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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50화 (50/97)

50화

눈살을 찌푸리는 산샤에게 확인해 주듯 아드리안이 다시 말했다.

“나에게 쓸 돈이었다고요.”

“당신….”

못 믿겠다. 뜬금없이 내 아버지가 당신에게 왜?

그렇지만 정말인 것 같아서, 산샤는 겨우 물었다.

“…어디에?”

질문은 어렵게 했는데 대답은 쉽고도 간결했다.

“로베르트 백작이 나를 위한 일을 꾸미고 있었으니까. 호레스 밀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투명하지 않은 돈이 필요했겠죠.”

“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산샤는 의미 없는 탄식만 뱉었다.

그런데 아드리안은 술술 말을 이어갔다.

이런 말을 할 날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엔 기어이 말을 다 해버리겠다고 작정한 것 같기도 했다.

“팔커가 뭘 팔지 정확히 몰랐던 것 같아요. 로베르트 디아머드에게 한 달에 1만 골드를 제안하다니…. 우습기도 했겠지.

그렇지만…. 로베르트 백작에게는 푼돈이지만, 비밀리에 일을 도모하는 사람으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액수였을 테고.”

아드리안이 웃었다.

산샤의 눈에는 진짜 웃는 게 아닌, 씁쓸한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보였지만.

“로베르트 백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사고를 당한 나를 외면할 수 없어서 명예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고, 결국 살해되고 말았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당신 때문에 내 아버지가 죽었다고?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일부러인 듯, 가볍게 말했다.

“나만 아니었으면, 평생 팔커 같은 자에게 서명을 남길 리가 없었겠죠.”

아드리안은 압도적인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자신의 결정을 따르게 하는 사람이었다.

산샤가 무례한 아니타에게 제대로 가주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드리안이 루카에게 하는 것을 따라 한 덕이었다.

그런 아드리안이었는데….

지금의 아드리안은 처음 보던 날의 그 아이 같았다.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말했었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무 오래 상처받아서 자신의 상처가 당연한 줄 알고 있던 아이였다.

산샤는 아이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아름다운 아이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때의 자신이 아드리안에게 위로가 되긴 했을까?

지금의 자신은 아드리안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괜히 옛 기억이나 떠오르게 하면서 상처를 덧내고 있는 건 아닐까.

산샤는 일부러 웃어 보였다.

“당신,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요.”

아드리안이 했듯이 부러 가벼운 말투로,

“아버지 사고는 모리츠가 한 짓이었죠. 가문의 재산을 삼키고 싶어서….”

어깨도 으쓱해 보였다.

“어쩌다 보니까 그때였던 거지, 가족여행 때 못 했으면 다른 때라도 했을 거예요. 의지의 모리츠잖아요.”

“…굳이 위로하려고 하지 않아도….”

“위로를 왜 하겠어요. 당신이 나보다 몇 배나 훌륭한데….”

산샤는 가볍게 아드리안을 흘겨봤다.

“어쨌든 그건 엄연한 내 아버지의 결정이었어요. 여쭤볼 수는 없게 되었지만, 확실한 건….”

산샤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하기 싫은 데 억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아버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했어요. 자신의 결정에 확실한 책임을 졌고….”

아드리안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때문에 아버지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건,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에요.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산샤의 말에 꼿꼿이 버티고 있던 몸에서 한순간에 탁, 긴장이 사라진 것 같았다.

용서받았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드리안은 해방감을 느꼈다.

내내 괴롭히던 죄책감에서 놓여났다.

문득 산샤가 물었다.

“파란 섬은 해마다 축제가 열리는 곳이잖아. 거기에서 어떻게 은밀한 장사를 해?”

“모리츠가 후견인이 되면서 축제를 잠정적으로 정지시켰어요.”

“아…. 모리츠.”

산샤가 끌끌 혀를 차다가 또 물었다.

“그럼 이제…. 청혼은 어디에서 하나?”

아드리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별걱정을 다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청혼할 장소 걱정만은 없을 사람이 산샤 디아머드인데….

* * *

“어머엉, 아드리안 경!”

라베나가 요란스럽게 들어오며 아드리안에게 아는 체를 했다.

“저를 먼저 불러주시다니요. 아드리안 경이 제 옷을 입어주시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죠.”

이런 농담은 익숙하다는 듯, 아드리안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라베나, 너는 여인들의 옷만 만들잖아.”

“그러니까요. 제 드레스를 아드리안 경이 입어주시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라베나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짜릿…. 어? 레이디 산샤!”

“안녕, 라베나.”

산샤는 배시시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하! 그러니까 오늘 제 옷을 입으실 분은 레이디셨군요.”

“아드리안이 아니라서 미안!”

“어머, 어머머,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저는 그저 영광입니다. 아드리안 경보다는 못 하지만….”

라베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컨셉을 원하시려나?”

“은밀한 파티를 즐기는 성숙한 여인이 되고 싶어.”

뜨악. 라베나가 몸을 뒤로 젖혀 산샤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흐흐흐’ 음흉하게 웃었다.

“마침 저에게 딱! 화끈한 파티에 어울리는 드레스가 있답니다.”

산샤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라베나.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어.”

아드리안도 한마디 끼어들었다.

“그래, 라베나. 은밀한 파티라고 했잖아. 이상한 파티가 아니라….”

“에이, 두 분도 참…. 저를 못 믿으세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자, 자….”

라베나는 방에 딸린 탈의실로 산샤를 이끌면서 수선을 떨었다.

“어서 오세요. 이리 와요. 시간이 별로 없다고요.”

그러면서 훌러덩 옷을 벗겼다.

아악!

문은 닫고 해야지!

막 문을 닫으려던 아드리안과 눈까지 마주쳤다.

산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왜 이리 큰가.

이미 볼 거 다 보인 사이인데도, 처음인 것처럼 부끄러웠다.

상상만으로도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탁.

문이 닫혔다.

“하아….”

몸에 기운이 다 빠져 버렸다.

산샤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문 너머에서는 아드리안이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지듯 의자에 앉고 있었다.

* * *

팔커는 근거지에서 날마다 손님을 위한 파티를 연다고 했다.

더 큰 거래를 위해 손님들의 욕망을 자극하겠다는 계산이리라.

손님들은 파티에서만은 격식과 품위를 내던지고 마음껏 풀어진다고 하니, 의심받지 않으려면 옷차림부터 과감해야 했다.

그런데….

드레스를 어떻게 만들었길래 이렇게 눈 둘 데가 없을까.

곰곰이 뜯어보면, 분명히 가릴 곳은 다 가리고 덮을 곳도 다 덮었는데도 야하다.

아드리안은 먼 데, 저 멀리 산으로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파란 섬이 보이는 나루터에 있었다.

팔커의 종자들이 곧 태우러 올 거라고 했다.

산샤가 기억하는 나루터는 언제든 아무나 탈 수 있도록 배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팔커는 파란 섬에 자리 잡으면서 배부터 없앴다고 했다. 자신이 태워주지 않으면 아무도 파란 섬에 들어올 수 없도록.

멀리 파란 섬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옛 성이 보였다.

글라키에스가 카이를 위해 하루 만에 뚝딱 지어주었다는 성이었다.

카이는 하얗게 빛나는 성을 보고 탄식했다나.

[이토록 아름다운 성이 있는데 함께할 반려가 없구나.]

집 줬더니 여자를 달라고 한 거지.

밤이면 밤마다 낮이면 낮대로,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카이를 보다 못한 글라키에스는 인간 여자의 모습이 되어 나타났고,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낳은 아이가 열.

디아머드 백작 가문 역사상 가장 다산한 부부였다.

파란 섬은 디아머드 백작 가문의 성지였다.

밀 수확이 끝나면 글라키에스와 카이의 사랑을 기리는 축제를 열었는데, 축제 준비기간까지 해서 사시사철 1년 내내 축제였다.

그랬던 곳이었는데….

“쓸쓸해 보이네.”

멀리 있는 옛 성을 바라보던 산샤가 중얼거렸다.

아드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쓸쓸해 보이네.”

산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호수 축제 때 결혼을 약속해야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는데…. 우리 부모님은 호수 축제에서 결혼을 약속했어요.”

“…알아요.”

어린 산샤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호수 축제 때 결혼을 약속하면 글라키에스가 축복을 내려줘서 결혼생활이 평생 행복하다고.

대표적인 예가 로베르트 백작 부부라고.

* * *

[어머니, 아버지는 다섯 살, 여섯 살일 때 벌써 결정하셨대.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직 서로만을 바라보았대.]

산샤는 자못 진지했다.

[나는 어머니, 아버지에 비해선 나이도 너무 많고 너무 늦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있어. 나도 호수 축제에서 내 반려를 정할 거야.]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산샤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글라키에스는 평생 축복을 내려줄 거라고.

그러자 산샤는 아드리안을 흘겨보며 말했다.

[남 이야기하듯이 그러지 마. 너한테 하는 말이야, 아드리안.]

아드리안은 순간 자신의 심장이 쿵 떨어진 것 같았다.

산샤와 자신, 둘 사이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이명이 들려왔다.

몸이 하늘로 붕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아드리안이 멍한 상태가 되어 아무 대답도 못 하자, 산샤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그런데 반려가 되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

사랑?

갑자기?

호수 축제의 마지막 날 밤이었다.

산샤와 아드리안은 손을 꼭 잡고, 연인들 사이를 거닐었고, 호수에 띄워진 배에 나란히 누워 여름의 향기를 느꼈다.

네가 있어서 정말 좋다고.

너 없었으면 밤늦게까지 놀 생각은 못 했을 거라고.

산샤가 말하자 아드리안도 말했다.

나도 네가 있어서 정말 좋아.

너 없었으면 이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영영 몰랐을 거야.

두둥.

마침내 축제의 마지막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인들은 앞다퉈 호수 가운데로 나룻배를 저어 나갔다

[노 저을 줄 알아?]

노를 저어본 적은 없지만, 아드리안은 할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산샤가 말했다.

[저기 호수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우리 연등이 제일 높이 올라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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