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런데 조용했다.
왜 조용하니?
트리스, 놀라지 않았어?
험악하게 상소리부터 하고 나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반응은 뭐야?
트리스는 그대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얌전히 부여잡고 서 있었다.
유리 조각에 찔린 거로는 통증이 부족한가?
정신 차려, 트리스!
여기에서 탈출해야지!
“꺄아악!”
산샤는 모두를 대신해서 비명을 질렀다.
“어머, 피! 피 좀 봐. 지배인 뭘 멍청하게 보고 있는 거예요. 당장 약을 가져와요. 약을….”
일순 실내가 조용해졌다.
모두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배인이 한발 다가서며 말했다.
“데리고 가서….”
부우욱!
산샤는 그대로 테이블보를 당겨 길게 찢어냈다.
와장창, 테이블 위에 있는 것들이 날리고 뒤집어지고 깨졌지만, 대수냐.
이대로 트리스를 데려가 버리면 이 소동을 벌인 보람이 없잖아.
산샤는 지배인보다 먼저 트리스를 잡아 피가 흐르는 손에 테이블보를 감기 시작했다.
“어쩌면 좋아. 피가 이렇게나 많이 나네.”
그때였다.
“그만해라.”
나직하게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손을 내맡기고 있는 트리스에게서 나는 소리가 분명했다.
유리 조각이 효과가 있었구나.
반가웠지만 산샤는 아는 척하지 않았고, 붕대 감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정말 너무 힘이 남아돌아서….”
산샤는 여전히 붕대를 엉망진창으로 감으면서 떠들었고, 트리스는 들릴락 말락 하게 중얼거렸다.
“혼자는 안 가. 갇힌 애들이 많아.”
“이거 봐. 붕대를 감아도 피가 나와. …가만있어 봐. 내가 해줄게.”
“너 의심 받는다.”
“어머, 내가 이렇다. 이렇게 힘 조절이 안 된다고.”
“레이디, 그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당혹스러워하는군요.”
멈칫.
산샤는 붕대 감기를 그만두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는지 팔커가 자상한 할아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팔커는 트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렴, 아이야.”
말이 떨어지자마자 트리스는 그대로 팔커 옆에 가서 섰다. 마치 줄에 매달린 인형 같았다.
팔커는 지배인에게 트리스를 데려가라고 하고, 산샤를 돌아봤다.
“자, 레이디. 남은 이야기는 사무실에서 나누실까요?”
* * *
계획했던 대로 된 건 하나도 없지만, 팔커의 사무실에 앉아 있게 되었다.
남은 이야기를 나누자던 팔커는 산샤와 아드리안만 사무실에 있게 두고 나갔다.
손님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오겠다고. 남은 이야기는 그때 하자고.
사무실 입성이 이렇게나 쉽다니.
그러나 좋아할 수가 없었다.
환하다.
환해도 너무 환하다.
한쪽 면이 모두 유리라서 소동을 일으켰던 홀이 그대로 다 보였는데, 그 말은 곧 홀에서도 이쪽을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의자에 얌전히 붙어 앉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묶인 것도 아닌데 묶인 것처럼 꼼짝 못 하는 상태가 되었다.
“경솔했어요.”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드리안이 내뱉은 말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한 번은 지적하고 싶었다는 듯이.
산샤도 깔끔하게 인정했다.
“알아요. 트리스를 보니까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일을 벌이지 않고 정보만 수집하기로 하지 않았었나?”
“그렇지만 다 깨부수니까 속은 시원하지 않았어요?”
풉, 아드리안이 입술을 꾹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산샤도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술 끝에 힘을 주며 또 사과했다.
“미안해요. 마음대로 웃을 수도 없네.”
아드리안은 대답이 없었다.
살짝 돌아봤더니 벽에 걸린 그림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천하의 걸작이라도 되는 양, 완전히 그림에 빠진 것 같았다.
“경비 없다더니…. 꽤 보이지 않았어요?”
아드리안이 여전히 그림만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티몬이 탈출하고 상황이 바뀐 거겠죠.”
“다음엔 상황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을까?”
“어쩌면….”
짧은 대답만 남기고 여전히 그림에 집중 상태.
산샤는 괜히 그림을 흘겨봤다.
빨간 꽃 몇 송이 있는 아주 흔하디흔한 그림인데, 저걸 저렇게까지 열심히 감상한다고?
그림에 질투가 나려고 하네.
산샤는 호다닥 달려가서 그림을 팽개쳐 버리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고 말했다.
“다음 기회는 없을 거라면, 오늘 다 해야 하나? 어떻게 하지? …준비가 제대로 되지 못했는데?”
아드리안이 드디어 그림에서 눈을 떼고 산샤를 돌아봤다.
“이쪽이 준비하지 못했으면 저쪽도 준비 못 했을 거다. 그때 쳐야 한다. …레이디가 한 말이었는데?”
“그…렇죠.”
“그러니 뭐….”
아드리안이 뒷말은 더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아드리안을 한참 바라보며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던 산샤가 입을 뗐다.
“그렇군요.”
“…뭐가 그래?”
“내 검술이 역시 쓸 만했던 거야. 그래서 나와 힘을 합쳐 오늘 다 끝장을 보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군요?”
아드리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웃음을 참는 거야, 화를 참는 거야?
“생각이야 얼마든 자유롭게 해요. …나는 레이디가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다시는 여기 들어올 수 없을 걸 생각했던 거니까.”
그러네. 속 시원하게 깨부수기는 했지만 사고를 크게 친 거였네.
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오늘 다 해치워버려요. 청소까지 깨끗하게.”
그러나….
“그럼 아버지 서명은 영영 못 찾는 걸까?”
산샤는 사무실 안을 훑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서는 어디에 있을까.”
“금고에.”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금고가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지.”
“그림 뒤에.”
“뭐?”
벌떡 일어날 뻔했다.
“저 빨간 꽃 그림?”
아드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벽으로 달려가 그림을 뒤집어보고 싶은 마음을 의자 팔걸이를 꼭 붙들고 참으며 산샤는 말했다.
“그래서 그림만 보고 있었던 거구나. 난 또, 나한테 화가 난 줄 알았잖아.”
“으응?”
아드리안이 산샤는 바라봤다.
“내가 왜 레이디한테 화를 내요?”
“경솔했으니까. …잠깐만 뒤로 물러나 있었으면, 아드리안과 의논해서 사람들 이목을 끌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뒤늦게 철이 든 건가요?”
“내가 막무가내였던 건 사실이니까….”
피식 아드리안이 웃었다.
산샤는 보는 눈빛이 애정으로 가득해 보이는 건, 언젠가처럼 연기일까?
아니면 ‘생각의 끈을 늦추게 하는 향’ 때문일까?
“괜찮아요. 레이디잖아.”
“예?”
“레이디라면 막무가내일 것이다, 각오했다고 말했을 텐데? …신중하기 싫다고, 경솔하게 마구 행동할 거라고 그랬었잖아요.”
“아…. 내가 그런 말을 했었군요.”
스스로 한 말인데 정작 자신은 잊고 있었던 것을 아드리안이 기억해줬다.
아무래도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게, 자신도 향에 취해 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 서명은 빨간 꽃 그림 뒤에 있고, 금고 열쇠는 어디 있는지 모르고, 갇혀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걸 다 오늘 해결해야 해요.”
산샤는 아드리안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뭐부터 할까요?”
아드리안이 산샤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레이디가 콘스탄틴만큼 잘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뭘요?”
물으면서 산샤는 생각했다.
그게 뭐든 콘스탄틴이 하는 거라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 * *
끔뻑끔뻑. 팔커가 입은 벌린 채로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와서 말을 한마디도 제대로 못 했다.
분명히 소동을 일으킨 책임을 물으려 했는데, 책임이 다 뭔가. 아무래도 휘말린 것 같다.
막 들어왔을 때는 둘의 분위기가 어찌나 험악하던지.
서로에게 아예 등을 돌린 채 외면하고 있었고, 둘 사이에는 냉기가 쨍하니 흘렀다.
그래서 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밖에서 보기에는 두 분…. 사이 좋게 담소를 나누시던데….”
“불쾌하군.”
산샤가 턱을 치켜들고 눈 아래로 팔커를 내려다보며 톡 쏘아붙였다.
“에? 무슨…. 뭐가….”
“이렇게 팽개쳐 두고 기다리게 하다니. 자네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는데….”
이상한 레이디가 다 있다.
담소를 나누자고 사무실에 가 있으라고 한 게 아니지 않나.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레이디.”
“섬에 들어서자마자부터 좋았네. 내가 원래 폐허를 좋아하거든. 폐허도 다 나름의 분위기라는 게 있기 마련이라네. 알고 있었나?”
“예?”
“멍한 표정을 보니 몰랐군? 역시 이 성은 자네처럼 메마른 사람에게는 아까워.”
“에…에?”
팔커는 슬그머니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레이디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레이디는 팔커가 알아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혼자서 계속 떠들었다.
“이 성은 나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가져야 제대로 빛을 발할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투자하겠네.”
그러더니 못마땅한 듯 팔커를 흘겨보며 다시 물었다.
“왜 대답을 안 하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하지? 뭘 물었더라? 팔커는 정신을 추스르려고 노력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이디, 뭐라고 하신 겁니까? 투자요?”
“그래, 투자. …여기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들지 않은 게 하나도 없어. 갖고 싶단 말이야.”
“…….”
“너의 것을 뺏을 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너에게 투자를 하겠다는 거야. 우선 백만 골드로 시작해 볼까 하는데?”
“백만 골드요?”
팔커가 놀라서 되묻는데, 내내 말이 없던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백만 골드? 제정신이냐? 이렇게 쇠락하는 사업에 백만 골드를 투자한다고?”
팔커는 기겁하며 남자를 바라봤다.
“쇠락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심하게….”
남자는 팔커는 아예 투명인간 취급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레이디에게만 소리쳤다.
“마정석 광산이 열렸어. 이 장사를 하면 얼마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레이디가 소리쳤다.
“장사를 못 하면 더 좋지. 폐허가 내 것이 되는데!”
“누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폐허에 백만 골드를 내다 버린다는 거야?”
“너는 이래서 문제야.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잖아. 영혼이 메말랐다고.”
“닥치지 못해! 그 입을 다물라고!”
남자가 벼락같이 호통쳤고 ‘으허억’ 팔커가 자지러지는데, 레이디는 오히려 눈을 부라리며 덤벼들었다.
“너야말로 닥쳐! 얻다 대고 고함이야.”
팔커는 울상이 되어 호소했다.
“두 분, 그만하십시오. 누가 뭐래도 제 겁니다. 제 장사란 말입니다.”
그때 갑자기 레이디가 벌떡 일어났다.
“자세히 살펴봐야겠어.”
“예?”
“투자하고야 말 테니 낱낱이 다 살펴봐야겠단 말이다. 안내해라.”
레이디는 팔커를 기다리지 않았다.
먼저 벌컥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아, 아니…. 레이디!”
당황한 팔커는 부리나케 레이디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