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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43화 (43/97)

43화

닐스를 만나러 집무실로 향하는 산샤는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된 것 같았다.

벌써부터 이 모양이니 오늘 하루는 얼마나 힘이 들까.

아니타가 열어준 문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더니, 닐스가 벌떡 일어서며 맞이했다.

“레이디!”

인사가 어찌나 요란스러운지 문고리를 잡고 있던 아니타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흘겨볼 정도였다.

산샤는 아니타에게 눈짓을 했다.

문을 닫으라고.

그렇지만 아니타는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타!”

부르는 소리에 아니타가 냉큼 받아쳤다.

“벌써 한 번 사고를 친 분인데, 어떻게 믿고 문을 닫습니까?”

“그 사고로….”

산샤는 며칠 지났는데도 여전히 시푸르둥둥한 닐스의 코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허튼짓을 했다간 어떻게 된다는 걸 확실히 아셨을 테니 괜찮아.”

닐스가 오른손으로 슬쩍 코를 감싸 쥐었다.

그래도 아니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그런 거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사람이 꼭 잊어버리고, 더 큰 사고를 치고 그러던데요.”

“그럼 이번에 허리를 분질러 버릴게.”

허업, 닐스가 기겁하며 왼손으로는 자신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코와 허리를 감싸 안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닐스가 칭얼거렸다.

“레이디, 제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하녀와 둘이서…. 그러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제가 옆에서 다 듣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요. 듣고 계시니까 하는 말이죠. 행동을 조심하라고….”

“어쩌면, 그런…. 이런 모욕을….”

닐스가 볼멘소리를 내는데 산샤는 모르는 척하고 아니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만 가라.

아니타가 으으응 고개를 휘저었다.

제발 그만 가라.

차라리 사고를 쳤으면 좋겠다고!

그제야 아니타가 입을 뚝 내밀더니 문을 닫았다.

문이 닫혔는데도 닐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오른손으로 코, 왼손으로는 허리를 감싼 채 서 있는 것이 말 못 하게 우스웠다.

정말 산샤에게 몇 대 얻어맞을까 봐서 벌벌 떠는 것처럼 보였다.

닐스 미켈,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이래서야 사고 칠 것을 기대할 수도 없겠다.

아드리안이나 아니타가 괜한 걱정을 했군.

“닐스 경?”

“예?”

닐스가 움찔 놀랐다.

“계속 그렇게 서 있기만 할 건가요?”

“예, …예?”

“긴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셔서 주위를 다 물렸는데요.”

“아…. 예…. 그렇군요. 예.”

닐스는 쭈뼛거리며 오른손과 왼손을 바로 놓더니 어설프나마 미소를 보였다.

“먼저, …첫 만남에서 안 좋았던 일들을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예, 무례하셨죠.”

산샤의 즉각적인 답변에 닐스가 흠칫 놀랐다.

감히 다음 말을 할 생각도 못 하고 눈치를 보는 것이 도리어 안쓰러울 정도였다.

산샤는 조금은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사과는 받아들이죠.”

산샤의 말에 닐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히죽 웃었다.

산샤도 불쌍한 마음에 웃어줬다.

그랬더니 쭈뼛거리고 머뭇거리며 가엾어 보이던 사람이 순식간에 여유만만하고 느글거리는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변화가 너무나 극적이라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아니타가 문을 닫지 않겠다고 버틸 때 그러라고 해야 했는데….

산샤는 천천히 문으로 돌아섰다.

빨리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으니까.

“사과하셨고 흔쾌히 받았으니…. 오늘 용무는 다 끝난 거죠?”

산샤는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려는데, 턱!

닐스가 문을 눌러 닫으며 말했다.

“아니죠. 본격적인 용무는 지금부터 시작이죠.”

“본격적인 용무…라니요?”

닐스가 웃어 보였다.

한 대 맞을까 봐 벌벌 떨던 닐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느물느물하게 여유만만한 닐스가 자리 잡았다.

가여워서 잠깐 틈을 보여준 게 이런 결과를 내다니.

닐스는 어느새 탁자 앞에 서서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이걸 보고 있었어요. 남편감을 서류로 찾다니, 그것, 참, 기발한 아이디어구나 생각했죠.”

“내려놔요.”

산샤가 나직하게 말했지만, 닐스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올려다보며 웃는 얼굴이 느끼했다, 비위 상할 정도로.

문고리를 잡은 김에 이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릴까.

아니면….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볼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산샤는 문고리를 놓고 돌아섰다.

“내려놓으라고 했어요. 당신이 봐도 되는 서류가 아니에요.”

그러나 닐스는 눈매를 초승달 모양으로 접으며 비릿하게 웃었고,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으으응, 그렇게 무섭게 말하지 말아요.”

그러고는 보란 듯이 서류 묶음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그렇지만 이건 잘못된 선택이에요. 이깟 종이로 뭘 하겠어요? 서류로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어? 어디 보자, 누구야. …소렌? 나, 이 사람 알아요.”

“내려놓으라니까.”

산샤는 한 번 더 경고했지만 그다지 강경하지 않았다.

닐스가 소렌에 대해 뭐라고 할지 궁금했으니까.

“조부가 광산사업을 벌이다가 쫄딱 망했지. 부친은 어떻게 유지했던 모양인데 소렌은 그럴 수완이 없어서, 지금은 완전 거지꼴일걸.”

닐스가 휘이익 휘파람을 불었다.

“루이즈. 어머니가 재산을 다 말아먹고도 아직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는데…. 어라, 이건 또 누구야, 엘리아드?”

닐스가 우습다는 듯이 산샤를 쳐다봤다.

“어떻게 죄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만 모아놨어? 이런 가난뱅이들하고 뭘 어쩌겠다고?”

“마정석 광산을 노리고 디아머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닐스 경처럼.”

움찔, 닐스가 산샤의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엘리아드는 사기를 당했어요. 마지막 한 푼까지 다 털어 넣고 거리에 나앉았지.”

“대단하군요. 어디에서 그런 걸 다 알았어요?”

“이래 봬도 내가 귀족들 사이의 소식통이거든. 쉬쉬거리면서 하는 이야기들이 있죠. 쉬쉬거리는 소문일수록 진실이기 마련이거든.”

닐스가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봐요, 레이디. 내가 말했던 건 서류에 하나도 안 나와 있죠? 멀쩡한 귀족 자제라고만 나왔을 거 아냐?”

서류를 읽어봤으면 저런 소리 못할 텐데… 이름만 읽고 말았나?

닐스는 입에 침을 발라 가며 술술 잘도 말했다.

“서류로 사람을 알 수는 없는 거예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워요. 이런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계속 이대로 마주 보고 있다가는 큰일 낼 것 같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대놓고 구역질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빨리 보내 버리기 위해서 산샤는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봤어요?”

“닐스 미켈. 내 거네?”

표지를 넘기자 잔뜩 멋을 부린 초상화가 나왔다.

닐스는 자신의 초상화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눈빛에서는 자기애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계속 초상화만 보고 있을 참인가요? 뭐라고 적혀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요?”

닐스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뭐, 뻔하죠. 미켈 백작 가문의 차남으로 남작위를 받았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닐스가 자신의 얼굴을 넘겨 버리는 게 내키지 않다는 듯 미적미적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러네. 그 이야기네. 내가 당신과 결혼하면 남작 위는 그대로 두고 백작위도 받아야겠어요. 그럼 내 작위는 두 개가 되는 거죠.”

“다음 장이나 넘겨 봐요.”

“그러죠, 뭐.”

훌쩍 페이지를 넘긴 닐스의 얼굴이 점점 조금씩 굳어졌다.

주먹을 꾹 쥐었다가 다음 장을 넘겼고, 다음부터는 빠르게 다음 장 또 다음 장을 넘겼다.

그렇게 넘기다 말고 닐스는 산샤를 봤다.

느글느글한 여유는 싹 사라지고 이글이글한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이, … 이게 대체 뭐야?”

“서류로 사람을 아는 방법.”

“…어, 어떻게 이런….”

“보니까 어때요? 당신이 디아머드 백작 가에 들어올 자격이 있나요?”

“이런 걸로 나를…. 내가 이런 삶을 살지 않았는데….”

“뭐라는 거예요? 알아듣게 말을 해 봐요.”

“이건 쌔빨간 거짓말입니다. 나는 이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어요.”

하하하, 산샤는 큰소리로 웃어 버렸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시뻘겋게 물든 닉스의 얼굴도 우스웠고, 음침하게 밑바닥에 깔려 있던 닐스의 오러가 정신없이 튀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이런 걸 어디에서 조사했나 모르겠지만,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진실인 것처럼 이렇게 적어두면 안 되잖아.”

“당신에 대해 이런 소문들이 돌긴 하나 봐요?”

“말했잖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만든 소문이라고!”

“그래요? 당신이 열심히 지껄였던 소렌, 루이즈, 엘리아드는 어떤가요? 당신의 모함인가?”

“그건 진짜 있는 이야기고!”

“그렇군요. 역시 쉬쉬거리는 소문일수록 진실이기 마련이군요.”

산샤는 슬쩍 입술로만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당신의 지고 있는 빚의 액수, 도박 중독, 하녀들…. 그게 다 진실인 거죠.”

산샤는 닐스에게 다가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 매캐하고 들쩍지근한 냄새는 에우포를 태운 냄새인가요?”

닐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입만 뻐끔뻐끔하고 있는 게, 약까지 들킬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에우포를 태우면 세상에 없는 용기를 얻게 된다더니…. 그 용기를 빌어서 여기 온 거군요?”

“그, 그걸 어떻게?”

“서류 마지막 장에 보면 당신이 에우포를 처음 접한 건 열여섯 살이었다고 적혀 있어요.”

“그, 그런 것까지….”

“그러니까요. 클라이드 수호자 집단의 정보가 필요 이상으로 정확해서 말이죠.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되고 마네.”

“야!”

버럭 소리를 지른 닐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이…. 이…. 잔인하고 야비한….”

“진짜 잔인하고 야비한 게 뭔지 모르나 봐요?”

산샤는 일부러 턱을 치켜들어 닐스를 눈 아래로 깔아봤다.

“더 쓰레기인 주제에 다른 사람들 문제만 크게 부풀려서 말한 당신이야말로 잔인하고 야비한 거지.”

“야! …이!”

닐스가 산샤의 팔을 확 낚아챘다.

“너, 돈 걱정 없는 집에서 태어난 복 많은 계집애. 계승자는 너 하나뿐이라 네가 백작위도 먹고 광산도 먹고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겠지.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부들부들 떠는 닐스의 손가락이 산샤의 팔에 파고들었다.

기운이 모두 손가락으로만 모인 듯, 뜨겁고 집요했다.

“너 지금 이 방에서 나한테 겁탈을 당하고 나면, 더럽혀진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꼼짝없이 나한테 시집와…. 커헉!”

닐스는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산샤에게는 아직 자유로운 팔과 주먹이 있었으니까.

“입조심해. 내 명예는 그따위 걸로 더럽혀지는 게 아니야.”

터진 입술 위로 산샤는 다시 주먹을 날렸다.

“아악!”

닐스의 코에서 피가 철철 쏟아졌다.

맞은 데 또 맞은 고통이 엄청난 것 같았다.

“너, 이 계집….”

얼굴에 피로 떡칠한 닐스가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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