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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46화 (46/97)

46화

삼나무 향은 아드리안의 향이었다.

처음 노예시장에서 안겼을 때 삼나무 향을 맡았다. 어쩌면 그 향 때문에 아드리안을 따라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뒤로도 계속 아드리안에게 안길 때마다 삼나무 향을 맡았다.

얼음 강물에서조차 향이 났던 것 같으니까.

산샤는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신음했다.

생각난다.

여기 이 아지트에서,

햇살이 부서지는 머리카락에 깊은 밤하늘 같은 눈동자를 한 소년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분해서 씩씩거리는 자신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눈을 빛내는 게 약이 올라 산샤는 더 씩씩댔다.

[산샤, 이제라도 어머니에게 잘못했다고 하는 게 어때? 네가 먼저 반성하기를 기다리고 계실 텐데.]

[반성할 거 없거든.]

[그러게. 문으로 다니라고 했잖아. 굳이 홈통을 타고 창문으로 넘어 다녀.]

[홈통 타는 게 쉬우니까, 거기로 가는 게 제일 빠르니까.]

정원에서 처음 소년을 발견하고, 해님을 잡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홈통을 탔다.

돌아갔다가 놓칠까 봐서 마음이 급했으니까.

산샤는 자신이 홈통을 잘 탄다는 것을 알고는 신이 났다.

홈통은 소년과 자신을 잇는 특별한 통로 같았다.

그러다가 어머니에게 들켜 버렸고, 외출 금지를 당해 버렸다.

방에서 나오지 말고 근신하라고 하셨는데, 그 기간이 무려 사흘이나 되었다.

다시 또 홈통을 탔고 소년의 손을 잡고 아지트로 도망 왔다.

산샤로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던진 탈주였는데, 소년은 계속 웃기만 했다.

그래서 산샤는 분했다.

사흘이나 못 보는 게 소년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왜 계속 웃기만 해? 이게 다 너 때문에 생긴 일인데.]

산샤가 심통을 부려도 소년은 웃기만 했다.

흥, 산샤는 콧방귀를 뀌고 돌아앉았다.

아니, 돌아앉으려고 했다.

둘이서 앉아 있으면 꽉 차버리는 공간이라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지만.

[여기 있으면 아무도 못 찾을 거야. 나는 여기에서 자고 먹고 다 할 거니까. 너는 갈 테면 가버려.]

가랬더니, 소년은 팔을 둘러 산샤의 어깨를 안았다.

[너만 두고 가긴 어딜 가. 나도 너랑 같이 여기에서 자고 먹고 다 할 거야.]

그걸로 분했던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더 씩씩댈 수도 없고, 가버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산샤도 웃었고, 두 팔로 소년을 꼭 껴안으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삼나무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둘이 꼭 껴안고 밤을 지새웠던가.

새벽에 어머니에게 발각되었었나.

그래서 사흘 근신이 일주일 근신이 되어 버렸었나 보다.

[그때는 천방지축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이제 막 눈을 뜬 사랑이 마냥 아름다웠죠.]

아드리안이 모리츠에게 했던 말이 사실이었다.

아드리안이었구나.

나무 벽 여기저기 칼로 새겨진 것은 온통 아드리안의 이름과 하트였다.

어린 산샤가 한 게 분명했다.

산샤는 그 자국을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이토록 좋아했었구나.

그렇지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의 장면은 떠오르지만, 그 순간의 감정은 전혀 모르겠다.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보는 느낌일 뿐.

* * *

산샤의 집무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빼꼼히 들여다보는 건 자크였다.

“가주님,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아, 자크…!”

드디어 자크가 왔다.

산샤는 벌떡 일어서서 반갑게 자크를 맞이했다.

같이 있던 아니타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산샤와 자크를 번갈아 볼 정도였다.

자크는 산샤가 권하는 의자에 얌전히 앉더니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려놨다.

아니타가 종이를 내려다봤다가 산샤를 바라봤다.

“이게 뭔데요?”

“자크가 설명해 줄 거야.”

자크가 눈을 껌뻑거리며 궁리하더니 입을 열었다.

“…가주님께서 한스 단장에게 맡기셨다고, 저에게 전해주라고 하셨다더군요.”

“그러니까 뭐냐고요.”

“사법관을 모집한다는 공고문입니다.”

산샤는 입술을 손으로 꾹 눌렀다.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일 뻔했다. 고작 자크가 글씨를 안다는 것뿐인데….

아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사법관 모집…. 그게 자크 경한테까지 갔군요.”

“…사법관을 왜 모집하십니까? 디아머드에는 아직 임기가 1년 남은 사법관이 있지 않습니까?”

쩝, 이번에도 아니타가 대답했다.

“없어요. 멀쩡하게 잘 있던 사법관을 우리 아가씨가 시원하게 쫓아내 버렸거든요.”

자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일을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산샤는 하늘로 막 올라붙으려는 입술을 가리고 물었다.

“사법관이 일을 잘못한다고 생각했었어?”

“그건 그렇죠. 디아머드에 엄연히 법이 있는데 귀족들이 사적으로 백성들을 단죄해도 그냥 두고.

세금을 제멋대로 거두는 것도 내버려 두고요. 백성이 살기 힘들어지면 북부 지역이 쇠락해지는데, 나 몰라라 하고 있었죠.”

역시 자크다.

기사단이 모두 입 다물고 있을 때 적극적으로 막심을 변호해 줄 때 이미 알아봤다.

“응, 맞아. 자크가 말한 그런 이유로 해고했어. 제대로 일할 사람을 다시 뽑으려고.”

“그런데 왜 이걸 저에게 전해주라고 하셨습니까?”

자크가 여전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데, 산샤는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디아머드에 사법관을 채용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왜 저에게?”

“자크라면 훌륭한 사법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예…?”

자크는 입은 벌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한참 망설이다가 겨우 말한 건,

“사법관은 자격증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산샤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자크가 자격증을 따 줘야지.”

“…자격증을 따려면 엄청나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공부한다고 다 붙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붙는 사람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던데요.”

“그래. 그렇다더라. 해고당한 사법관도 9번에야 붙었대.”

“그분은 공부만 하며 살았을 텐데도 9번인데…. 제가 어떻게 자격증을 딸 수 있겠습니까?”

“자크는 훌륭한 사람이잖아.”

“예?”

“얀이 당장 잡아먹을 것처럼 난리를 쳐도, 해야 할 말을 정확하게 하는 사람이었지.”

“제가요?”

“칼이 날아다녀도 꿈쩍도 하지 않고, 버텨야 할 곳에서 버텼어.”

“제가 그랬나요?”

“공명정대하고 용감해. 자크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법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기 공고문에 보면 시한이 겨울이 시작되는 달까지인데…. 겨우 석 달입니다. 그 안에 될 리가….”

“뭘 해도 검술보다는 낫지 않겠어?”

“…검…술 말입니까?”

“아무리 전쟁 없는 평화 시국이라지만, 기사가 검을 쓰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렇지만 자크는 검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검 대신 제대로 쓸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자크가 이번에도 입을 벌리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술을 연마하겠다는 마음가짐이면 석 달 안에 사법관 자격증을 따는 건 무리 없을 것 같은데….”

자크는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도 연병장 구석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다 온 자크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못하는 애는 처음 봤다고, 몸 쓰는 일이 영 젬병이라고, 신나서 떠들고 다니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굳이 한스가 떠들지 않더라도, 자신이 한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내가 자크에게 사법관이 되어 달라고 하는 건, 검을 못 쓰기 때문은 아니야. 자크에게서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야.”

“가…능성입니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잘못된 것은 정확하게 짚고야 마는 용기는 사법관이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거든. 자크는 바로 그걸 해낸 사람이니까.”

“그, 그런가요?”

“논리 정연한 언변. 게다가 신뢰감이 팍팍 생기는 외모까지, 자크가 아니면 대체 누가 사법관이 되겠어? …자크야말로 사법관이 되어야만 해.”

“그럴까요?”

자크가 산샤의 열정에 감화되어 공고문을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장하게 보고 있던 산샤가 말했다.

“나는 알고 보니까 검술에 재능이 있더라.”

“가주님이요?”

“내가 검술 천재일 걸 누가 상상이나 해봤겠어? 그렇지만 천 번은 해야 된다는 걸, 딱 절반 오백 번으로 이뤄버린 거야.

누구나 그런 천재성이 있다고 생각해. 자크의 천재성은 법전에 있는 거지.”

마침내 자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그래요.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물론이지.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잖아. 자크는 검보다는 법전이 훨씬 잘 어울려.”

자크가 공고문을 움켜쥐었다.

“석 달! 역사를 이루기에 짧다면 짧지만 넉넉하다면 또 얼마든지 넉넉한 시간이지요.”

산샤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크가 해줘야만 해.”

“자격증을 따오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결의를 다지는 자크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공고문을 움켜쥔 주먹이 검을 쥐었을 때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럼 저는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한시가 아까워서요.”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자크는 벌써 문밖으로 달려 나가고 없었다.

“어머나, 세상에!”

아니타가 입을 틀어막고 산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왜?”

“자크에게 최면이라도 거신 거예요? 갑자기 사람이…. 눈빛이 달라지네요.”

“의지가 강하니까….”

“아니죠, 아니에요.”

아니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가주님이 사기꾼 기질이 있으신 거 같아요.”

“뭐?”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꼴딱 속여 넘겨 버리냐.”

“자크는 할 수 있어.”

산샤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까지 속여 넘기실 건 없고요.”

“아니타!”

되도록 근엄하게 부르자 아니타가 갑자기 손을 마주쳤다.

“아, 맞다! 아까 아드리안 경을 찾아오라고 하셨죠?”

“내가?”

“제가 얼른 가서 아드리안 경을 찾아오겠습니다.”

언제 찾아오랬다고.

괜히 야단맞기 싫으니까.

“아니타!”

두 번째 이름을 부르자, 벌써 복도로 절반쯤 나갔던 아니타가 돌아왔다.

예전 같았으면 산샤가 부르든지 말든지 진작에 뛰어나가 이미 성을 두어 바퀴 돌았겠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는 형편이니까.

산샤는 보던 서류로 눈을 돌리고 말했다.

“아드리안은 아델라이드에 일이 있다고 했어. 끝나면 올 거야.”

“아…. 알고 계셨구나. 그럼 오랜만에 아델라이드에 모시러 가는 건 어때요?”

“수선 떨 거 없어. 하던 대로 하면 돼. 그러면 아드리안은 돌아 와.”

아니타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주인을 바라봤다.

별 뜻 아닌 말을 하는데 엄청난 뜻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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