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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51화 (51/97)

51화

축제의 절정은 밤에 이루어진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거리엔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이 가득했고, 호수에는 수많은 배가 띄워졌다.

배마다 등불을 잔뜩 밝혀 마치 환한 대낮 같아서 하늘의 별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봐, 호수에 별이 가득해.]

정말 산샤가 말한 대로였다.

호수에 비친 등불은 온통 별 같았다.

두두둥.

북소리가 또 아련하게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등불을 묶은 줄을 풀었다.

하나둘 등불이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산샤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속삭였다.

[별들이 하늘에 있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아.]

아드리안도 하늘로 가득 메우고 있는 등불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산샤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그리고 아드리안을 돌아보았다.

[너도 소원을 빌어. 뭐든 다 이뤄진다니까.]

아드리안은 산샤를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발갛게 달아오른 볼.

꼭 맞잡고 있는 손까지.

아드리안은 속삭였다.

[내 소원은 산샤 너야.]

산샤의 입술이 천천히 늘어나는 것 같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활짝, 환하게 웃었다.

산샤가 아드리안에게 입을 맞췄고, 아드리안은 벅찬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와락 산샤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어찌 되었더라.

둘은 헤어졌고, 산샤는 아드리안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호수 축제의 청혼 따위.

아드리안은 호수를 향해 긴 숨을 내쉬었다.

* * *

“팔커의 파티에 초대받으셨습니까?”

배 한 척이 나루터에 닿더니, 가면을 쓴 자가 내려서 물었다.

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이미 가면을 쓰고 있던 아드리안과 산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샤와 아드리안이 타고, 배는 조용히 출발했다.

산샤는 호수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날이 생각난다.

호수는 노를 젓기도 힘들 정도로 배가 꽉 차 있었는데.

아드리안은 처음 해 보는 게 분명한데도 요령껏 그들을 피해서 호수 가운데로 파고들었다.

우리 등을 가장 높이 올리고 싶다는 산샤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일제히 등불이 날아가는 건 정말 아름다웠다. 호수에 가라앉아 있던 별이 하늘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연인들은 서로를 껴안고 키스했다.

산샤도 참을 수가 없어서 아드리안에게 입을 맞췄고, 아드리안은 자신을 와락 끌어안았다.

조금의 틈도 없이 꼭 끌어안고 서로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다 떠오른다.

자신을 바라보던 아드리안의 눈동자.

파르르 떨리던 눈빛.

내 소원은 산샤 너라고 속삭이던 목소리.

너무 행복해서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던 나.

그때와 다름없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지금의 자신도 느껴졌다.

산샤는 아드리안을 돌아봤다.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긴 속눈썹에 가려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할까?

그동안 나를 원망했겠지.

그토록 떨리고 벅찬 두 사람의 약속을 다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줄도 모르고, 아드리안 혼자서만 감당하게 했으니.

아드리안도 이 호수에서 나눴던 우리의 첫 키스를 떠올리고 있을까?

* * *

파란 섬의 옛 성은 폐허라고 하기도 애매한, 아예 인간의 손길이 닿았던 적이 없는 듯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안내자가 나무뿌리를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후다닥 새들이 날아올랐다.

지붕이 하나도 남지 않아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얗게 빛나던 성은 밖에서 보이는 한 면뿐이었고, 안쪽은 얽히고설킨 나무뿌리에 침식당한 돌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나무뿌리 때문에 건물이 무너진 건지, 무너지다가 뿌리를 잡고 겨우 지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건물이라도 이 꼴이 되고 마는 건가.

이런 데에서 어떻게 파티를 연다는 거지? 당혹스러워하고 있는데,

“레이디 그리고 신사분. 이쪽으로 와주시겠습니까?”

안내자가 가리키는 곳에 다른 입구가 있었다.

옛 성의 지하는 별천지였다.

지상층의 열 배는 될 만큼 넓었고, 햇빛은 한줄기도 들어오지 않는데도 벽이 스스로 빛을 내고 바람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밝고 향긋했다.

글라키에스가 만든 성이라서 온통 마법투성이인가.

이곳에서 카이와 부부로 살면서 아이를 열이나 낳았나 보다. 그러기에 딱 좋은 빛과 향기였다.

그러한 역사를 되살리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타인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분출시키고 있었다.

산샤는 길게 터지려는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

아버지가 아무리 팔커와 계약서를 쓰고 서명했더라도, 이곳은 내주지는 않으셨을 거다.

아무리 비자금이 필요하다고 해도 노예 상인에게 글라키에스 옛 성을 내주실 분이 아니다.

아드리안이 자신의 팔에 올려진 산샤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속삭였다.

“혹시 의심이 생기면 호수 축제를 금지한 게 모리츠라는 것만 생각해요. 호수에 사람 접근을 막아놓고 뭘 했겠어요.”

산샤는 아드리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러고는 일부러 우스워 보일 만큼 과장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네. 모리츠를 까맣게 잊고 있었네.”

아드리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여기 공기가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거 같아요. 그런 향을 품고 있어.”

“아….!”

산샤는 일부러 공기를 깊게 들이 마셔봤다.

달콤하면서도 더운 느낌의 향이 밀려들어 오고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맞아요. 마음이 말랑말랑해져요. 울컥 눈물이 날 것도 같고….”

“이성의 끈을 늦추게 하는 향이니까….”

“사랑을 나누기에 좋은 향인가?”

아드리안이 새삼스럽다는 듯이 산샤를 바라봤다.

“그럴 수도 있겠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지는…. 평소에 눌러놨던 게 많으면 다 쏟아져 나오기도 할 테고….”

“그렇다면 당신에게 가장 위험한 향, 아닌가?”

“내가 왜?”

아드리안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야 당신이야말로 평소에 눌러놨던 게 많으니까.

…라고, 산샤는 생각만 했다.

그때 아드리안이 속삭였다.

“생각은 나중에 해요.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예요.”

나루터까지는 아드리안의 그림자가 함께했었다.

그러나 그림자들은 배를 탈 수는 없었으니, 여전히 나루터에 있다.

딱히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번엔 일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아드리안은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정보만 수집하러 온 거라고.

당연히 산샤도 완전히 동의했다.

제대로 된 작전에는 풍성한 정보가 기본인 법.

티몬이 제법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기억이 듬성듬성하니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니 이번은 다음 방문을 위한 포석일 뿐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지배인이 정중하게 인사하고, 둘을 자리로 안내하였다.

“레이디와 신사분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음료입니다.”

가리키는 탁자에는 맑은 핑크빛의 음료가 벌써 올라와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음료를 홀짝홀짝 마시는 걸 보니, 마시면 안 될 것 같은데….

산샤는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이게 그 유명한 팔커의 음료군요. 듣던 대로…. 어쩜 이렇게 예쁠까.”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맛도 아주 훌륭하답니다. 자, 어서 쭉 들이켜 보세요.”

알아봐 주기는 뭘, 그들의 세상에서 유명할 테니 떠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호들갑을 떨어서는 마시는 걸 피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지배인에게서는 두 사람이 음료를 마시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어찌해야 하나 오래 고민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산샤는 잔을 들었다.

일단 마시자. 죽기야 하겠냐.

냅다 입에 가져다 대는데,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나는 두고 먼저 마시는 건 아니지?”

“앗!”

비명을 지르려고 했는데, 뭔지 모를 소리만 짧게 나오고 말았다.

이런 아드리안의 모습이라니.

별말도 아닌데 이토록 유혹적이라니.

산샤가 정신 줄을 놔버리고 멍하니 있는데, 아드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챙’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그 소리에 산샤는 눈을 깜빡 감았다가 떴고, 얼른 아드리안의 입부터 막았다.

그렇다고 당신 혼자 마시면 어쩌자는 거야.

“그, 그러네. 오늘같이 좋은 날, 우리가 건배도 없이 마시려고 한 거였잖아.”

그러고는 ‘쨍…, 그랑!’

있는 힘껏 잔을 부딪쳤고, 가해진 힘 그대로 잔이 부서져 산산이 흩어졌다.

“어머, 어쩌면 좋아. 특별히 마련해준 건데, …이 귀한 걸 못 마시고 말았네.”

산샤는 샐쭉 지배인을 흘겨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잔이 너무 약한 거 아냐? 이렇게 깨져버릴 줄은 몰랐어.”

그런데 지배인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음료는 금방 다시 준비됩니다.”

“으응?”

산샤는 지배인이 누군가에게 신호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럴 계획이 아니었어.

잔이 깨져 마실 수 없게 되면, 지배인이 새 음료를 가지러 자리를 뜰 수밖에 없을 거다.

딱 그 빈틈을 노려 팔커의 사무실을 찾아내고 잠입한다는 계획이었단 말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또 가져올 수 있는 거라면, 굳이 잔을 깰 필요도 없었는데….

“허업!”

산샤는 터질 뻔한 비명을 얼른 제 주먹으로 막았다.

새 음료를 가져온 건 트리스였다.

“두 분을 위한 음료를 가져왔습니다.”

트리스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트리스, 제정신이 아니구나.

눈 똑바로 뜨고 보지 말라며 을러대던 아이가 아니었나.

이토록 순하고 얌전한 표정이라니.

트리스의 얼굴만 한 얼굴이다.

티몬이 뭐라고 했던가.

정신만 멀쩡했으면 탈출을 못 할 누나가 아니랬지.

그리고 또 뭐랬더라?

[눈에 번쩍 번개가 지나가는 것처럼 아프더니, 갑자기 팍 정신이 차려지는 겁니다.]

티몬의 말이 생각나는 동시에 아직 치우지 않은 유리 조각들이 보였다.

산샤는 잔을 내려놓는 트리스의 손을 잡아 그대로 유리 조각 위로 눌러 버렸다.

트리스가 홱 고개를 쳐들어 산샤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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