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하아….”
산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낄낄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를 들었는데 확인도 못 해보고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귀신방에 막 들어섰던 그 자리에 그대로 철푸덕 주저앉은 채로 팔커에게 붙잡혀 있었다.
팔커는 한 발이라도 움직였다가는 죽는다며, 자신의 경비들이 문을 열 때까지 꼼짝하지 말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발 저려서 꼼지락거리는 것도 기겁하며 막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름먹인 나무에 불을 붙일 수 있어서 아주 깜깜한 상태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생각의 끈을 늦추게 하는 향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워서 몸이 축축 늘어지고 까무룩 잠이 들 것 같은 건 아주 나빴다.
아무리 그렇다고 이런 데서 자고 있을 수는 없잖아.
산샤는 녹아서 땅으로 스며들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추스르며 물었다.
“당신 경비들은 왜 아직도 문을 안 열어? 주인이 갇혔는데 이렇게 굼떠도 되는 거야?”
흐물흐물 눈이 절반은 감긴 팔커가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문이 한 번 닫히면 열리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아무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장치를 좀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 시간이 얼마나? 몇 날 며칠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해?”
“며칠씩이나요? 아닙니다, 절대 아니지요.”
팔커가 손을 내저었다.
언제 늘어졌나 싶게, 며칠씩 있어야 한다면 먼저 땅이라도 뚫고 나갈 기세였다.
“문 닫힌 지 아직 얼마 안 됐습니다. 한 5분 지났나?”
“거짓말…. 다섯 시간은 지난 거 같은데….”
“그건 레이디 마음이 조급하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거죠. 조급할 건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문은 열립니다. 대신 꼼짝도 하면 안 됩니다. 움직이지 마세요.”
“대체 이 방에 뭐가 있다고 이렇게까지 호들갑이야?”
팔커가 고개를 휘휘 돌리기는 두려운지 눈동자만 조심조심 굴려 둘러보며 속삭였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뭐가 있는지 모른다고요.”
“뭐야, 그게. …그럼 무서워할 것도 없는 거잖아.”
“그건 아니지요. 까딱하다가는 죽어 나간다니까요.”
팔커가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 팔커는 수도에서 최상의 노예 공급과 은밀한 환락 파티로 잘나가던 사람이었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팔커의 노예를 사고 싶어 했고, 은밀한 환락 파티에 참석하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모리츠를 만났다.
모리츠는 자신이 디아머드의 주인이라며 동업하지 않겠냐고 했다.
팔커는 모리츠의 제안이 기꺼웠다.
디아머드 물건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간혹 유괴되어 노예가 된 것들이 얼마나 비싸게 거래되는지 익히 봐왔으니까.
사업가적인 야망을 품고 디아머드에 진출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장벽이 너무 높았던 게 문제였다.
첫 번째가 노예금지령.
노예 장사꾼이 공개적으로 나설 수 없는 청정 지역인 것이었다.
두 번째가 더 큰 장벽이긴 했는데, 디아머드 사람들이 먹고살 만하다는 것이었다.
납치, 유괴는 한계가 극명했다.
스스로를 노예로 내놔야 수요 공급이 맞는데, 그러기에 디아머드 사람들은 죄다 세상살이에 아쉬울 게 없었다.
그런데 모리츠는 자신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다만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로베르트 백작의 서명을 받아 놓으라고 했다.
언제나 정의로운 척하는 로베르트가 노예 거래를 허락했다는 증거를 남기는 게 오로지 목적하는 바라고 했다.
“무슨 그런…. 그런….”
크게 욕을 해주고 싶은데, 그럴듯한 욕이 생각나지 않아서 산샤는 주먹만 불끈 쥐고 휘둘렀다.
그러자 팔커는 또 얼른 주먹을 잡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움직이지 마시고요. …지금껏 사업을 해오면서 모리츠 자작 같은 사람이 처음이긴 합니다.
그 사람은 뭘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디아머드를 망치고 싶어서 사업을 하는 것 같더군요. 여하튼 그래서….”
로베르트 서명을 받기가 어려울 거라며, 모든 수완을 총동원하라는 조언도 들었는데.
“아시다시피 서명받기가 제일 쉬웠죠. 로베르트 백작은 지금도 자기가 무엇을 허가했는지 모르실 것 같긴 해요.”
산샤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그런 소리는 왜 하냐고 물어볼 뻔했다.
아버지의 명예가 더럽혀져도 괜찮냐고 협박하던 입으로 아버지가 무결하다는 말을 하다니.
괜한 소리를 해서 팔커의 자백을 막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침묵하고 있는데,
팔커가 먼저 말했다.
“이제 디아머드에서 이 장사는 더 하기 어렵다는 걸 압니다.”
“마정석 광산 때문에?”
“예. 먹고살 만해서 스스로를 노예로 내놓지 않으면 유지하기가 어렵거든요. 다 끝나는 마당에 정리하는 겸사겸사 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다고 모조리 자백이냐?
아무래도 팔커는 ‘생각을 늦추는 향’의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팔커의 자백은 계속되었다.
로베르트 백작은 비자금을 한 푼도 받아보지 못하고 사망했고, 모리츠가 옛 성을 내줬다.
인테리어 공사를 따로 해야 했는데,
“이 방이 가장 아름다운 방이었습니다. 벽에 뱅 둘러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그건 얼마나 사실적인지…. 이 방을 메인으로 하려고 했었죠.”
그런데 이 방에서 다 죽어 나갔다. 그중 한 명, 살아남은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뭔지 모르는 게 휙휙 날아다니고, 그리곤 다 죽었대요.”
“살아 나온 사람은 뭐야?”
“그놈은 구석에서 웅크리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기어 나왔다더군요. 그러니 아시겠죠? 왜 움직이지 말라고 하는지?”
“이렇게 어둡고 더운 건 왜 그래?”
“다 막았으니까요. 혹시라도 이 방에서 뭔지 모르는 그게 밖으로 나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방으로 통하는 건 작은 숨구멍까지 다 막았습니다.
덕분에 안전하게 장사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러니 차분하게 기다리십시오. 안 움직이면 살 수 있습니다.”
“안 움직이고 가만히 있자니까, 잠이 들 것 같아서 그렇지.”
“헛, 참, 레이디도….”
팔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엄청나게 강심장이시네요. 이 상황에 잠이 옵니까?”
“그러게 말이야. 이 상황에도 엄청나게 졸려.”
그렇게 말하고 산샤는 정말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대에단하다!”
머릿속에 바로 들어와서 박히는 소리.
잠이 든 산샤를 환영한 것은 글라키에스였다.
산샤는 지친 몸을 겨우 일으키고 글라키에스를 째려봤다.
“왜 또 왔어요? 당신 나왔던 꿈을 다 기억하면 안 오는 거 아니었나?”
“하는 짓이 하도 마뜩잖아서 왔다. 이런 데서 잠이 오냐?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어?”
“내가 잔 게 아니고, 잠이 그냥 온 거예요.”
훅, 다가온 글라키에스가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아…!”
글라키에스의 손이 놓인 자리에서부터 냉기가 돌기 시작해 온몸으로 퍼졌고, 덕분에 더위가 가시고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산샤가 눈을 감고 글라키에스의 냉기에 빠져들고 있는데,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어. 네가 여기 이러고 있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그걸 찾아.”
글라키에스가 매정하게 손을 거두며 말했다.
“일어나라고!”
조금 더 시원하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쉽지만, 산샤는 억지로 눈을 뜨려고 했다.
찾으라는 걸 찾아봐야 하니까.
그때 글라키에스가 말했다.
“잠깐, 하나만 묻자. 로베르트 서명이니 기타 등등 아드리안 때문인데 왜 걔 잘못이 아니라고 했니?”
“…원인이 무엇이었든 결정은 아버지가 했으니까요.”
“아드리안을 사랑해서 그렇게 말한 건 아니고?”
산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 봬도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이라거나, 사랑만이 답이겠냐는 등.
할 말이 많았는데, 저도 모르게 눈이 떠져 버렸다.
쿵쿵 울리는 소리가 닫힌 문에서 나고 있었다.
드디어 문을 열 모양이다.
시간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밖에서 문을 깨부술 작정인 것 같았다.
“저, 저러면 안 되는데…. 시간이 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팔커는 두 주먹을 꼭 쥐고 울리는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산샤는 쿵쿵 울릴 때마다 조금씩 더 밝아지는 반대쪽에 눈길이 갔다.
애초에 희미하게나마 방을 밝히고 있었던 게 안쪽에서 나는 정체 모를 빛이었다.
점점 더 밝아지는 게 무슨 이유일까.
산샤는 일어나 천천히 빛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 잡고 늘어지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팔커는 산샤가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보다는 문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으니까.
한 발 한 발 다가갈수록 빛은 점점 밝아지고 다채로워졌다.
처음엔 푸르스름했는데 초록빛이 끼어들더니 노란빛이 났고 붉은빛도 반짝였다.
“아…!”
산샤는 탄성을 내질렀다.
벽이 온통 글라키에스와 카이의 사랑을 담은 조각 부조로 덮여 있었다.
빛은 그중에서도 한가운데에서 나고 있었는데, 글라키에스가 카이에게 보검을 선물하는 장면이었다.
무지갯빛으로 찬란한 무엇인가가 산샤를 부르는 것 같았다.
산샤는 홀린 듯 다가가 빛을 잡았다.
순간 손을 지나 온몸으로 묵직한 기운이 퍼졌다.
두 손으로 빛을 잡아 천천히 당기자, 빛이 산샤의 손을 따라 길게 모양새를 이루며 나왔고,
마침내 검의 모양을 갖추었다.
“보검 글라키우리?”
산샤는 두 손으로 받쳐 들고도 믿을 수 없었다.
[글라키에스의 선택을 받은 자여. 글라키우리를 가진 자 얼음 땅을 갖게 되리니….]
글라키에스가 꿈마다 나타나 반복하던 예언이었다.
보검 글라키우리는 카이 백작이 죽으면서 함께 사라졌다고 했는데 여기 있었구나.
꿈에서는 글라키우리를 찾아 고난의 영웅이 되라고 했었지. 그래 봐야 결국 글라키에스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거였지만.
그러니까 이 검을 찾게 하려고 친히 또 꿈에 나타났던 거로군.
이렇게 어마어마한 것을 받아도 되는 걸까?
산샤는 검을 휘둘러봤다.
크기와 존재감에 비해 엄청나게 가벼워서 쉽게 움직일 수 있었다.
배운 거라고는 내려치기와 끊어치기밖에 없지만, 글라키우리를 휘둘렀더니 엄청난 검술의 달인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산샤는 검을 들어 이리저리 돌려가며 영롱한 빛을 바라봤다.
아름다웠고.
어쩌면 이렇게 가벼운지.
글라키우리가 산샤에게 맞춰 모양을 만들어 가는 것 같았다.
높이 치켜든 글라키우리에서 영롱한 무지갯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 콰쾅!
문이 무너져 내리고, 강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바람을 몰고 나타나 바람 속에 우뚝 선 것은 아드리안이었다.
“산샤!”
아드리안이 빛 속에 서 있는 산샤에게 달려왔고,
산샤는 글라키우리 따위 내던지고, 힘껏 아드리안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