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조나스 악셀 라인하르드, 이 나라의 황제요.”
산샤가 재차 물어도 아니타는 똑같이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어떻게 그래? 황제가 혼자 왔단 말이야? 수행원도 없이?”
“그게요. 저번에 그 양반처럼…. 닐스 미켈 남작이요. …갑자기 짠! 나타나셨어요. 혼자.”
산샤는 아드리안을 돌아봤다.
아드리안에게 화가 나 말도 하지 말고 쳐다도 보지 말아야 하는 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시선을 교환하고 이 경악스러운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의논해 볼 상대라고는 아드리안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드리안의 표정을 보고는 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핏기라고는 없었다.
“아드리안, 어디 아파? 괜찮아요?”
아드리안이 괜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산샤는 빠르게 아니타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니타, 아델라이드에 연락해서 루카한테 들어오라고 해. 아드리안 방을 준비하고….”
“예, 아가씨, 근데 황제는 어떻게 해요?”
“아, 황제….”
순간적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컨디션이 이렇게 나쁜 데 황제가 대수냐.
그나저나 어쩐다.
산샤는 어쩔 수 없이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진짜 황제일까요?”
아드리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사칭은 사형이니까요.”
“황제가 맞다는 거네? 기막혀라…. 뜬금없이 왜 황제가….”
* * *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황제는 아니타 말대로 수행원도 없이 혼자였고, 옷차림도 아주 가벼웠다.
마치 이웃집에 마실 온 철부지 도련님 같다고나 할까.
산샤가 방에 들어오자, 잔뜩 들떠서 소리부터 질렀다.
“야아, 네가 산샤 디아머드구나.”
“황제를 뵙습니다.”
산샤는 먼저 인사를 챙겼다.
그러고는 빤히 올려다봤다.
스스로 황제라고 밝혔으나 덜컥 믿어버리기는 곤란한 사람이다.
황제라는 증거가 없잖아.
어떻게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그러자 황제가 씩 웃어 보였다.
“저게 진짜 황제가 맞나…. 생각하고 있지?”
“아니, 꼭 그렇지는….”
“황제 맞아. 벌써 황제 생활 10년 차. 너랑 나랑 동갑인 건 알고 있니?”
“…그러시군요.”
“이름은 조나스 악셀 라인하르드. 조나스라고 불러도 좋고, 조나스 악셀이라고 불러도 좋다.”
“예에.”
“나는 조나스 악셀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긴 하더라. 어감이 좋거든.”
“아….”
“불러 봐라.”
“예?”
“불러 보라고, ‘조나스 악셀’ 해 봐. 어서, 어서 해 봐.”
조나스가 의지를 북돋아 주듯이 손을 흔들어 격려를 했다.
천진난만하게 해달라는 데 모르는 척하기는 미안해서 산샤는 시키는 대로 불러 줬다.
“…조나스 악셀 폐하?”
“에이.”
조나스가 실망하며 팔을 휘둘렀다.
“폐하는 빼고 해야지. 조나스 악셀만 하라고….”
산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기고 조나스를 노려봤다.
황제한테 ‘폐하’를 안 붙이면 황제 모독죄에 해당하는 거 아냐?
뜬금없이 갑자기 나타나서 황제 모독죄를 뒤집어씌우겠다고?
아무리 그래도 황제라는데, 이렇게 노려보면 안 되겠다 싶어서 표정 관리를 하려는데,
조나스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걸 본 듯 활짝 웃어 보였다.
마치 산샤에게 큰 칭찬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보고 싶었다.”
밑도 끝도 없이 뭐죠?
무엇을 보고 싶었다는 거죠?
조나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산샤가 깜짝 놀라 물러서는데, 조나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창으로 달려가더니 바짝 붙어서서 외쳤다.
“야아, 북부의 장원이다!”
그러더니 홱 산샤를 돌아보더니 신이 나 죽겠다는 듯이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너를 보러 오려고 저만 한 장원 하나 딸린 저택을 날렸다.”
날린 게 좋은 걸까.
온 게 좋은 걸까.
종잡을 수 없는 황제의 대화에 혼이 쏙 빠져나갈 것 같으면서도 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도 마정석 100폰드 들여서 이동마법 스크롤로 한 번에 왔나 보다.
이 사람이야 얼마든지 그래도 되는 사람이겠지.
라인하르드 제국에서 산샤보다 부자는 황제밖에 없다고 아니타도 그랬으니까.
자기 돈을 낭비하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나.
조나스가 바로 또 정원 쪽으로 돌아서더니 투덜거렸다.
“에이, 북부 정원도 뭐 별 게 없네. …나는 북부는 사시사철 눈이 오고 순록이 달려 다닐 줄 알았다.”
“지금은 여름입니다만….”
“그래, 그러니까….”
뭐가, ‘그러니까’인가.
도무지 조나스의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대면한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온몸의 기운을 다 빨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 돌아가십니까?”
산샤의 질문에 조나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막 왔다. 마정석 100폰드 들여서.”
오는 데 그만큼 들였으면 그만큼 들여서 갈 수도 있을 텐데….
“그럼 어디에서 묵으시는지?”
“너를 보러 왔다. 어디에서 묵겠니?”
산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이 건물 3층에 아드리안이 있다. 당신의 의붓형이자 라인하르드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할 사람이.
그런데 당신도 여기 묵겠다고?
산샤가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눈만 깜빡거렸고.
물끄러미 지켜보던 조나스가 다시 까르르 소리 내서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행궁을 준비시키고 왔으니….”
산샤는 조심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나스가 털썩 소파에 앉아 다시 산샤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나는 네 얼굴이 보고 싶었다.”
“예?”
“예쁘니까 좋으네.”
조나스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미친 황제인가?
평범해 보이지는 않더라만….
호레스 밀란 대공이 허수아비로 세워 놓은 황제라더니, 압박이 심해서 정신이 살짝 현실 세계를 벗어나 버렸나?
“황제 폐하가 백작가의 레이디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째서? 예쁘니까 예쁘다고 한 건데?”
조나스는 산샤의 반응은 상관없다는 듯이 제 말만 계속했다.
“항상 네가 예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너를 황후 삼겠다고 했었거든.”
“예?”
듣던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뭘 삼아?
누가, 누구를?
산샤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려 멍하니 조나스를 바라봤다.
조나스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산샤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산샤는 순간적으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반려는 이미 있다고, 아드리안이라고 말해도 될까?
아드리안을 좀 보자고 하면 어쩌지? 의붓형인데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아드리안이 위험해지잖아.
안 되겠네, 그건.
뜻은 감사하나 넣어두시라고 해도 될까?
누구 마음대로 황후로 삼는단 말이냐. 정신 차려라. 꼭 해야겠으면 구혼자들 사이에 줄을 서든가.
…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
“피이이….”
조나스가 입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눈에 보이게 싫어하잖아. 내가 아무리 그래도 황제인데…. 너무 막 대하는 거 아니니?”
“송구합니다.”
산샤는 바짝 고개를 숙이며 얼른 사과했다.
어떻게든 황후 삼겠다는 소리만 철회해주면 딱 좋겠으니까.
“뭐, 됐다.”
조나스가 손을 휘 내젓더니 말했다.
“아드리안 좀, 만나 봐야겠다.”
“……?”
뭐라고?
“아드리안을 불러 줘. 만나야겠으니까.”
진짜 뭐라는 거야?
차라리 황후 삼겠다는 소리를 해라.
산샤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 안은 바짝바짝 타고 등줄기는 차가운데 온몸의 관절은 마디마디 다 풀려버렸다.
이번엔 진짜 기절할 것 같다.
그러나 조나스는 여전히 해맑게 말했다.
“내가 여기 온 건 너랑 아드리안을 만나고 싶어서야. 넌 봤으니까 이젠 아드리안을 봐야지.”
* * *
아드리안은 침대에 반듯이 누워 목 밑까지 얌전히 이불을 덮고 있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산샤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안색이 심상치 않다면서 얌전히 누워 있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다고,
기어이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주고 조나스를 만나러 갔다.
아드리안은 산샤가 해준 그대로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조나스 악셀 라인하르드.
황궁에서 조나스는 언제나 건물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자신을 바라보던 아이였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며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었지.
조나스는 자신을 부를 때는 언제나 ‘황태자 전하’라고 했었다. 한 번도 ‘형’이라고 한 적은 없었다.
조나스는 자신의 어머니를 부를 때도 ‘황비 전하’라고 했다.
어느 날 아드리안이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는 왜 너의 어머니를 황비 전하라고 하는 거냐?”
그랬더니 조나스가 대답했다.
“그분이 그걸 원하십니다.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다고 황비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드리안은 그때 생각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아이구나.
원망과 눈물뿐이지만 나를 아들이라고 생각해주는 분이 나에게는 있는데,
이 아이는 그마저도 없구나.
그 뒤로는 조나스를 피해 다녔던 것 같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조나스를 바로 보기가 힘들었으니까.
그럴수록 조나스는 모퉁이에 숨어서 자신을 훔쳐보는 때가 많아졌다.
아드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나스가 왔으니 안 만날 수는 없을 테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을 썼으니, 호레스 밀란에게 노출될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나스를 보내다니….
조나스가 독단적으로 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알기로 조나스는 호레스 밀란의 허수아비 황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조카를 등에 업고 제국을 차지한 자가 조카에게 무엇을 시키려는 걸까.
의붓 형제간의 살육이라도 일으키려는 건지도 모른다.
호레스 밀란에게는 조나스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싸우다가 둘 다 죽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을 테니.
상념에 젖어 한숨만 쉬고 있는데, 갑자기 벌컥 방문이 열렸다.
창문이 아닌 방문으로 산샤가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드리안, 일어나! …일어나, 얼른.”
산샤는 뛰어 들어오면서 외쳤고 어느새 아드리안을 일으켜 세웠다.
아드리안은 어리둥절해서 보고만 있었는데, 산샤는 벌써 짐까지 몇 개 싸고 있었다.
“산샤?”
“일어나, 뭐 해. 얼른 아델라이드로 가자니까.”
“왜 이러는 건지 말을 해야지. 진정해.”
“진정할 수가 없어.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야아, 이런 방이 있었네?”
갑자기 끼어든 소리에 산샤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아드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를 낸 사람을 바라봤다.
문틀에 기대서 있던 조나스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