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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49화 (49/97)

49화

그랬는데 아델라이드였다.

바깥은 한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는데도 아무 상관 없이 일정한 온도와 습도와 밝기를 유지하고 있는 아델라이드.

“아드리안, 이건 좀 아닌데요?”

산샤는 아드리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델라이드가 훌륭한 사교클럽인 건 알겠는데, …팔커를 치기 전엔 방문해야 할 곳은 아니잖아요. 차를 마시며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자는 건가요?”

“아, 미안. 먼저 설명을 해야 했는데….”

아드리안이 루카에게 신호하며 말했다.

“내 은신처가 다 여기에 연결되어 있어서…. 아델라이드에 온 게 아니에요. 스쳐 지나가야 할 문이지.”

루카가 신호를 받고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들을 계단 뒤쪽으로 안내했다.

첫 방문 때 루카에게 밀려 들어가 잔소리를 들었을 때는 막다른 곳이었는데, 이제 보니 문인지도 모르게 생긴 작은 문이 있었다.

루카가 문을 열어 주자,

클라이드 같지 않은 전혀 새로운 골목이 펼쳐졌고.

낯선 풍경을 구경할 새도 없이 바로 맞은편 건물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담하고 작은 방이었다.

식탁 위에는 누군가 막 식사하려던 참이었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튜가 있고, 벽에는 타닥타닥 벽난로가 타고 있었다.

벽난로요?

여보세요.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이라니까요.

벽난로라니요.

근데 하나도 덥지 않고, 적당하게 훈훈해.

게다가 창밖 풍경은 설마 저거 눈이 내리고 있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들어올 때는 분명히 중심지의 건물이었는데, 들어와서 보니 숲속의 작은 오두막인데, 한겨울이라고?

“이게 다 뭐예요?”

아드리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법이죠.”

듣던 중 가장 어이없는 설명이다.

황당해하는 게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아드리안이 애매하게 웃었다.

“제국은 애초에 마법을 기반으로 세워졌고, 레이디도 마법을 믿잖아요.”

“…무슨 종류의 마법인데요?”

“은신 마법, …도피 중인 사람이 안전하게 숨어 있도록 장소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살짝 틀어 주는 거죠.”

시간을 틀어?

그것, 참, 구미 당기는 소리였다. 시간에 대해서 바라는 바가 아주 조금 있는데….

“원하는 시간을 골라서 갈 수 있어요?”

“그건 아니에요. 은신처도 은신처 나름의 시간이 흐르고 있으니까. 지금 시간과 다르다는 것일 뿐….

시간이 틀어진 은신처에선 정해진 문 외에는 사용해선 안 돼요. 그랬다가는 시간과 시간 사이를 헤매는 영원한 미아가….”

말하다 말고 아드리안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고 싶은 시간대가 있어요?”

“아니요!”

너무 빠르고 격하게 대답했다. 이래서야 그렇다는 고백 같은데….

“…가고 싶은 시간이 너무 많아서 하나도 없는 거라고 해두죠.”

“그래요.”

아드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산샤는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여기 누굴 숨겨 두고 있는 건데요?”

그때였다.

콰당!

무릎 깨지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레이디 산샤!”

또냐? 또 누구의 무릎이 박살 나는 거냐.

사법관만 채용되면 무릎 꿇는 걸 아예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리라.

기어이 디아머드 남자들의 무릎을 보호하리라.

무릎을 꿇고 바닥에 넙죽 엎드린 남자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엎드린 모습만 봐서는 누군지 전혀 모르겠는데….

“누구지? 고개를 들어라.”

아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스튜와 같이 먹을 빵을 가지고 오느라 방을 비웠던 듯 가슴에 큰 빵을 껴안고 있는 아이는 벌써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레이디 산샤, 제발 살려주세요.”

“…티몬?”

마부 랄프의 전 재산을 털어 도망갔다던 남매 사기단 중에서 동생, 티몬이 분명했다.

갑자기!

전 재산 하니 정원에서 발견했던 금화가 생각나고,

자신에게 날아오던 것을 쳐냈다는 방향이 금화가 있었던 방향인 게 생각났다.

나를 습격했던 자객을 아드리안의 그림자가 잡았다고 했었지?

“너였니, 자객이? 네가 금화를 던졌어?”

“레이디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디에 누가 있는 줄 모르니까, 막 나설 수가 없으니까, 숨어있어야 하니까. 조용하고 은밀하게 말씀만 드리려고….

성 안쪽으로 더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고, 레이디가 오시기만 기다렸습니다. 언젠간 오시겠지, 이제나저제나 오시려나.

삼나무 둥지 안에서 몇 날 며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기껏 레이디가 오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잠만 자다가….

가지 마시라고, 저 좀 봐 달라고. 그런데 가지고 있는 건 금화밖에 없어서….”

그래서 금화를 던졌는데, 자객으로 오해만 받고 끌려 왔겠지.

지금은 은신처에 숨겨 주고는 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또 얼마나 무서웠을까.

시커먼 그림자들에게 잡혔다는 것 자체가 공포였을 텐데….

원래 그림자라는 게 사람을 잡거나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사람에게 붙어 다니기만 해야지.

“근데 트리스는? 트리스는 어쩌고 너 혼자 다녀?”

티몬이 새롭게 맑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주룩주룩 흘리기만 하더니만 결국엔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나 보다.

울음이 어찌나 서러운지 울지 말라는 말을 하기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산샤는 멀뚱멀뚱 서서 티몬이 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울 만큼 울고 난 티몬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레이디 산샤가 마정석 광산을 열었으니까요. 앞으론 등쳐 먹을 노예 상인이 없을 거라고…. 마정석 채취하러 가지 어떤 미친놈이 노예 장사를 하겠냐고….

근데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정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제대로 크게 한탕 하자고….”

그래서 남매는 팔커에게 자신을 팔았단다.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으니까, 이번에도 당연히 도망 나올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랬는데…, 크흐흑.”

티몬이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안 들어도 무슨 일인지 알겠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던 탈출을 이번엔 실패해 버린 거겠지.

남매가 상대하기엔 팔커는 너무 큰 악당이었던가.

또 한참을 울다가 티몬이 주먹으로 쓱쓱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정신만 멀쩡했으면 탈출을 못 할 누나가 아닙니다. 맨정신이기만 했으면 거기가 지옥이어도 나올 수 있습니다.”

“맨정신이 아니면 뭐였는데? 약이라도 먹인 거야?”

“예!”

티몬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들어가자마자 계속이요. 음료로 마시게 하고, 먹는 국물에도 타고, 연기도 피워 놔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나왔어?”

티몬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손에 통째로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피가 배어 나온 상태를 보아하니 제법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이 손으로 뭘 했다는 거지?

“어쩌다 문에 손이 끼었습니다. 엄청나게 무거운 철문이었거든요. 뼈가 으스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눈에 번쩍 번개가 지나가는 것처럼 아프더니, 갑자기 팍 정신이 차려지는 겁니다.”

그래서 걸어 나왔단다.

약 말고는 특별히 감시가 심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티몬의 이야기가 끝나자, 산샤는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이야기는 잘 들었는데, 아직은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까.

아드리안이 보충 설명을 해줬다.

“손님들 틈에 끼어서 나오긴 했지만, 다시 잡혀갈까 봐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레이디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숨어 있어야 했던 것도 같은 이유이고….”

“손님이 어디에 있었는데요? 어떻게 있죠? 단상은 무너지고 없는데….”

아드리안이 눈짓으로 티몬을 가리켰다.

“그 이야기를 들으라고 데려온 거예요. 팔커의 진짜 장사는 안 보이는 곳에서 이뤄졌고, 티몬이 거길 다녀온 거니까.”

티몬의 이야기를 이어서 들은 산샤는 경악하고 또 경악했다.

들어도 들어도 어이가 없어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물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티몬은 짜증 내지 않고 하나하나 조목조목 설명해주었다.

산샤가 제대로 알아야 트리스를 구해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티몬은 산샤가 나섰으니 트리스를 구해오고야 말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물론 산샤도 그럴 작정이었다.

트리스를 구하고 아버지의 서명이 있는 계약서를 훔쳐내고 팔커의 장사 터는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청소해 버릴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전이 필요했다. 제대로 된 걸로.

* * *

아델라이드로 자리를 옮기고,

산샤는 방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면서 생각나는 대로 혼자서 연거푸 해야 할 일을 말하고 있었다.

“트리스를 찾기 전에는 그림자든 기사단이든 들일 수 없어요.”

“아버지의 서명을 훔쳐내기 전에도 안 돼요.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 있었던 적도 없는 것처럼 없애야 하니까.”

“노예 경매요? 트리스를 사 오라고? 나는 할 수 없어요. 노예를 사겠다고 돈을 걸다니…. 디아머드 정신에 어긋나는 짓이야.”

“근데 초대장이 있는 사람만 들여 보내준다면서요. 어떻게 들어가요? 초대장을 어떻게 구해?”

내내 듣고만 있던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클라이드의 수호자에게는 지인이 많아요. 그중에는 팔커의 초대장을 줄 지인도 있죠.”

“우와!”

산샤는 탄성을 내질렀다. 역시 아드리안!

“그럼 다 된 거네? 초대장 있고, 당신과 나, 들어갈 사람 정해졌고, …우리가 무사히 일을 끝내고, 대기시켜놨던 그림자와 기사단을 투입해요. 청소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겠어.”

“팔커의 장사 터가 어디인지부터 알아내야죠.”

“어…?”

산샤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티몬이 정확한 장소는 말하지 못했다. 약에 취해 있던 게 대부분이라 기억에 듬성듬성 구멍이 많았다.

그렇지만 아드리안이 이미 알아놨을걸.

그런데도 저렇게 말하는 건, 이번에도 아주 경악하게 될 거라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건가?

산샤는 심호흡을 깊게 하고 물었다.

“어딘데요? 거기가.”

“파란 섬에 있는 옛 성.”

처음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파란 섬에 있는 옛 성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설마, 우리 옛 성, 말하는 거예요?”

아드리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드리안을 뻔히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파란 섬에 있는 옛 성은 디아머드 백작 가문의 근원지였다.

글라키에스와 카이가 결혼하여 살던 신혼집.

아이를 열이나 낳고 꽁냥꽁냥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의 보금자리였다.

그러니 수많은 청춘남녀가 그곳 호수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지.

그런 곳에서 노예 경매를 해?

그런 곳에서 노예 경매를 하게 했어?

“아버지가 그런 곳까지 내줬단 말이에요? 투명하지 않은 돈을 벌겠다고?”

“글쎄…. 그건….”

“대체 어디에 쓰겠다고…. 아버지가 투명하지 않은 돈을 쓸데가 어디에 있는데….”

아드리안이 말했다.

“나에게 쓸 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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