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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42화 (42/97)

42화

산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이 부지런하기도 하지.

출근 도장을 찍을 것도 아닌데 왜 날마다 나타난담?

게다가 하필 지금, 아드리안의 상태가 아주 안 좋은 이때.

“아니, 레이디?”

닐스가 느물느물하게 다가오며 과도하게 깜짝 놀라는 척했다.

“이게 뭔가요? 혹시 검이에요?”

“보이는 대로 역시 검이죠. 오늘은 또 어쩐 일이죠?”

“긴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럼 그대로 돌아서 집무실에 가 있죠?”

멈칫, 닐스가 발걸음을 멈췄다.

“예? 집무실이요? 여기에서 해도 되는….”

“지금은 내가 아주 많이 엄청나게 바빠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어서요.”

“…뭐? 바쁘기는 왜? 뭐가…, 바쁘신가요, 레이디?”

“천 번 내려치기를 해야 하거든요.”

“천 번 내려치기요?”

산샤는 설명해주는 대신 자세를 잡았다. 어깨너비로 두 발을 버티고 서서 닐스를 향해 검을 겨눴다.

산샤가 자세를 잡자, 닐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슬쩍 뒤를 돌아봤다.

도망가고 싶을 거다.

그런데 닐스는 오히려 한 발 더 다가서며 가슴을 내밀고 물었다.

“천 번 내려치기가 뭔데요?”

굳이 알고 싶다면야!

산샤는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쐐액!

바람을 가른 검이 아슬아슬하게 닐스의 머리를 스쳐 어깨를 지나 명치 앞에서 딱 멈췄다.

검의 움직임은 산샤가 느끼기에도 위압적이었는데 닐스에게는 공포였던 모양이다.

숨도 크게 못 쉬고 눈도 깜빡 못 하는데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또로록 흘러내렸다.

산샤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게 검 내려치기예요. 이거를 천 번 연습하면, 그게 천 번 내려치기!”

닐스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걸 왜 해요? 굳이 레이디가 검술을 익힐 필요가 없잖아요.”

“무슨 그런 말을…. 검술 단련은 필수죠. 베어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닐스의 눈빛이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어째서? 무엇을요?”

쐐액!

이번에도 대답 대신 산샤의 검이 바람을 갈랐다.

또 검 끝이 닐스 명치 앞에서 딱 멈췄다.

흔들림 없이, 정확하게.

“이 손으로 직접, 제대로 벌을 내려야 할 사람이 많거든요.”

눈도 깜빡 못 하는 그대로 닐스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거기에서 계속 내 표적이 되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사사삭. 닐스가 잽싸게 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고는 그대로 홱 돌아서 부리나케 뛰어가 버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제대로 자세를 잡고 노려보던 산샤는 닐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외쳤다.

“봤어요? 검 끝이 딱 멈춘 거? 그게 검을 끊은 거죠? 그거 맞지?”

아드리안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렇게 흐지부지하게 말고. 확실하게 인정을 해야죠. 두 번이나 모리츠 명치 앞에서 딱 끊었잖아요.”

“그래요. 검을 제대로 끊은 걸 봤어요. 확실하게 인정해요.”

“하! 그거 별거 아니네. 미운 마음을 갖고 휘두르면 딱 끊어지는 거였네.”

“…그래요. 그것도 방법이 될 순 있죠.”

“좋았어! 오늘은 그만해요.”

산샤는 아드리안이 못마땅해하는 것을 알지만 모르는 것처럼 떠들었다.

“검을 끊을 수 있으면 천 번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오늘치 검술은 다 했네. 하, 하, 하.”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집무실에 가려고요?”

“가야죠.”

“닐스 미켈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을까요?”

“…으응?”

“틈만 있으면 무슨 짓이든 할 자인데?”

“모리츠가 들이밀었으니까…. 닐스 미켈을 통해 일을 꾸미고 있잖아요.”

“모리츠가 들이민 사람일수록 멀리해야 하지 않나?”

“모리츠를 잡을 미끼로 쓰는 거죠.”

“뭐?”

아드리안이 머뭇거리다가 겨우 물었다.

“…뭐라는 거예요, 지금?”

“닐스가 무슨 짓을 하면, 모리츠와 엮어 둘을 같이 잡겠다고요.”

“하아….”

아드리안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답답한 마음으로 심호흡으로 풀어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드리안이 손을 내리고 산샤를 똑바로 바라봤다.

“닐스 미켈이 무슨 짓을 할 것 같아요?”

“…죽이지는 않겠죠.”

“죽이지 않으면 그만인가?”

“살아 있기만 하면 뭐라도 할 수 있으니까.”

“산샤 디아머드!”

부르는 느낌이 매서웠다.

산샤는 바짝 긴장하여 아드리안을 쳐다봤다.

“자신을 귀하게 여겨요. 복수하겠다고 사지에 뛰어들 필요는 없잖아.”

자신을 바라보는 아드리안의 눈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산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렇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그저 그의 눈빛이 버겁기만 했다.

산샤는 그를 외면하고 들릴락 말락 하게 중얼거렸다.

“…손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아요.”

* * *

상처받았다.

아드리안은 산샤가 휘두른 검에 찔리고 베인 듯 쓰라렸다.

아버지가 자신을 학대할 때는 무심하게 얼마든지 당해줄 수 있었다.

병약한 어머니가 아버지를 원망하며 울 때도 감정의 흔들림 없이 의젓하게 위로할 수 있었다.

황후파와 황비파의 틈새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했다.

그들 중 누구도 아드리안을 흔들지 못했다.

그런데 산샤가 ‘보은’을 말한 순간, 뿌리까지 흔들려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보은이라니….

물론 로베르트 백작이 자신을 위해 했던 일에 감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보은이라니….

산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송두리째 부정당했다.

보은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한 것은 오직 산샤였다.

산샤만은 행복하게 웃으며 살아주기를 바라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는데….

보은이라고?

* * *

아드리안의 호출을 받고 달려온 루카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문을 연 순간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에 깜짝 놀랐고, 딱딱한 아드리안의 뒷모습에 두 번째 놀랐다.

화가 나셨구나, 우리 전하.

아무리 화가 나도 무심함이 더 무심해질 뿐이던 우리 전하가 이렇게까지 온몸으로 화를 발산하실 일이 무엇이었을까.

루카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고 아드리안을 불렀다.

“전하?”

아드리안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콘스탄틴은 어쩌고 있지?”

갑자기 왜 콘스탄틴은 물으실까?

“레이디 콘스탄틴이요?”

루카는 잠시 뜸을 들였다.

콘스탄틴이라면 닐스 미켈을 공략하는 중이었다.

멋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닐스가 여배우 콘스탄틴을 농락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콘스탄틴의 의도대로 잘 흘러가고 있다.

홀라당 빠져 정신을 못 차리게 작업하는 중이랄까.

곧 닐스를 꿀꺽 삼켜, 잘근잘근 씹어, 뼈만 남겨놓을 거다.

굳이 콘스탄틴의 일 진행을 물으시는 건 역시 그 놈팡이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시다는 거다.

그렇다면 역시 질투?

레이디 산샤 곁에 얼쩡거리는 놈들은 다 싫은 마음인가?

“레이디 콘스탄틴은 신나서 작업 중이죠. 나쁜 요소를 다 갖춘 놈은 오랜만이라면서, 종합 선물 세트를 받은 것 같다나….”

루카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르지 않으실 텐데, 왜 굳이 물으시는지?”

“시간이 없다. 빨리 진행해야 해.”

“하지만 이런 일은 충분히 뜸을 들여가며 움직여야 하지 않습니까. 괜히 서둘면 일을 그르치죠.”

“산샤가 자신을 미끼로 내놓고 닐스를 충동질할 모양이더군.”

“예?”

“콘스탄틴보다 산샤가 더 빨리 움직이겠지?”

“그, 그렇죠. 우리 레이디의 행동력이 어마무시하니까….”

루카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이드에 한 번 오셔야겠네요. 콘스탄틴도 만나시고, 정원에서 잡았던 놈 있잖습니까? 걔도 만나셔야겠어요.”

아드리안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루카가 불쑥 물었다.

“…그럼 질투가 아니었네요?”

“질투?”

아드리안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질투가 뭐지?”

“질투가 뭐냐…니요? 어머나!”

루카는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전하의 이 반응은 뭐람.

이거야말로 진짜 질투 아닌가.

질투가 아닌 게 아니라 질투가 맞았던 거였어.

루카는 얼른 다른 손으로 주책없이 솟구치려는 입 끝을 꽉 눌러 잡았다.

아드리안이 못마땅한 듯 루카를 흘겨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루카?”

“아무 생각도 안 합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

“아무 생각도 안 한다니까요.”

“보은하는 사람은 질투하지 않아.”

끔뻑끔뻑.

루카는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며 아드리안이 한 말을 되새겨 봤다.

그렇지만 아무리 끔뻑거려도 말의 의미를 모르겠다.

“보은이 뭡니까?”

“내가 자기를 돕는 게 보은이라더군.”

“아…!”

사랑을 보은이라고 오해당해서 기분이 상하셨구나, 우리 전하가.

사랑을 몰라주는 건 괜찮지만, 오해당하는 건 싫다는 건가?

“그렇지만 전하!”

루카는 아드리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불렀다.

“보은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뭐?”

“보은이 맞잖아요. 로베르트 백작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와 전하를 구했고, 황태자파를 규합하며 복위를 꾀했습니다. 그러다가 돌아가셨잖아요. 당연히 보은하셔야죠.”

순간 아드리안이 제대로 루카를 노려봤고, 머리가 꿰뚫리는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자기 마음을 숨기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그게 황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덕분에 마음은 접고 의무를 철저히 따르는 완벽한 황태자가 되었으나, 자기 마음을 알긴 아는지 의심스러웠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가는 게 무엇인지도 모를걸. 해 봤어야 알지.

그가 황태자로서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린 유일한 일이 산샤 곁에 남는 거였다. 그만큼 중요했다는 건데….

그러면서도 때가 되면 떠나겠다는 말이나 하고 있어.

그렇지만 ‘보은’이라는 데는 화가 난단 말이지?

루카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우리 전하가 저렇게나 격한 감정을 내보일 일이 일생에 몇 번이나 되겠나.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

“전하가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가장 합당한 자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마치 친오빠같이 말씀하셨죠. 그런 마음이 보은이 아니면 뭔지 모르겠습니다.”

“보은 아니라니까.”

“누가 봐도 보은이라니까요. 마치 전하야말로 후견인 같잖아요. 레이디가 결혼하자고 한 것도 거절하고 말이죠.”

“그럼 너는…, 내가 산샤와 결혼하겠다고 나서기라도 해야 했다는 거야?”

“예!”

“예?”

아드리안이 어이가 없어 웃는데 루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전하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이니까요.”

아드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말로 만들어지지 않는 듯했다.

눈은 루카를 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눈빛이 까맣게 가라앉은 걸 보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혼란스러워야죠, 전하.

자기 마음을 좀 들여다보시라고요.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보은’이 보은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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