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너무 멀쩡하게 생겼다.
노예 상인이라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어리바리한 마부 랄프처럼 생겼거나,
인간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이 잔인하고 야비하게 생겼을 줄 알았다.
인정사정 안 봐주고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자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팔커는 지금까지 봐오던 누구보다 선하게 생겼다.
이렇게 자애로운 미소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니.
희끗희끗한 머리와 적당하게 주름 잡힌 얼굴은 손자 앞에 무릎 꿇고 군밤을 까주게 생겼는데….
“노예 상인이 나를 왜 찾아왔지?”
팔커가 야릇한 표정을 하며 손을 비볐다.
“과연 글라키에스의 현신, 제가 취급하는 물건을 말씀 드리도 않았는데도 바로 알아차리시는군요.”
“아부할 건 없다. 수호자에게서 벗어난 상인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니까.”
“예예, 그건 그렇지요. 저희가 유일하지요.”
“왜 왔나 물었는데?”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도움?”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 시장의 단상이 무너졌습니다.”
그랬지.
딕키가 모리츠에게 채찍을 날렸고 잘못 감긴 기둥이 와르르 무너졌었다.
무슨 단상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냐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했었다.
모리츠는 무너진 기둥 밑에 묻혔고, 그 때문에 이마가 깨져서 지금도 붕대를 감고 다닌다.
그렇게 속 시원한 광경이 없었다.
“그게…. 단상이라기보다는 매대라고 해야겠군요. 물건을 올려 전시하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매대가 없으니 저희가 당장 장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물건에 장사라.
이런 말을 어쩌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까. 나는 듣는 것만으로 피곤한데.
군밤을 한 포대 까주게 생겼어도 노예 상인은 노예 상인이로군. 생긴 걸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단상을 다시 만들어주기라도 하라고?”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매대는 저희가 세워야지요. 그게 아니라. 좀 지켜달라는 겁니다.”
“…지키기는 뭘?”
“매대 무너지고 지금까지, 저희가 몇 번이나 다시 세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밤새 누가 부숴놓습니다.
또 세우면 또 부숴놓고, 세우면 또…. 이게 몇 번째인지 모릅니다. 범인을 잡아주십시오.”
딕키의 얼굴이 바로 떠오른다.
요즘 사는 게 너무 재미있다고, 채찍질이 이렇게 신나는 일인지 몰랐다고 말하던 게 생각나는군.
“그러니 이번엔…. 이번에도 우리가 세우기는 할 테니까. 밤에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지켜주십시오.”
딕키가 얼마나 신나서 무너뜨리고 있는데, 그걸 지켜달라고?
산샤는 싸늘하게 노려봤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지?”
그러자 팔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찡얼거렸다.
“무례하다니요.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너의 장사를 위해 기사단이라도 동원하라는 거야?”
“예, 바로 그 말씀입니다. 기사단을 동원해서 지켜주십시오. 앞으로 계속 지켜달라는 건 아니고, 며칠이면 됩니다. 며칠 지나면 무너뜨리기를 포기하겠죠.”
“어떤 영주가 장사를 도와 기사단을 동원한다든가?”
“그렇지만 가주님 때문에 저희가 그렇게 된 거 아닙니까? 책임을 져주셔야죠.”
“책임?”
“물론 그날 그 소요의 중심에 계셨던 것도 그렇지만…. 그것뿐이 아닙니다.”
자애롭던 팔커의 표정이 점점 야비해지고 있었다. 제 입에서 뱉는 말에 따라 사람의 얼굴은 달라지는 법인가.
“이젠 뭐 마정석 광산까지 열어 버리고…. 그 바람에 물건 공급에 차질이 생겼단 말입니다. 그러니 매대라도 세우게 해주셔야죠.”
도저히 못 참겠다.
콰당!
산샤는 탁자를 내리쳤다.
“디아머드에서 노예는 금지야.”
“저희는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이걸 보십시오.”
팔커가 품에서 꺼내 촤륵 펼친 종이에는 디아머드 백작 가문의 인장이 찬란하게 빛났다.
“여기 이렇게, 선대 백작님과 정확하게 계약했습니다.”
팔커의 말마따나 인장 바로 옆에 아버지 로베르트 백작의 사인도 선명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장사 하는데 편의를 돌봐주고 매달 수수료를 받는다.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팔커가 딱 짚어 낸 그 대목에
[로베르트 백작은 클라우드 상인회의 장사에 필요한 편의를 살피고, 상인회는 매달 1만 골드씩 세금으로 바친다.]
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그러나 산샤는 피식 웃고 말았다.
“팔커?”
“예?”
“디아머드 백작 가에서 한 달에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라고 생각해요?”
“예?”
“나의 아버지가 고작 월 1만 골드에 디아머드에 노예시장을 허락했다고, …믿으라는 거야?”
“아하…. 예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말입니다.”
팔커가 속삭였다.
“백작님도 투명하지 않은 돈이 필요하셨던 게 아닐까요?”
“뭐?”
“그렇잖습니까. 가문의 수입은 막대한 만큼 누구나 다 아는 투명한 돈이지요. 그걸로는 비밀스러운 일을 도모할 수가 없으니까요.”
“내 아버지가 비밀스러운 일을 도모할 일이 뭐가 있어서?”
“그거야 모를 일이지요. 어디 숨겨진 여인이라든가….”
“팔커!”
서릿발 같은 산샤의 목소리에 팔커는 납작 엎드렸다.
“아, 예, 예. 예.”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그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백작님 부부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인연이었던 건 잘 알죠. 오죽하면 한날한시에 돌아가셨겠습니까. 신들도 부러워한 사랑이었지요. 압니다. 알아요. 그렇지만….”
팔커가 다시 씨익 웃었다.
“어쨌든 투명하지 않은 돈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법입니다. 저희가 그걸 해드린 거고요.”
느물느물 닳을 대로 닳은 자가, 자신을 갖고 놀려고 한다.
아버지도 이 자의 언변에 속아 넘어가서 사인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에게 투명하지 않은 돈이 필요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사인하고 한 달 뒤에 사고를 당하셨으니, 그 돈은 받아보지도 못하셨잖아.
“실제로 한 달에 1만 골드씩은 모리츠가 다 받아 챙겼겠군.”
끔뻑.
얼른 감았다가 뜨는 팔커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수수료 받은 값을 하라고 말하고 싶으면, 모리츠를 찾아가.”
“그, 그렇지만…. 여기 선명한 사인이….”
“노예 상인 팔커, 디아머드에서 노예는 금지야. 그것만이 원칙이다.”
“아니, 여기 사인이….”
“당장 장사를 걷지 않으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
끄응. 팔커가 앓는 소리를 내더니 입술을 앙다물었다.
“금지는 무슨 금지. 우리를 허가한 게 가주님의 아버지라니까!”
산샤를 똑바로 보는 눈은 번들번들 추하게 번뜩였다.
“이런 식으로 우리를 떼어 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으면 오산이지. 어마어마하게 큰 착각을 하신 거라고.”
그러더니 홱, 계약서를 들어 보였다.
“여기 선명한 사인을 보세요. 로베르트 디아머드 백작의 사인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백작의 허락을 받고 합법적으로 장사해 오고 있단 말이지요.”
“합법이라는 의미를 모르는 것 같은데…. 법으로 노예를 허락한 적은 없어.”
“어…?”
“계약서 문구도 봐. 장사하는데 편의를 돌봐준다고 했지, 무슨 장사인지도 쓰지 않았군. 디아머드에서 노예장사는 여전히 불법이다.”
산샤는 팔커를 노려봤다.
“불법인 장사에는 설령 황제의 사인이 있다고 해도, 불법이야.
“산샤 디아머드! 내가 왜 혼자 왔는지 알아?”
팔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야비하게 속삭였다.
“정의니 뭐니 떠들던 당신네 가문이 한 짓을 봐. 뒷구멍으로 노예 상인에게 수수료를 챙겨 왔잖아.
당신 아버지의 명예는 뭐가 되겠어? 뭐 이제라도 까발려 볼까?”
이게 본색이로군.
산샤는 똑바로 팔커를 보고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디아머드에서 노예는 금지야. 그 윈칙은 흔들리지 않아.”
* * *
“그 자리에서 얼마나 떨리고 무서웠는지 알아요? 팔커는 쫓겨나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
‘산샤 디아머드 후회할 거다. 후회하게 해줄 거야.’ …내가 후회하게 될까?”
이야기를 끝낸 산샤가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아드리안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그래서 팔커를 베어 버리겠다는 거예요?”
“당장은 아버지의 사인부터 없애야겠어요.”
“어떻게? 팔커가 챙겨갔다면서?”
“그러니까….”
“…설마 훔치러 가겠다고?”
산샤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당연하죠.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말은 퍼지기 쉬운 법이잖아요. 그러니까 내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달라는 거죠. 일이 터지면 내 한 몸 지킬 정도는 되는지….”
“레이디….”
말투만으로 알겠다.
뒷말은 하지 못하게 산샤는 얼른 제 손으로 아드리안의 입을 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요. 그 말은 건너뛰도록 하죠.”
아드리안이 산샤의 손을 잡아서 떼어냈다. 기가 막힌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제라도 열심히 해요. 언젠가는 사람을 벨 수 있게 되고, 자신을 지킬 수 있겠지.”
“안 돼요. 당장 가야 해.”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쪽이 준비가 안 되었으면 저쪽도 안 되었을 테고…, 이쪽이 준비가 다 되었으면 저쪽도 그럴 테지. 팔커가 준비할 시간 없이 쳐야죠.”
풉, 이젠 헛웃음 정도가 아니다.
아드리안이 얼굴이 환하게 빛나도록 크게 웃었다.
한참 웃더니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나랑 같이 가요.”
“혼자 가야 한다니까.”
“누구도 데려갈 수 없는 건, 로베르트 백작의 문제를 아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건데, 나는 벌써 알아버렸잖아.”
“아….”
“또 나는 레이디의 검술 선생이기도 하고, …당연히 같이 가야지.”
“그러네. 당연한 거네.”
산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마음이 통통 뛰어오를 정도로 좋았다.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같이 가겠다는 말을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그게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요?”
“팔커의 사무실에 있겠죠.”
“팔커의 사무실은 어디에 있는데?”
“어?”
산샤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데,
아드리안의 산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요.”
“예?”
“팔커를 치기 전에 나와 같이 갈 데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