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산샤는 한숨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꾸욱 눌러 참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꽁꽁 묶어놨다더니, 묶은 게 아니라, 감아놨잖아.
밧줄로 돌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아서 침대에 걸쳐 놓고 꿈뻑거리는 눈만 내놨으니….
딱 나와 있는 눈만으로 본인이 얼마나 창피해하는지 너무 잘 보여서 차마 한심한 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
오랜 기간 자신들의 단장이었던 자를 감옥에 가두기는 곤란하다고 하길래 인정해줬더니, 이게 뭐냐.
차라리 감옥에 가두는 것이 얀의 자존심을 보존해주는 일이 아니었겠냐.
산샤는 얀이 걸쳐진 침대에서 많이 떨어진 곳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조금만 풀어 줄까?”
“안 됩니다!”
조용한 명령에 고함치듯 거부하는 한스 때문에 산샤는 기겁했다.
한스는 거침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자유를 줬다가는 난리가 납니다. 기사단 모두 와서 붙들고 있어야 한다니까요.
저희도 나름대로 업무가 있는 사람들인데, 얀 단장만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소리 한번 시원하게 내지르는구나.
한스는 얀은 한심하고 산샤는 난감하다는 듯이 훑어보고 불만스럽게 입을 삐쭉였다.
묶어 놓으니 그저 물건으로 보이는 건가. 조금이라도 얀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은 사람은 산샤 하나뿐인 것 같았다.
“입에 물린 재갈은 풀어 줘.”
“…듣지 못할 상스러운 말은 다 한다니까요.”
“그래도 입은 열어 줘야 나랑 대화를 할 수 있잖아.”
“하아…, 꼭 그 대화라는 거를 하셔야겠습니까?”
“대화를 안 할 거면, 이 자리에 왜 앉아 있겠어?”
“무슨 소리를 해도 저는 모릅니다?”
“네가 알아야 할 건 없으니 재갈을 풀어.”
산샤는 바쁘게 굴러가는 얀의 눈동자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얀만 알면 된다. 조금이라도 덜 묶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으으음….”
고개도 끄덕일 수 없는 얀이 아마도 동의하는 소리를 냈다.
‘봤지?’ 하는 산샤의 눈짓에 한스는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얀의 입을 감아놓은 밧줄을 풀고 재갈을 빼냈다.
그러고 손을 떼려고 하자, 산샤는 말했다.
“얼굴 쪽은 풀어 줘.”
얼굴이 다 드러나자,
“휴우….”
얀이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잡아먹을 듯 한스를 노려봤다.
“이 자식아, 작작 좀 해야지.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숨 쉴 구멍은 남겨놨는데 무슨….”
“뭐 어째?”
여전히 사나운 눈이기는 했지만, 얀은 산샤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딴에는 자중하는 것 같았다.
산샤가 조용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얀에게 제안을 하러 왔어.”
“제안이라뇨?”
반문한 것은 한스였다.
“가주님이 제안할 게 뭐가 있습니까? 가주님에게 칼을 들이댄 것만으로도 사형 아니면 추방인데요.”
한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얀이 한시라도 빨리 디아머드를 떠나주는 게 좋겠지. 그래야 자신의 단장 자리가 고정될 테니까.
그렇지만 눈동자만 굴리면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얀은 무슨 마음일까?
산샤는 얀에게 모리츠의 악행을 증언하게 할 셈이었다.
모리츠는 디아머드 성을 장악하면서 고용인부터 갈아치웠다.
집사, 하녀장, 정원사가 살해당한 게 표가 나지 않은 것도 고용인이 모두 물갈이되는 중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모리츠가 후견인이 되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백작 성에 있었던 딱 한 명, 얀이었다.
모리츠에게 줄을 서서 막심을 몰아낸 얀.
집사, 하녀장, 정원사가 살해당한 건 몰랐을까?
무엇보다 모리츠가 혼자서 그들을 죽이는 게 가능했을까?
산샤는 얀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얀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
실룩 얀의 얼굴 근육이 움직였다.
그러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래도 얼마든지 기다려 줄 참이었는데, 한스가 또 떠들고 나섰다.
“무슨 그런 앞뒤 뚝 잘라먹은 말이 다 있어요? 얀 단장이 알긴 뭘 알아요?”
“얀에게 물어본 거잖아. 한스는 좀! …가만히 있어.”
“대답을 안 할 게 뻔하니까요. 입 다물고 있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거죠.”
“알고 모르고는 얀이 아는 거지. 얀이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모른다니까요. 몰라요. 뭔지 몰라도 아무것도 몰라.”
그때 얀이 걸걸한 목소리로 툭 끼어들었다.
“알면요?”
산샤와 한스가 동시에 얀을 돌아봤다.
멀뚱멀뚱하게 보고 있는 얀은 샨사가 무엇을 묻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일단 들어야지.”
“들어서 뭐 하게?”
“알고. 증거를 갖춰서 법정에 세워야지.”
흥, 얀이 대차게 콧방귀를 꼈다.
“의심스러우면 그냥 목을 따버려요. 듣기는 뭘 들어.”
“딸 때 따더라도 짐작만으론 할 수 없잖아.”
“왜 없어요? 그럴 힘이 충분히 있는데? 강한 놈이 살아남는 세상이야. 내가 안 따면 따이게 되는 세상이라고.”
산샤는 말문이 막혔다.
자기라고 그러고 싶지 않았을까.
얀의 말대로 무조건 밀고 들어가 따버리는 게 가장 간단하고 가능한 방법인걸.
이제 와 증거를 모은다느니, 법정에 세운다느니 하다가 모리츠만 좋은 일 시킬 수도 있는데….
“그렇지만…. 얀이 그런 경우에 처했다고 생각해 봐.”
“생각을 왜 하냐고요. 그냥 딴다니까.”
“따이는 경우라고 생각하란 말이야. 아무도 얀이 결백한지 어떤지 관심도 안 보여주고, 얀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는 걸 생각하라고.”
“그건 또 왜 생각한대? 그냥 혀 깨물고 콱 죽어버리지.”
“내가 정당한 대우를 받고 싶으면 남한테도 그래야 하는 거니까…. 그게 디아머드 정의잖아.”
얀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확 입을 벌렸지만,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산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해 봐. 얀만 알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뻐금뻐끔 붕어처럼 움직이던 얀이 입술을 꾹 붙였다.
“무조건 따버리기부터 할 거면, 네가 가장 먼저 당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보고.”
끄응, 얀이 앓는 소리를 내며 외면했고.
오락가락 산샤와 얀을 번갈아 보던 한스가 물었다.
“둘이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 * *
연무장 구석진 곳에서는 오늘도 땀을 뻘뻘 흘리며 자크가 검을 들고 내려치고 있었다.
산샤는 이번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자크는 한결같구나.”
한스가 불틍스럽게 대꾸했다.
“쟤는 텄어요. 가주님이 좀 말려 봐요. 우리는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들어 먹어요.”
“왜 안 들어?”
“뭐, 제가 기사 되는 걸 고깝게 봐서 말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래도 웬만해야지. 저게 뭡니까, 저게.”
“그러게.”
산샤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자크의 검술은 엉망이었으니까.
자신이 검술이라고는 몰랐을 때도 난삽해 보이더니, 천 번 내려치기에 끊어치기까지 해 본 사람으로서 자크에게 검은 절대 아닌 것 같았다.
“자크에게 잘 맞는 일을 찾아줘야겠네. 자신도 잘하고 의미도 있는 걸로.”
“제발입니다, 제발요.”
산샤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한스에게 내밀었다.
“이걸, 자크에게 전해 줘.”
한스는 종이를 펼쳐서 빤히 보더니 물었다.
“이게 뭡니까?”
보지만 읽지는 못하는구나.
기사 중에도 글씨를 못 읽는 자들은 흔했고, 그러니 물론 자크도 글씨를 못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 잘 맞는 일을 찾아주겠다는 계획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자크에게 물어봐. 이 종이에 뭐라고 적혔는지.”
한스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멀리에 있는 자크를 흘겨봤다.
“자크가 이걸 읽을 수 있다고요?”
“못 읽으면 불쏘시개로 쓰든가….”
* * *
오늘의 세 번째 방문지는 자객에게 습격당했던 정원.
아드리안의 그림자들이 자객을 잡았다는데, 그 뒤로 어찌 되었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
들을 수 없는 형편이기는 했다.
공포의 천 번 내려치기와 닐스 잡기를 치러 내야 했으니.
지금으로서는 아드리안의 설명을 기대하기도 곤란했다.
아드리안이 기분이 아주 안 좋단 말이지.
기분이 나쁜 건 알겠는데 왜 나빠졌는지 모르겠고.
건드리기 곤란해서 피했더니, 이젠 어디에 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델라이드에 볼일이 있다고 했던가.
그러니 혼자서라도 어쩌다 그런 일을 당했는지 분석해 볼 필요가 있었다.
“와, 멀리도 나왔네.”
사건이 있었던 곳은 성의 가장 외곽에 있는 정원이었다.
성 밖인지 성안인지 구분하기도 모호한 곳.
“그 새벽에 뭐 볼 거 있다고 여기까지 나와서는….”
근데 여기까지 달려와서 구해 준 사람도 있었다.
순간 아드리안의 체취가 훅 끼쳐오던 순간이 생각나서 확 얼굴이 달아올랐다.
목덜미에서 시작된 열이 머리끝까지 오르더니 어질어질했다.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냐? 걱정될 정도였다.
그의 품에 답삭답삭 안기기를 도대체 몇 번인지….
안길 때는 당연한 듯이, 그 자리가 내 자리인 것처럼 안겨 있다가 지나고 나면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
뭐 하자는 건지.
산샤는 제 뺨을 찰싹찰싹 가볍게 때리며 머리까지 흔들었다.
“이러면 안 된다. 정신 차려야지. 정신 차리고 분석해야지.”
자신이 서 있던 곳에서 무언지 모르는 물체가 날아온 곳이 저쪽.
아드리안이 쳐내서 물체가 날아간 곳은 이쪽.
먼저 이쪽으로 가 봤다.
이리저리 쓸린 자국이 있는 걸 보면 아드리안의 그림자들이 벌써 수색을 한 것 같았다.
“뒤져도 아무 소용 없으려나.”
그냥 돌아서려는데 문득 반짝, 빛나는 작은 것이 보였다.
달려가서 봤더니, 금화 한 닢.
일단 금화를 주워들었다.
그렇지만 정원에서 웬 금화?
설마 자객이 금화를 던졌을 리는 없고.
이번에는 물체가 날아왔던 곳, 자객이 숨어 있었던 곳으로 갔다.
“아…!”
산샤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자신만의 아지트.
어릴 때 아버지에겐 큰 소리 한 번 들은 적이 없었지만, 어머니에게는 간혹 야단맞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와서 숨어 있던 곳이었다.
몇백 년쯤 나이를 먹은 나무라는데, 나무 안쪽에 구멍이 뻥 뚫려 있어서 웅크리고 들어가 있기에 딱 좋았었다.
자객이 이 구멍 안에 숨어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여자이거나 아이였을 것 같다. 몸집이 크면 들어가기가 힘들 테니.
산샤는 무릎걸음으로 나무 구멍으로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구멍이 더 커졌나?
전엔 굉장히 비좁았던 느낌이 있는데….
산샤는 추억에 젖어 나무 벽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나무 벽 여기저기 칼로 새긴 자국들이 보였다.
어릴 땐 이러고 놀았던가.
뭐라고 쓴 거야.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향긋하면서 상쾌한 삼나무 향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안온했고, 무엇인지 그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을 감고 향에 취해가던 산샤는 갑자기 번쩍, 눈을 떴다.
마치 번개에 맞은 것처럼 부르르 몸이 떨렸다.
뭐?
안온하고 그리운 삼나무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