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휙.
탁.
턱.
털썩.
닐스가 바닥에 나동그라져 버렸고, 산샤의 손에는 아침 단련에 썼던 목검이 쥐어져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닐스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데 산샤는 그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다.
“끄아악!”
닐스가 괴성을 지르더니 축 처져 버렸다.
“너의 코를 깬 게 누구였는지 잊어버리면 곤란하지, 닐스 미켈.”
“컥, 커억.”
닐스는 온전한 단어를 만들지 못한 채 괴성만 뱉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네가 나를 겁탈하면 내가 왜 너한테 시집을 가니? 너를 죽여 버리지.”
“크으윽!”
“당장 내 앞에서 꺼져. 진짜 허리를 분질러 버리기 전에.”
* * *
닐스를 보며 아니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닐스가 잡아먹을 듯 노려봤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두 발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운반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힘들어 보였다.
제 발로 움직여 나가지 못하면 계곡에 내다 버리라는 산샤의 말이 없었다면, 걸어 나갈 생각도 못 했을 터였다.
어기적어기적 겨우 움직이는 닐스를 안내하며 아니타는 몇 번이나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으이그, 어쩌면 세상에…. 제 복을 차도 분수가 있지. 귀족들이라고 머리가 좋은 건 아닌가 봐요?”
“너, 이 하녀….”
가쁜 숨을 내쉬며 닐스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 가는 소리에 아니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닐스를 돌아봤다.
“이가 남아 있었나 보네요?”
“뭐?”
“이야…. 싹 다 부러뜨려 버린 줄 알았더니…. 우리 아가씨가 마음이 따뜻하기는 하셔. 그걸 남겨 주셨네.”
“…조용히 해라, 건방진 것.”
닐스가 헐떡이면서도 으르렁거리자 아니타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요. 나는 원래 건방진 하녀이고요. 그런데 그쪽 나리는…. 어떻게 감히 우리 아가씨를 그런 식으로 협박할 생각을 했을까요? 벌써 한 번 얻어맞아 콧대도 깨져 봤으면서?”
“끄응.”
“그런 걸 보고 학습 능력이 없다고…. 우리 아가씨가 그러시던데 말이죠.”
“조용히 해라.”
“안타까워서 그래요, 내가. …조금만 참고 있었으면 반려가 될 수 있었는데….”
“뭐?”
“우리 가주님은 그쪽 분을 남편 후보로 생각하셨단 말이죠.”
닐스가 발걸음을 멈추고 아니타를 바라봤다. 눈을 크게 뜬 것 같았는데, 팅팅 부어 있어서 표가 나지는 않았다.
“정, 정말이냐?”
“정말이죠, 그럼. 뭐 한다고 거짓말을 하겠어요?”
“남편감으로 생각했으면서 사람을 이렇게 팬다고?”
“남편감으로 생각했는데, 얼마나 실망했으면 이렇게 팼겠어요? 그렇지만 뭐, …다 끝난 일이죠. 이 꼴을 당했으면 끝났다고 봐야죠.”
그리고 위아래 그리고 좌우로 훑어보더니 또 쯔쯔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런데 정말 끝났을까요? 여자의 마음이라는 게 오락가락해서 여자의 마음이기도 한 건데….”
“그, 그러면 어쩌라는 거냐.”
“방법을 찾아야죠. 우리 아가씨 마음을 한 번에 홱 낚아챌 방법을….”
“그,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하고?”
아니타가 히죽 웃었다.
“있긴 하지만, 공짜는 아니죠.”
“뭐?”
“금화는 언제나 좋은 정보를 물어오는 법이죠.”
“아….”
닐스는 깨달았다.
이 하녀가 모리츠가 말하던 아니타라는 그 하녀구나.
모리츠는 돈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아니타라는 하녀가 있다면서, 아니타를 먼저 매수해서 산샤를 공략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산샤가 자기를 가엾게 여기며 틈을 보이길래 돈을 아끼자는 생각에 먼저 덤벼들었던 건데….
“너, 이름이 아니타냐?”
“어머, 어떻게 아셨대요?”
역시 모리츠의 말이 맞았다.
그렇지만 이 하녀는 어떻게 믿는다? 아무리 그래도 산샤의 전담 하녀이면서 먼저 접근해 온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한데?
“너는 왜 나한테 그런 걸 알려주는 거지? 너의 주인을 배신하면서까지?”
“배신이라뇨?”
아니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없는 사실을 만들어 알리는 것도 아니고, 어디가 배신인가요?”
“네가 말하는 게 비밀 아니냐.”
“우리 아가씨 생각이 왜 비밀이겠어요? 그랬으면 혼자만 알고 입을 딱 닫았겠죠.”
“그러니까…. 아는 사람들끼리 비밀….”
“비밀이라는 건, 내 입에서 나간 그 순간부터 이미 비밀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대단한 논리다.
닐스는 아니타의 말에 완전히 설득당해 버렸다.
거기에 아니타가 덧붙였다.
“게다가 저는 사람에게는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배신이라는 걸 할 수 없습니다.”
“…그럼 넌 뭐에 충성하는데?”
“저는…. 일단은 우리 아가씨가 주는 급료에 충성하죠. 그런데 누가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준다? 어떻게 되겠어요?”
“더 많은 돈에 충성한다?”
“그렇지요. 아가씨한테 그렇게 사고 친 것치고는 제법 똑똑하시네요.”
닐스는 아니타를 바라보며 눈만 껌뻑거렸는데, 이런저런 계산을 하며 머리를 굴리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러다가 반짝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은근하게 아니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네가 이름이 아니타라고 했었나?”
* * *
산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뒤숭숭한지 모르겠다.
닐스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쫓아냈는데도, 어째 마음이 개운해지지가 않고 착잡하기만 했다.
아니, 솔직하자.
닐스 때문이 아니다. 아드리안 때문이지.
대체 무엇이 그렇게 아드리안을 화나게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지.
하아, 산샤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일은 안 하십니까? 종일 한숨만 쉬고 있을 거예요?”
“아니타?”
산샤는 새삼스럽게 아니타를 내려다봤다. 아니타가 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지?
“너, 왜 그러고 있어?”
“‘휘리릭 착’ 받으려고요.”
“휘리릭 착이 뭐야?”
“왜 이러세요, 정신 차리세요. 아가씨. 던지시라고요.”
아니타가 탁자 위에 있는 쌓인 서류를 가리키며 눈을 흘겼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일어나.”
산샤는 아니타를 흘겨봤고, 아니타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세요? 던지라는 서류는 안 던지고 한숨만 쉬면서….”
산샤는 서류를 슬쩍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만 볼래.”
“왜요? …신랑감 후보들이 그렇게 한심해요?”
“으응? 아니, 뭐….”
산샤는 대답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한심하기도 한심하지만, 그걸 보고 있는 자신도 한심했다.
닐스 말도 맞는 구석이 있는 게, 남편감은 이렇게 찾는 게 아닌 것 같다.
서류를 통해 알게 된 것이라고는 자신에게 청혼하겠다고 디아머드에 머무르고 있는 남자 중에 멀쩡한 놈은 하나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쩝, 아니타가 입맛을 다셨다.
“하긴, 뭐…. 황제쯤 되어야 아가씨보다 부자이려나…. 볼 게 없긴 하겠어요.”
“…내가 부잔데, 남편이 부자든 말든 큰 상관 없잖아.”
“부자는 부자일수록 좋죠. 뭘 몰라도 저렇게 모르실까. …그래서 안 던지신다고요?”
“안 던져. 싹 다 가져다 태워 버리라고 해.”
“그러세요, 그럼.”
아니타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산샤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아가씨 제 급료에 대해서 다시 의논을 좀 해보시죠.”
산샤는 당당하게 요구하는 아니타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닐스 미켈이 접근해 왔니?”
“아니, 그 양반은 아가씨한테 터질 줄이나 알지 접근할 줄을 모르던데요. 그래서 제가 먼저 접근했죠.”
“우…와!”
감탄스러워 절로 입이 벌어졌다.
“대단하구나, 아니타.”
“그럼 어떻게 합니까. 계곡에 버려진 뒤에 주머니를 뒤질 수도 없고요.”
“그러게. 사람이 그렇게까지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닐 줄은 몰랐다.”
애초에 산샤는 닐스가 아니타에게 접근할 거라고 생각했다. 정보를 얻어 작전을 짤 거라고.
그래서 아니타에게 미리 말을 해놓은 상태였다. 똥파리가 붙으면 자신에게 말하라고, 그러면 급료를 더 올려주겠다고
“닐스 미켈이 돌아간 지 한참 되었는데, 바로 보고하지는 않았구나.”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안겨주지 뭐겠어요. 자기편이 되어달라면서…. 계산을 때려봤죠. 아가씨가 급료를 얼마나 더 올려주실까.”
“그랬더니?”
“이 나라에서 황제 다음으로 부자이시니까요. 금화 주머니가 아무리 묵직한들 아가씨를 이기겠어요?”
“대단히 충성스럽구나, 아니타.”
아니타가 히죽 웃었다.
“그렇죠. 충성하면 또 저죠. 한 가지 좀….”
“으응?”
“앞으로 그 양반 돈을 못 챙기는 게, 좀 아쉽네요.”
“왜 못 챙겨? 받아.”
“안 되죠, 그거는 아가씨에 대한 정보를 물어다 주겠다는 약속인데….”
“물어다 줘.”
“예?”
“충실하게 정보를 물어다 주라고. 어차피 눈먼 돈인데 금화 주머니 따박따박 챙기고…. 그러라고 너의 급료를 올려줄 거니까.”
“예에….”
아니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째, 이거는…. 가주님이 꼭 제가 할 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너한테 배운 거지.”
산샤는 흡족하게 웃으며 계약서를 쓰기 시작했다.
“괜히…. 아가씨한테 안 좋은 걸 가르친 거 같은데….”
“아주 좋은 가르침이었어. …자, 잘 읽어보고 서명해.”
그러나 아니타는 움직이지 않고, 그저 산샤가 만들어 놓은 계약서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
산샤는 그제야 아니타가 글씨를 모른다는 게 생각나서,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계약서 내용을 읽어줬다.
내용은 간단했다.
[아니타는 산샤와 조율한 정보를 마음껏 팔 수 있다.
주급은 10골드로 인상한다.
아니타의 동생 7남매가 평민 아카데미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 추천서를 써준다.]
아니타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랗게 되었다.
“평민 아카데미요?”
“응, 평민이 다니는데도 귀족들이 추천서를 써줘야만 들어갈 수 있다더라.”
“동생들을 일곱 다요? 전부 다?”
“누군 보내주고 누군 안 보내주고 그럴 수는 없잖아.”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라, 아카데미를 어떻게….”
“너, 돈에 충성하는 게, 동생들을 위해 그런 거잖아. 가게라도 하나씩 장만해주려고….”
“그거는 그렇지요.”
“가게를 하더라도 기술이 있으면 더 좋을 거잖아.”
“그것도 그렇지요. 그렇지만 왜 이렇게까지 해주세요?”
“네가 제대로 충성할 수 있게 해주려는 거야. 너의 충성이 아깝지 않게. …서명할 거지?”
아니타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산샤가 가리키는 곳에 정성스럽게 하트를 그려 넣었다.
하트가 자신의 서명이라고 했다.
펜을 내려놓으며 아니타는 물었다.
“제가 뭐부터 하면 되나요?”
“특별히 따로 할 건 없어. 하던 대로만 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계약서까지 썼는데…. 당장 뭐라도 해야죠. 닐스 미켈 남작님을 속일 정보는 주려고 그러시는 거잖아요.”
과연 아니타! 눈치가 빨라.
“신랑 후보에 들어갔다는 걸 알려주면 어떨까?”
“어?”
아니타가 슬쩍 산샤를 피하더니 먼 곳을 바라봤다.
“그, 그건 말이지요. 그게….”
“벌써 말했구나?”
“주머니 한 개를 받았으니, 돈값을 해야 해서….”
“잘했어. 일단 그거면 돼. 닐스 미켈이 너를 믿게 두는 것.”
“그리고요?”
“작전이 있어. 네가 눈먼 돈을 다 챙기면서 모리츠까지 잡아넣을 수 있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