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47화 (47/97)

47화

탁!

움찔!

아드리안이 감시구를 닫는 소리가 심상치 않아서 루카는 조심스럽게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감정이라고는 터럭만큼도 내비치지 않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닐스 미켈이 산샤에게 수작을 걸다가 두들겨 맞았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저 얼굴이다.

그 닐스 미켈이 지금 아델라이드에 있다.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얌전히 호텔 방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는지, 아델라이드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콘스탄틴을 찾아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아델라이드에 없는 술의 상표를 말하며 내오라는 등 제대로 진상을 떨고 있었다.

홀에 있는 여자 손님들에게 천박한 농담을 하며 희롱도 했는데, 귀족 여성은 건드리지 않는 묘기도 보였다.

이마에 ‘귀족’이라고 써 붙인 게 아닌데도, 귀족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기술이 있는 것 같았다.

전하의 심정은 얼마나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인가.

“전하, 콘스탄틴이 곧 올 겁니다. 와서 싹 다 정리할 거예요. 그러니 조금만 참으시면….”

말을 하다 말고 루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아델라이드에 오시라고 말을 해서는….

기분 전환이나 할 겸 나오시게 했던 건데….

그랬는데, 보람도 없이 저 꼴을 보게 하다니.

“그냥 보지 마세요. 프라이빗룸으로 올라가 계시면 좋겠어요. 콘스탄틴이 오자마자 올려 보낼게요.”

아드리안이 투명하고 말갛게 루카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감당하기가 부담스러워 루카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렸다.

저렇게 보는 건 십수 년이 지나도록 적응이 안 된다.

“그렇게 보시지는 마시고요. 무섭습니다. 전하는 눈이 무기라고 말씀드렸었잖아요. 무기를 함부로 휘두르시면 되겠습니까?”

“무섭다면서 할 말을 꼬박꼬박 잘도 하지.”

“무서우니까 말이라도 해야죠. 말도 못 하면 심장이 짜부라져서 죽습니다.”

어라? 눈을 꼭 감은 채로 달랑달랑 말대답을 했는데, 다음 말이 오지 않는다.

‘쳐다본다고 심장이 짜부라졌으면 너는 대체 목숨이 몇 개인 거냐?’

이러셔야 할 분이 왜 이리 조용해?

눈을 떴더니 사람이 옆에 없어.

루카는 급하게 감시구를 열어 눈을 들이댔다.

“아악! 저러시면 안 되는데….”

아드리안이 닐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닐스가 질척거리고 있는 아가씨가 곧 울음을 터트릴 지경에 이르러, 아드리안을 보더니 울면서 웃었다.

닐스도 아드리안을 보고 새로운 사냥감이라도 본 듯 히죽 웃었다.

아가씨가 그 틈에 닐스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났고, 닐스는 거만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드리안이 닐스 앞에 섰다.

아드리안은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 짓더니 가볍게 묵례하는데, 닐스가 오만방자하게도 답인사도 하지 않고 뭐라고 지껄였다.

“어허, 저거….”

루카는 탄식했다.

“닐스 미켈, 저 인간…. 저러다 죽겠는데….”

천하의 못된 놈 닐스 미켈의 안위가 이렇게까지 걱정되기는 처음이었다.

* * *

“이거 봐, 영광이네. 소문으로만 듣던 클라이드의 아드리안이라니!”

닐스는 영광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목소리로 지껄이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제국 최고의 미녀라고 해도 비교할 수 없다더니, 그 말이 맞았네. 어마어마한 미모로군. 하긴 뭐…. 이런 장사를 하자면 그 정도는 미모는 되어야 할 테니까….”

닐스가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홀을 둘러보더니 아드리안을 보고 쩝 입맛을 다셨다.

“아름답다고 해주니 감사하나….”

아드리안이 피식 웃더니, 닐스에게 다가섰다.

“이 자리는 얼굴로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고는 거만하게 쩍 벌린 닐스의 다리를 가볍게 툭 쳤다.

“여러 사람이 오가는 길에 이런 자세라니…. 사고 나기 딱 좋겠군요.”

끄억!

닐스가 균형을 잃고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비명으로 해결 안 되는 것이 무너지는 몸이었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의자는 튀어 나가고 볼썽사납게 나뒹굴고 말았다.

“너,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닐스가 빨갛다 못해 시커메진 얼굴로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귀족에게 이런 무례를 범하다니. 디아머드에서는 귀족에게 무례를 범하는 자, 즉시 참수해도 된다고….”

“그런가요?”

아드리안이 유유히 웃으며 닐스에게 손을 내밀었고, 닐스는 정신 나간 것처럼 멍하니 아드리안의 손을 잡았다.

아드리안이 손에 약간의 힘을 주는 듯한 순간, 제 목을 움켜쥐고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아드리안은 닐스가 하는 꼴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미켈 남작은 사람들이 나를 왜 ‘클라이드의 아드리안’이라고 부르는지 모르는 모양이군요.”

“아윽….”

괴성을 내며 닐스가 양손으로 제 목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클라이드에서 나에게 무례를 범할 수 있는 자는 없어서, 클라이드의 아드리안입니다.”

“으아윽아…. 우아이….”

닐스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몇몇 남아 있던 손님들이 술렁술렁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눈으로만 무슨 일이냐고 서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사람은 없으니, 대답해줄 사람도 없었다.

그저 눈동자만 굴리고 있을 뿐.

손님들은 닐스가 고통을 당하는 건 기꺼웠다. 잠깐이나마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모른다.

아드리안이 닐스를 제압해주는 게 반가웠다.

그런데….

무슨 방법을 쓴 건지 궁금했다.

보기에 아드리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닐스는 혼자 왜 저러고 있을까.

저러다가 닐스 미켈이 죽을 것 같은데….

그때였다.

“어머어, 아드리안 경. 여기 계셨네요.”

콘스탄틴이었다.

아드리안이 콘스탄틴을 돌아본 순간 털썩!

닐스가 바닥에 처박혔고, 그대로 축 늘어져 정신을 잃어버렸다.

콘스탄틴이 아드리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요염하게 몸을 기댔다.

“아드리안 경도 참…. 하찮은 자에게 뭐 이러실 것까지 있겠어요?”

아드리안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에 입술 끝만 살짝 올린 미소를 보이더니,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아드리안에게 제대로 기대고 있던 콘스탄틴은 휘청 넘어질 뻔한 것을 얼른 달려와 잡아준 것은 루카였다.

“괜찮으세요? 레이디 콘스탄틴?”

콘스탄틴은 겨우 균형을 잡고, 어안이 벙벙해서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왜 저러시는 거예요? 무섭게.”

루카가 어색하게 웃었다.

“요즘 쫌 예민하셔서, 쫌 무섭죠.”

“쫌이 아닌데? 그건 그렇고….”

콘스탄틴은 닐스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뭘 했길래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놔?”

“저 인간이 레이디에게 무례를 범했거든요.”

“나? 나한테 뭐, 아무것도….”

루카의 애매모호한 표정을 보고 콘스탄틴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으응, 내가 아니구나. 남자라고는 모르는 그 레이디 말이구나?”

콘스탄틴은 늘어져 있는 닐스를 흘겨보며 쩝 입맛을 다셨다.

“이놈도 참, 세상 물정 모르는 레이디 하나 때문에 죽을 뻔하고….”

닐스를 슬쩍 발로 굴려보고는 이리저리 상처투성이인 것을 확인하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드리안 경을 예민하게 만들다니, 마성의 레이디이긴 하지만….”

그때였다.

닐스가 꿈틀 움직이더니, 혼절한 상태이면서도 중얼거렸다.

“산샤 디아머드. 내가 포기하나 봐라. 너는 기어이 내 거야.”

헐.

콘스탄틴과 루카가 서로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마성의 레이디가 확실하네. 이렇게 쥐어 터지고도 포기를 못 하겠대.”

“남자를 몰라도 마성은 가질 수 있나 봐요.”

루카도 진지하게 맞장구를 쳤다.

* * *

아드리안이 디아머드 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람같이 달려온 산샤가 물었다.

“아드리안, 내 검술이 어느 정도 수준이죠? 누굴 베어 버릴 정도는 되나?”

산샤의 질문은 지극히 진지했지만, 피식, 아드리안은 웃고 말았다.

반갑게 달려와서 하는 말이라니.

“딱 한 번 해보고 검술 수준을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천 번 내려치기를 하지 않고도 검 끝을 끊었잖아. 천재라서 그런 게 아닐까?”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산샤를 보자니, 확실히 당신은 검술 천재이더라고 말해줘야만 할 것 같지만….

그럴 리가 있나.

설령 천재라고 할지라도 검 한 번 들어보고 알 수는 없다.

아드리안은 말문이 막혔다.

아델라이드에서 그토록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며 사람 하나를 반쯤 죽여 놓고 왔는데.

그게 산샤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작 본인은 이렇게 해맑아.

이래도 되는 거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산샤 디아머드!

“왜요? 누구, 베어 버릴 사람이 생겼나?”

산샤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드리안을 뜯어봤다.

“어떻게 알았어요? 베어 버릴 사람이 생긴 거를….”

으응? 이번에는 아드리안도 놀랐다. 성을 비운 게 반나절도 안 되는데?

“물론 당장 베어 버리지는 않겠지만, 그럴 일이 곧 생길 것 같아요.”

“뭔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은 그림자들에게 의뢰를 하는 게….”

“아니요.”

산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당신 그림자에게 맡길 수 없어. 알게 해서도 안 돼.”

“…진심이군요?”

산샤가 정색하고 나섰다.

“당연히 진심이죠. 진심이 아닌 소리를 왜 하겠어요?”

“이게 어떻게 진심이 될 수 있지? 내가 자리 비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베어 버릴 누군가가 생겨? 그 사이에, 벌써?”

“무슨 그런 소리를. 어마어마한 일이 생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죠.”

* * *

아드리안이 아델라이드에 가고 없을 때.

클라이드 상인회 대표라는 작자가 찾아왔다.

“클라이드 상인회?”

“예에, 제가 상인회를 대표해서 온 팔커입니다.”

“클라이드에는 수호자가 있는데, 상인회가 따로 있다고? 진짜 정체가 무엇이냐?”

“수호자는 북부 사람들만 보호하지요. 저희는 디아머드 사람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왔어요.”

“외부라니?”

산샤는 눈썹을 치켜떴다.

노예 상인이구나!

저들이 먼저 찾아올 거라고 아드리안이 그랬는데, 그 말이 딱 맞았다.

산샤는 새삼스럽게 팔커를 상하좌우로 훑어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