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산샤가 팔커를 끌어 들어가고 육중한 철문이 닫히자,
모두 어디에 있었는지 어마어마한 숫자의 경비들이 철문 앞으로 달려왔다.
문을 열어.
아니야, 아직은 열리지 않아.
열쇠를 가져와라.
열쇠는 없어. 시간이 지나면 열리는 문이야.
자기네들까지 소리를 지르고 우왕좌왕하는데, 누군가가 말했다.
“레이디가 미친 거야? 대체 귀신방에는 왜 들어갔어?”
“살아 있는 건 무조건 난도질하는 방인데, …그래도 팔커 님이 들어가셨으니까 죽지는 않고 있겠지?”
“레이디가 미쳐 날뛰는 모양새가 팔커 님 말을 잘 들을까 모르겠네.”
아드리안은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안의 무엇인가가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난도질한다는데 어떻게 손 놓고 있겠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야만 했다.
자신에게 없는 것처럼 살았던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을 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을 쓰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호레스 밀란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고, 방어할 준비도 못 하고 바로 공격당하겠지.
그러면 필패, 살아날 수 없을 거다.
그러나….
그 전에 산샤는 구할 수 있다.
휘이잉.
때아닌 돌풍이 불었다.
실내에 있는 것들이 날리고 뭉쳐 바람의 형체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기둥 크기가 된 소용돌이가 휘돌았다.
팔커의 경비들은 혼란에 빠져 허둥대는데,
그들 중에 오직 아드리안만 바람에 머리카락 하나 날리지 않은 채 우뚝 서 있었다.
아드리안이 손가락을 튕기자 바람을 비명을 지르며 철문으로 내달렸다.
쿵, 쿵.
쿵, 쿵, 쿵.
육중한 철문이 느슨해지고 갈라질 때까지 때리고 또 때렸다.
마침내.
꽈당!
문이 넘어갔다.
아드리안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문을 밟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거기 산샤가 있었다.
산샤는 칼을 높이 치켜들고 무지갯빛 영롱한 빛 속에 서 있었다.
“산샤!”
아드리안이 이름을 부르자, 산샤가 힘껏 달려와 품에 안겼다.
“아드리안!”
산샤가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하아….”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그제야 내내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도하는 아드리안의 양 볼을 잡고 산샤는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왔으니까 상을 줄까?”
그러고는 쪽.
입을 맞췄다.
순간 숨이 다시 멈춰 버렸다.
아드리안은 그대로 눈도 깜빡하지 못하고 산샤를 바라보았다.
깜빡깜빡 아드리안의 시선을 그대로 다 받아내던 산샤는 어쩔 수 없이 살짝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보고만 있어. 부끄럽잖아.”
툭.
산샤의 수줍은 미소가 아드리안의 마음을 건드렸다.
아드리안을 꽁꽁 얽어매고 있던 굴레가 한순간에 바사삭 부서져 버렸다.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드리안은 산샤에게 뜨겁게 키스했다.
어릴 때의 귀여운 입맞춤이 아닌 어른이 된 아드리안과 산샤의 첫 키스였다.
아드리안은 그동안 못다 쉰 숨까지 한꺼번에 뱉어내고, 산샤를 꼭 끌어안았다.
산샤가 아드리안의 품에 파고들며 속삭였다.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 좋아.”
* * *
그렇게 뜨거운 키스를 하였는데,
수만 년을 기다린 것처럼
다시는 하지 못할 것처럼
서로에게 매달렸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상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별일 없이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이 가자, 그날의 일이 꿈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산샤와 아드리안은 단둘이서 팔커의 경매장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리는 능력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드리안은 클라이드의 수호자로서 진면목을 보여줬다.
산샤는 글라키우리를 유감없이 사용했다.
노예를 풀어주기 위한 열쇠도 필요 없었다. 글라키우리 하나면 되었다.
쇠사슬을 가루로 만들면서 산샤와 아드리안은 숨을 섞고 미소를 나누었다.
그날은 완벽했다.
둘만의 설렘으로도 완벽했고, 경매장 정리도 완벽하게 해냈다.
뒤늦게 도착한 기사단도 산샤를 향해 존경한다며, 완전히 충성을 맹세할 정도가 되어 버렸으니까.
한스가 말했다.
“가주님, 정말 훌륭하십니다. 이렇게 대단하신 분인지 미처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뭘…. 그 정도는 아니지.”
“아니…. 저는 자크와 얀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사람들이 달라졌어요.”
“어떻게 달라졌는데?”
“얀이 발악을 안 합니다. 사람이 얌전해졌어요. 밧줄로 안 묶어놔도 괜찮더라고요.”
“그래?”
“예, 원래 생각이라는 걸 안 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뭘 그렇게 끙끙거리면서 생각을 하는지….”
어쩌면 얀에게서 곧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산샤는 흡족한 마음에 피식 웃었다.
“자크는?”
“자크는 사라져 버렸어요.”
“뭐?”
“연무장에 나오지 않는다고요. 검술 연습을 안 해요.”
“…잘된 건가?”
“당연하죠. 사람이라는 게 안 되는 건 포기할 줄도 알고 그래야 하잖습니까. 자크에겐 아주 잘 된 일이죠.”
“아…. 그렇군.”
“소문에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다던데, 곧 수도사 하나가 탄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크 정도면 아주 믿음직한 수도사가 되겠지요.”
산샤는 이번에도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다 좋아지고 있구나.
그랬었는데….
순식간에 일상의 반복이란 말이지.
아드리안은 어찌나 깍듯한지 사람이 낯설어 보였다.
아드리안의 태도에 맞추지 않을 수가 없어서, 산샤도 예의를 차리게 되었고.
둘의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게다가 아드리안은 변함없이 악덕 선생이기도 했다.
“또 천 번?”
산샤는 경악하며 돌아봤다.
“도대체 왜 그렇게 천 번을 좋아해요? 천 번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아드리안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억하심정이라니요. 검술을 배울 때 천 번은 기본이지.”
“당신 잊어버린 거 같은데, 내가 글라키우리를 휘두른 사람이라니까.”
“그건 레이디의 능력이 아니라 글라키우리가 맞춰준 거잖아. 검을 쓸 수 있어야죠. 글라키우리만 휘두를 게 아니라.”
“아…. 진짜! 알았어요, 알았어.”
산샤는 씩씩대며 옆으로 베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목검이 왜 이리 무거운가.
휙휙 가볍게 휘두르던 검이 점점 천근만근으로 무겁게 느껴져 정확하게 베는 자세가 안 나온다.
아드리안이 매의 눈으로 보고 있다가 한 소리 했다.
“봐요. 얼마나 어설픈지. 이 정도 가지고 다 할 수 있다고 하면 안 되잖아. 글라키우리가 없어도 자신의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죠.”
산샤는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원점도 아니다.
키스 전의 아드리안은 이렇지 않았다.
다정했고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산샤를 위해 달려왔다.
그런데 키스 후의 아드리안은 예민하고 결과를 보는 것에 조급했다. 웬만한 일로는 와주지도 않았다.
매번 모든 상황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해내야만 한다고 닦달했다.
산샤는 성의 없이 아무렇게나 검을 휘두르며 종알거렸다.
“차라리 검술을 배우지 않는 게 좋겠어요. 어차피 당신이 옆에서 계속 지켜줄 건데 뭐 하러 이 힘든 걸 하고 있어?”
“안 돼요.”
“왜 안 돼? 당신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리는 능력이 없어서?”
“내가 곧 없을 테니까.”
산샤의 검이 공중에서 멈췄다.
산샤는 그대로 고개만 돌려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아드리안의 표정이 너무나 무심하고 평온하여 잘못 들은 말인가 싶었다.
고개를 기울여가며 유심히 들여다봤는데도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역시 잘못 들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드리안이 말했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요. 나는 곧 떠날 거예요.”
“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산샤는 아드리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리 ‘꿈이었을지도 몰라’ 생각하게 되었다지만 그렇게 키스를 해놓고선 가긴 어딜 가?
전엔 어디 간다고는 안 하더니, 키스하고선 떠난다고?
설명 한마디 없이 그냥 막?
“설명을 들어야겠는데요?”
“검이나 내려요.”
산샤는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검을 슬쩍 올려다보곤, 쓱 내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팔 아픈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내렸어요. 이젠 말해 봐요.”
“설명은 할 수 없어요.”
“예?”
어안이 벙벙하다는 게 이런 상태인가.
분명히 화가 날 만한 상황인데 화도 나지 않았다.
산샤는 그저 눈을 깜빡거리며 아드리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드리안은 슬쩍 몸을 틀어 검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이만 접을까요? 아무래도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 같은데….”
그래도 산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드리안도 더 말하기는 포기해 버린 것 같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산샤는 아드리안을 뚫어져라 보고, 아드리안은 슬쩍 외면한 채로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산샤는 아드리안과의 키스를 생각했다.
키스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아드리안을 전과 다르게 만든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키스밖에 없는데….
아드리안도 그 순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산샤가 품에 파고들며, 다시 만나게 되어서 좋다고 속삭였었지.
둘만의 지난날을 다 기억하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그동안 외로웠던 시간을 다 보상받은 것 같았다.
산샤 곁을 떠나게 된다 해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둘이서 같은 순간을 생각하며 다른 결론을 내리는 동안 세상은 적막해져 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기, 아가씨…. 아드리안 경.”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가 둘 사이의 침묵을 깼다.
아니타가 심상치 않은 둘의 눈치를 살피며 한쪽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니타? 검술 수업받을 때는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건 그런데요.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그래서 뭐 어쨌든…. 기다리시라고 했거든요. 그랬는데 손님이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요.”
“무슨 소리를 하는데?”
“자기가 황제래요. 이 나라 황제, 조나스 악셀 라인하르드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