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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53화 (53/97)

53화

팔커가 산샤 뒤를 따라 달려나가고, 사무실에 혼자 남은 아드리안은 천천히 일어섰다.

일어날 때는 ‘천천히’였으나 그림을 떼고 금고를 열어 계약서를 손에 넣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아드리안은 계약서를 품에 넣고 밖을 확인했다.

산샤가 시끄럽게 떠들면서 홀을 누비고, 팔커가 쩔쩔매며 따라다니는 게 보였다.

대단하다. 팔커처럼 노회한 장사꾼을 쥐락펴락하다니.

콘스탄틴만큼 연기를 할 수 있을지 걱정했었는데, 배우로 나서면 콘스탄틴을 능가하는 인기 스타가 될 것 같다.

산샤 말마따나 산샤는 믿고 일을 도모하기에 훌륭한 파트너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하다 해도 해야 할 일의 범위가 너무 크다.

둘이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호수 건너편에 그림자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

로베르트 백작의 서명을 입수했으니 나가서 그림자들을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

* * *

아드리안이 콘스탄틴과의 경쟁 심리를 자극하며 산샤에게 바란 것은 딱 하나였다.

팔커를 잡고 있어라.

그러면 자기가 금고를 열어 로베르트 백작의 서명이 있는 계약서를 손에 넣겠다.

“사무실에서 나가 팔커가 사무실을 돌아볼 수 없게만 만들어요.”

“얼마나 오래?”

“70걸음 정도?”

“…어떻게 70걸음에 금고를 털어요? 그게 가능해?”

“원상 복구까지 70걸음이에요. 만진 적도 없는 것처럼 만들어 놓기까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황태자에 클라이드의 수호자인 줄 알았더니, 금고털이였어.

“…혹시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걷는다거나 그런 능력은 없어요?”

아드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것뿐이겠어요? 레이디가 모르는 능력이 엄청나게 많이 있죠.”

그랬었는데….

나와 보니….

70걸음 걷기가 쉬운 일은 아니겠다.

어떻게 해야 자신에 집중시키고 사무실 쪽은 돌아보지 못하게 하지?

뭐라고 떠들어야 하는 거야?

산샤는 일단 소리쳤다.

“불을 켜! 너무 어둡다. 이래서야 뭘 자세히 볼 수나 있겠어?”

“레이디…. 제발 좀, 잠깐만….”

팔커가 안절부절못하며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도무지 말리지 못 했다. 막무가내인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어둡고 야릇한 실내에서 은밀한 파티를 즐기고 있던 손님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욕망이 원하는 대로,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그것이 이곳의 규칙이 아니었나?

그런데 저렇게 시끄럽게 떠드는데 주인이라는 팔커는 제대로 막지도 못해?

손님들은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 파티는 망한 것 같다. 더 즐길 수가 없겠어.

손님들이 떠나는 것을 보면서 팔커는 사색이 되고 있었다.

“나는 보고 싶은 게 많아. 여기 뒤엔 뭐가 있는 거야?”

산샤는 종횡무진.

여기저기 커튼이며 가리개를 마구 걷어내며 휘저었다.

급기야 팔커는 징징 울고 있었다.

“…거길 열면 안 되죠. 이러시면 안 되고요. 이러지 좀 마시라고요. 아니, 레이디….”

원하지도 않은 투자를 하겠다고 들쑤시고 다니는 진상 손님이라니….

팔커 입장에서는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겠다.

반면 산샤는 뿌듯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무대 체질인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콘스탄틴만큼 해낼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콘스탄틴도 이 정도까지는 못 해낼걸?

산샤는 자신에 역할에 취해서 외쳤다.

“나는 만족 못 했어! 아직 배가 고프단 말이야. 내놔! 다 내놓으라고.”

그러다가 마침내 산샤가 사람들을 감금해놓은 방으로 가는 입구를 발견해 버렸다.

“아하! 여기 있었군!”

물론 트리스가 오갈 때 봐 둔 거지만, 좀 더 극적인 효과를 노렸던 거지.

“그 문을 열지 마십시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팔커가 소리쳤다.

“감당할 수 없는 거, 뭐?”

산샤는 호기롭게 육중한 철문을 밀어서 열어 버렸다.

“어머? 설마, 설마, 사실은 물건에 자신이 없는 거야? 그래서 보여줄 수가 없었구나?”

팔커의 턱이 불끈불끈 움직이고 있었다.

이를 얼마나 세게 갈고 있으면 저렇게 되는 걸까?

연기를 너무 제대로 해버렸나 봐. 제대로 자극당한 모양이야.

쓸데없이 너무 자극한 게 아닌가, 뒤늦게 걱정이 되었다.

그만하자. 벌써 100걸음도 넘었겠다.

슬쩍 올려다보자 아드리안이 벌써 사무실에서 나와 있었다.

이제 다음 작전으로 넘어가겠구나.

작전명은 달달한 화해.

아드리안이 달려 나온다.

‘레이디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해. 당신이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좋아. 그렇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네? 다음에 또 오면 안 될까?’

‘오, 내 사랑. 나야말로 미안해. 내가 너무 막 나갔나 봐. 당신이 다 옳아요.’

그리고 팔커에게 말한다.

‘다음에는 꼭 제대로 사업 이야기를 해보자.’

그러고는 퇴장.

호수 건너편에 있는 그림자들을 데려와서 팔커의 근거지에 침투.

갇혀 있는 사람을 구출한다는 건데.

산샤는 다른 작전을 제안했었다.

아드리안이 그림자들을 데리러 가는 동안 자신은 남아서 활약한다.

감금 시설의 구조를 파악해 놓는다거나, 트리스와 힘을 합쳐 몇은 풀어 준다거나, 팔커를 기절시켜 묶어 놓는다, 같은 것들.

그러나 말을 끝까지 다 하지도 못했다. 더 말했다가는 아드리안에게 몇 대 맞을 것 같아서.

기사단도 동원하지 못한 디아머드 가주로서 좀 더 많은 활약을 하고 싶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는 수밖에.

산샤는 퇴장을 위한 연기를 시작했다.

“하아….”

너무나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한 번 쉬어주고,

“여기를 꼭 내 것으로 하고 싶었는데…. 갖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가질 수가 없다니…. 첫눈에 내 영혼은 끌렸는데….”

“그만하시죠, 레이디.”

팔커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제가 누군지 알고 이러시는 겁니까?”

머리털이 쭈뼛 섰다.

팔커, 나는 퇴장할 거야.

갑자기 새로운 국면을 펼치면 안 된다고.

“제가 사람 장사만 40년입니다. 눈썰미로 먹고 살아왔단 말입니다. …가면을 썼다고 사람을 몰라볼 것 같습니까?”

“흐음….”

난감한 마음이 가득 담긴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알아차렸다고?

언제부터? 사무실에서는 확실하게 몰랐잖아.

“무엇보다 레이디, 다른 사람인 척하려면 머리카락을 어떻게 해 보던가요. 이런 붉은색 머리가 흔하지 않단 말입니다.”

머리색으로 알아차린 거라면 아드리안은? 저 머리도 흔한 색은 아닌데….

아드리안은 곧 ‘레이디,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이라고 외칠 거리에 있었다.

손님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있던 팔커의 경비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드리안과 나, 둘이선 해결할 수 없는 숫자였다.

사실은 둘도 아니지. 아드리안 혼자잖아.

천장에 매달려 걷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이들을 상대로 싸우는 건 위험했다.

그림자를 데려와야만 해.

그러니….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두 번째 작전으로 변경이다!

산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 거기 딱 멈춰요! 더 오지 마.”

삿대질을 당한 아드리안이 깜짝 놀라 멈췄다.

아드리안이 다급하게 눈으로 말했다.

왜 이러냐고.

무슨 사고를 치려는 거냐고.

“이번엔 사과해도 소용없어. 나는 내 길을 가겠어. 당신은 당신 길을 가란 말이야!”

아드리안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는데 팔커가 야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또 무슨 쇼를 하시려고 이러시나, 레이디?”

할 테면 해보라는 거지?

물론이지. 이쪽도 바라던 바다.

산샤는 홱! 팔커를 잡아당겼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공격에 팔커는 힘도 못 쓰고 휘청 흔들렸고, 산샤는 그대로 팔커를 끌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콰당!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아드리안은 경악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조용히 퇴장하기로 했고, 거의 다 된 것 같았는데….

그러나 산샤가 왜 그랬는지 곧 알아차렸다.

어마어마한 경비들이 몰려오는 것만 봐도 뻔했다.

산샤가 ‘당신 갈 길 가’라고 했던가?

가서 그림자들을 데려오라는 뜻이었겠지.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다.

아드리안은 그대로 경비들이 들러붙은 육중한 문을 향해 달렸다.

* * *

감금된 이들이 있는 방으로 향하는 길은 어두웠다.

생각의 끈을 늦추게 하는 향은 진동했고 몹시 덥기도 했다.

열기가 향을 짙게 한 건지, 향이 짙어서 더 덥다고 느껴지는지는 모호했다.

산샤는 냄새를 안 맡으려고, 소맷자락으로 코를 막으며 투덜거렸다.

“어휴, 어두워. 여기에 불은 어디서 밝히는 거야?”

“레이디,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팔커가 으르렁거렸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렇게 들어오냔 말입니다.”

“묻는 말에나 먼저 대답해. 불은 어디서 밝히냐니까?”

“여기는 불을 밝히는 데가 아닙니다. 그냥 어두운 곳이란 말입니다.”

산샤는 쯧, 혀를 찼다.

가르쳐주기 싫으면 말 것이지. 그냥 어두운 곳이 어딨다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산샤는 한쪽 귀퉁이에 기름 먹인 나무가 쌓인 것을 발견했다.

그러면 그렇지.

“저 봐, 횃불 밝힐 준비가 되어 있잖아.”

“뭐라고요? 어디에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데….”

“있을 리가 없기는….”

산샤는 나무를 집어서 팔커에게 내밀었다.

“불붙여.”

“아악, 저리 치워요. 들이밀지 말라고요.”

이 반응은 뭐지?

산샤는 새삼스럽게 팔커를 봤다.

어디선가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잔뜩 겁에 질린 팔커의 얼굴이 보였다.

방금까지 싸늘하게 자신을 협박하던 자가 주변의 작은 소리에도 두려워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식은땀까지 흘리는 건가?

“어떻게 나를 여기로 끌고 들어오냔 말입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곳에.”

“왜 이래? 네가 아이들을 끌고 다니는 길이잖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길 아냐?”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트리스가 여기에서 나오는 거 다 봤는데!”

“그건 오른쪽 문이었고요! 여긴 왼쪽 문이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랬나? 트리스가 다니던 쪽에 문이 나란히 두 개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팔커가 울먹이며 원망했다.

“여기는 귀신들의 방입니다. 뭐에 당하는지도 모르고 죽어 나가는 곳이란 말이에요.”

“귀신들의 방?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그때 팔커가 ‘크허어억’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저 소리, 저 소리….”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데, 어디선가 낄낄낄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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