대 있던 조나스가 자세를 바로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산샤는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말했다.
“폐하가 제국의 황제인 건 사실이나, 이곳은 디아머드 백작가이고 백작가만의 규칙이 있는 곳입니다.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어째서 이런 무례를 범하십니까?”
조나스가 배꼽 위에 단정히 손을 모아 쥔 채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산샤, 어디로 뭐 하러 가는지 뻔히 아는데 앉아 있기만 하는 건 너무 바보 같잖아.”
“그렇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기를….”
“에이, 이렇게 와 버렸는데….”
조나스는 손사래를 치며 산샤의 말을 막더니, 아예 방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비켜 봐. 우리 형제가 10년 만에 만난단 말이야. 우리의 상봉을 이런 식으로 방해해야겠어?”
산샤는 그대로 두 팔을 벌리고 막아섰다.
“상봉하지 마세요. 제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레이디 산샤. 뭐 하는 짓이야? 내가 아무리 명색뿐이라지만, 황제야.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나한테 이런 짓을 하고 온전할 거 같아?”
“온전하지 못하게 해보시든가요. 그러든지 말든지 당장은 아드리안을 만날 수 없습니다.”
조나스가 한순간에 인상을 구기고 산샤를 무섭게 노려봤다.
내내 해맑게 웃었던 게 다 거짓이었나 싶을 정도로 변화는 갑작스러웠다.
무서웠지만, 그래서 더 비켜줄 수 없었다.
산샤도 똑같이 무섭게 노려봤고, 조나스는 또 갑자기 해죽 웃었다.
다시 맑고도 맑은 표정이 되어 버린 걸 보자, 산샤는 무섭다 못해 소름이 끼쳤다.
이 황제가 확실히 미쳤어.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아드리안에게 해를 끼치려고 온 거야.
조나스가 말했다.
“형도 나를 만나고 싶을걸. 나한테 할 이야기가 많은 거란 말이야.”
“그건 아드리안의 의견을 따로 듣고 전달해드리겠습니다.”
“흐응…. 굳이 왜 그런 수고를 해? 지금 바로 들으면 되는걸.”
조나스가 불쑥 산샤의 어깨너머로 소리쳤다.
“이봐 형, 레이디 등 뒤에 숨어 있어도 괜찮겠어? 창피하지 않아?”
“아드리안!”
산샤는 더 큰 소리로 아드리안을 불렀다. 둘이 절대 말을 섞지 못하게 해야 하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당신이 여기에서 대답해주면, 지금까지 막은 내가 뭐가 되겠어.”
“풉.”
풉?
산샤와 조나스는 마주 본 채로 잠시 멈춤 상태가 되었다.
산샤는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아드리안을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빵 터지려는 웃음을 참는 소리 같았다.
웃음이 나와?
나는 자기를 지키려고 이러고 있는데!
참자 참아. 참을 수 있다.
산샤는 화나는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심호흡을 했다.
아드리안에게 화나는 마음까지 담아서 조나스를 노려봤다.
“레이디 그렇게 보니까 무서운데?”
그래?
그렇다면….
산샤는 부릅뜬 눈에 더 힘을 줬다.
조나스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조금은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좋아, 오늘은 내가 너무 급하게 온 건 인정해. 그러니 돌아가서…. 얌전히, 아드리안을 만나게 해주리라 믿고 기다리고 있을게. 그럼 용서해줄 거지?”
그러더니 방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푸…. 하하하….
아드리안은 참지 않고 마음껏 웃어댔다.
이 형제들 뭐야.
둘 다 정상이 아닌가 봐.
산샤는 기운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제 어쩐다?
조나스를 어떻게 막아?
아드리안은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 * *
“산샤 디아머드, 얄미운 계집애.”
닐스 미켈은 거울을 보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전엔 거울만 보면 아름다운 자신의 얼굴에 취할 수 있었는데, 이젠 거울만 보면 산샤 디아머드가 생각난다.
콧등에 든 멍이 빠질 줄을 몰라.
그 악독한 계집이 얼마나 세게 때렸으면….
콧등을 살짝 만져보며 닐스는 앓는 소리를 냈다.
“잘생긴 코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닐스 미켈은 결심했다.
이렇게 된 이상, 산샤 디아머드와 결혼하는 수밖에 없다.
내 얼굴에 상처를 낸 여자는 너뿐이야.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짓을 해서든 결혼하고야 말겠다.
닐스는 의지를 다지며 챙이 넓은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아, 씨, 진짜, 산샤 디아머드 이 못된 것….”
멍이 빠지질 않으니 콧등까지 가려지는 챙이 넓은 모자만 써야 하는 것도 짜증 난다. 패션을 누릴 수가 없잖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외모를 가다듬고 닐스는 선반에 올려둔 금화 주머니 하나를 챙겼다.
선반을 그득하니 채우고 있던 금화 주머니가 이젠 몇 개 남지 않았다.
돈이야 원래 자신의 손에 들어오면 언제 들어왔나 싶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었지만, 이번만은 누구에게 들어가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클라이드 최고 인기 스타 콘스탄틴과 산샤의 하녀 아니타였다.
콘스탄틴은 분명히 자신의 흘러넘치는 매력에 사로잡힌 것 같은데도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뺀단 말이지.
자신은 돈에 팔리는 여자가 아니라면서, 금화 주머니를 안겨주면 슬퍼하기까지 하는데….
그렇지만 금화 주머니를 받는 딱 그 순간에는 조금씩 내주는 게 있으니까, 미안해하면서도 돈을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니타.
아니타는 사나흘에 한 번 시장에 나온다면서 연락을 해왔다.
그러면 닐스는 금화 주머니를 들고 시장 어귀에서 기다렸다가 근처 공원 벤치에 가서 산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타야말로 돈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금화 주머니만 안겨주면 엄청나게 고마워해서 주는 보람이 있고, 산샤에 대해서 별별 소리를 다 해주지 뭔가.
안 물어본 것도 더 말해 준다.
산샤에 대한 정보는 쌓여가는데, 써먹을 기회가 안 생긴다는 게 문제.
모리츠가 대연회 열겠다는 소리를 안 한다.
집안의 어른이니 자신의 결정대로 대연회가 열릴 거라더니, 거짓말이었나.
하기는….
집안의 어른이니 자신의 결정대로 반려가 정해질 거라더니, 거짓말이었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세상엔 믿을 놈이 하나도 없고,
아니타가 ‘사실은 모리츠 자작이 산샤를 결혼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던데….
그건 아니겠지?
모리츠 자작이 자신을 배신할 리가 없다. 배신하면 이쪽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고.
이래저래 선반 위의 금화 주머니는 줄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만 대연회 좀 열어주지, 모리츠 자작.
* * *
아니타는 언제나처럼 닐스 미켈을 만나기 위해 시장 어귀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참, 저 양반도…. 한결같네.”
아니타는 공원 입구에 들어서는 닐스를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닐스는 발견하지 못하려야 못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차려입은 스타일이 화려함의 극치인 것은 모르는 척하더라도, 저 챙 넓은 모자는 어쩔 거야.
저렇게 몇백 미터 앞에서도 눈에 뜨이는 모자를 쓰고 얼마나 숨는 척하는지.
그래서 더 확연히 보인다는 것은 모르는 거겠지?
아니다. 알고도 저럴 수도 있다.
그저 관심받고 눈에 띄고 싶어서.
닐스는 아니타와 등 돌린 벤치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어디에서 본 것은 있는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란히 앉지는 않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닐스는 품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 건네줬다.
아니타는 눈먼 돈을 얼른 챙겨 품에 넣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황제 폐하가 디아머드 성에 오셨습니다.”
닐스는 잘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하긴 짐작도 못 하고 있던 말을 누가 하면, 제대로 귀에 안 들어오기 마련이지.
“황제 폐하요. 조나스 악셀 라인하르드 폐하.”
“…아니, 뜬금없이 황제 폐하가 왜?”
“그건 황제 폐하한테 물어보셔야죠. 제가 어떻게 압니까. 어쨌든!”
아니타가 가까이 오라고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처음에 그렇게 했을 때 닐스는 불처럼 화를 냈었다.
감히 하녀 주제에 누구에게 손가락으로 지시하냐고 노발대발.
그럴수록 아니타는 더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하녀면 뭐?
누가 뭐래도 정보를 갖고 있는 건 이쪽이다.
나도 아가씨가 하라니 하는 거지, 첩자 짓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고.
이번에도 역시 뜨악하게 쳐다보는 게, 기분 나쁘다 이건데.
기분 나쁘면 대수냐? 듣기 싫으면 말든가.
닐스가 이를 앙다물더니, 부르는 대로 가까이 머리를 마주했다.
아니타는 목소리를 잔뜩 낮춰 속삭였다.
“황후로 만드실 거랍니다.”
“……?”
“원래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아가씨가 스무 살이 되면 황후가 될 거라고 그러셨답니다.”
“누가?”
“호레스 밀란 대공이요.”
닐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호레스 밀란 대공이 산샤를 황후로 점찍어 놨으면, 뭐, …링 위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KO패라고?”
“그게 뭔 소리이십니까?”
“네가 알아 뭐 하겠니, 하녀 주제에. 에잇.”
닐스는 그길로 모리츠에게 달려갔고, 아니타는 산샤에게 달려가 그대로 다 보고 했다.
그러자 산샤는 집사 벤야민을 불렀다.
“벤야민, 모리츠 저택의 집사를 잘 알지? 같은 소개소를 통해서 모리츠를 만난 걸로 아는데?”
“프리스 말씀하시는 겁니까? 안 그래도 프리스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주님이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모리츠 하우스 갔을 때 잘해줬거든.”
“예, 들었습니다. 가주님께 칭찬받았다면서…. 그런 칭찬은 처음 들어 봤답니다. 칭찬받으면서 일하고 싶다고 하더만요.”
“…그럼 내가 프리스에게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
벤야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뭐라도 다 말씀드리고 싶어 할 겁니다.”
그렇게 하여 산샤는,
아니타를 만나고 달려온 닐스가 몇 시간이나 징징거리다 갔고, 그 후에 바로 모리츠는 마법 통신구를 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벤야민이 보고를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해했다.
“그런데 자작님이 마법 통신구는 왜 사셨을까요? 그렇게 급하게 연락해야 할 사람이 누굴까?”
그도 그럴 것이 마법 통신구의 가격은 어마어마하니까.
이동마법 스크롤이 비싸다고 했지만, 거기에 댈 데가 아니었다.
모리츠에게도 만만치 않은 돈이라 집 몇 채를 담보 잡혔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호레스 밀란 대공이 나를 황후로 점찍었다는 말을 듣고 마법 통신구를 샀으니까….”
산샤는 한참 이리저리 궁리해보다가 말했다
“호레스 밀란을 이길 수 있는 사람?”
벤야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사람은 제국에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한 명 있잖아.”
“누구요?”
“호레스 밀란 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