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슉!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산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안으며 주저앉아 버렸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던 순간에….
챙!
날아드는 무엇인가를 쳐내는 소리가 들렸다.
쳐내?
누가?
멍청하게 올려다보던 산샤는 누군가에 의해 훅 당겨져 세워졌다.
순간 진한 삼나무 향기가 끼쳐왔고,
“이렇게 사방이 노출된 곳에 웅크리고 있으면 어서 죽여달라는 소리라는 것도 몰라?”
그는 산샤를 한 품에 안고 커다란 덩어리 뒤로 몸을 숨겼다.
숨고 보니 덩어리는 석상인데, 자신을 안은 사람은….
“아드리…안?”
“쉿!”
아드리안이 매섭게 주위를 경계하는데 산샤는 그의 품에 폭 안긴 채로 눈만 껌뻑거렸다.
한참 주위를 경계하던 아드리안이 긴장을 푸는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홱 산샤를 노려보며,
“아무도 없는 시간에, 어디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장소에 혼자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도대체 몇 번을 말했어요?”
야단맞았다.
“잘 가다가 멈추기는 왜 멈춘 거야? 그대로 쭉 갔어야지.”
“그, 그렇지만 누군가 따라왔다고요. 한 명 아니고 여러 명이었어. 따라오는 게 너무 빨라서 본관에 먼저 도착할 자신이 없었는데….”
“으응?”
아드리안이 웃는 것도 아닌 모호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 명 아니고 여러 명?”
“그래요. 여러 명이 아주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고, …그리고는 뭐가 날아왔잖아. 그건 당신도 봤잖아.”
아드리안이 여전히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였을까요?”
아드리안이 멀리 자신이 무엇인가 쳐낸 곳을 가리켰다.
“그건 작은 쇳덩어리였는데…, 저쪽으로….”
“아니, 그거 말고 사사삭.”
아드리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겨우 말했다.
“쇳덩어리를 날린 자가 낸 소리 아닐까?”
“그건 한 명이잖아. 사사삭은 여러 명이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였는데? …그거 날린 놈은 어딨어? 놓쳤나?”
“잡았어요.”
“잡았어요?”
산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드리안 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여기저기를 돌아봤다.
“어디에? …저기 뒤? 뭐 하나도 안 보이는데?”
그때 갑자기 아드리안이 물었다.
“한잠도 안 잔 거예요?”
자객에게 칼을 맞을지도 모르는 시점에 할 질문이…. 산샤는 뜬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잊고 있던 수치심이 몰려왔다.
그렇게나 부끄러운 짓을 하고 내내 피해 다니다가 결론엔 품에 안기는 것으로 끝내다니.
앞으로 얼마나 더 부끄러우려고.
냉큼 아드리안을 밀어내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해, 헛기침으로 목청까지 가다듬었다.
그래도 부족해.
산샤는 슬쩍 아드리안의 눈치를 살피고 말했다.
“들어갈까요?”
아드리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제라도 좀 자는 게 좋겠어요.”
“자…기에는 너무 날이 밝았는데….”
아드리안이 가볍게 등을 밀며 말했다.
“아침 식사 후에 허브 정원에서 만나요.”
휘둥그레,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눈을 차마 아드리안에게 돌리지는 못하고 있는데 아드리안이 덧붙였다.
“날마다 같은 시간에….”
날마다 같은 시간이라니!
산샤는 부르짖었다.
“왜요? 뜬금없이 갑자기 왜? 한 번도 아니고 날마다?”
단어들이 주는 묘한 느낌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맨 흙바닥이잖아. 거기서 왜 날마다 만나요?”
“아무것도 없는 맨 흙바닥에서 날마다 나와 함께, …검술을 연마해요.”
검술?
처음 들어본 단어가 아닌데 모르는 단어인가.
“검술이요? …우리 다 아는 그 검술?”
아드리안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간단하게 당연하지 않을 텐데요?
“왜 내가 검술을 연마해요?”
전혀 모르는 외국어를 들은 것 같은 산샤의 표정에 아드리안이 눈썹을 치켜떴다.
“필요성은 이미 절감했을 텐데?”
“이미, 언제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봐요.”
“아…!”
방금, 무기 하나 쓸 줄 모르는 자신을 한심해하며, 한 번 죽어본 걸로는 부족하냐고 스스로 타박하기는 했다.
필요성이야 물론 어마어마하게 절감했지. 그렇다고 당장 배울 생각은 없었다.
아드리안에게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지만 그게, …검술이라는 게, 어느 정도 바탕이 갖춰졌을 때 하는 거잖아요. 내가 검술이라는 걸 막 잘할 수 있을 리가 없을…걸…요.”
아드리안이 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레이디를 가르치는 게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내 학생이니까 최선을 다할게요.”
“내가 학생이 될 마음이 없다니까.”
“어쨌든 지금은 들어가요.”
아드리안이 미는 대로 밀리며 산샤는 울고 싶었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만 생각하면서, 덕분에 ‘수치심’이니 ‘사사삭’이니 하는 것들은 다 잊어버렸다.
둘이 본관 쪽으로 완전히 사라진 다음 정원의 초록 속에서 루카가 걸어 나왔다.
루카 뒤로 정원이 일렁거리더니 하나둘 사람의 형체로 바뀌었다.
그들은 한 사람을 잡아 무릎 꿇려놓고 있었다.
머리에 두건을 씌워 얼굴을 볼 수 없게 했는데,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는 건 두건으로도 가릴 수 없는 듯했다.
남자가 울먹이며 외쳤다.
“레이디를 만나게 해줘요. 레이디를 만나야 해.”
“조용히 해.”
루카는 원망스럽다는 듯이 외쳤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사사삭이래. 사사삭! 여러 명이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였다잖아.”
“누나를 살려달라고요.”
울상이 된 루카에게 남자의 말은 스쳐지나가 버렸다. 그에겐 산샤가 들었다는 소리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림자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키다니….”
그림자가 왜 그림자이겠나.
있는지도 모르게 있으니 그림자이지.
그런데 산샤는 기척을 느끼고 소리까지 들어 버렸다.
애초에 그림자가 산샤를 놓쳤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디아머드 성에서 사라져서 소란이 일었던 날도 노예시장에서 발견 못 했으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아니, 레이디가 능력이 출중한 걸 우리가 어떡하냐고…. 우리도 억울하다고!”
루카는 그림자들에게 턱짓했다.
“이놈을 지하로 데려가자.”
휘릭, 그들은 동시에 쑤욱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 *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아드리안에게 검술 수업을 받고 있을까?
아니다.
이건 수업이 아니다.
몇 시간째 내려치기만 하고 있지 않나.
이건 학대다.
목검이 이렇게 무겁다고 어째서 미리 가르쳐 주지 않은 거야.
손가락에 힘을 주고 깊이 호흡했지만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어쩌란 말이냐.
산샤는 한껏 불쌍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좀 쉬면 안 될까요?”
“쉬었잖아요.”
“언제?”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쉬었다.
그렇지만 쉬어도 쉬어도 팔 힘이 돌아오지 않아.
“오늘 안에 천 번 내려치기는 못 할 것 같아요.”
“벌써 오백 번 했어요. 지금만큼만 더 하면 되잖아.”
“그게 내 능력의 최고치를 한 거라고요. 정말 더는 못 하겠어.”
산샤는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기대섰다.
아드리안이 못마땅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짓이죠? 검은 지팡이가 아니에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서 있을 수가 없으니까….”
산샤는 아드리안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실망이에요. 아드리안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주 잔인한 사람이야. 첫날부터 천 번이 뭐야.”
“검을 끊을 수 있게 되면 천 번까지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검을 끊는 게 뭔지 모르겠다니까.”
“하다 보면 알게 된다니까. 다시 해봐요. 자세를 제대로 잡고.”
산샤는 검을 들어 올렸다가,
아드리안의 눈치를 봤다가,
휙 내던져 버렸다.
“안 해.”
그러고는 아드리안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얼른 땅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못해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멀리 어디선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리안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산샤 옆에 앉았다.
“그래요.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하죠.”
“쉬면 팔이 더 무겁게 느껴져서 아예 들어 올리지도 못할걸요.”
“그걸 알기는 하는군요.”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아는 게 많거든요.”
아드리안이 웃었다.
산샤는 아드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침 햇살 속에서 그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자신이 태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잊혀지는 사람과 잊을 수 없는 사람.
아드리안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한 번 보면 뇌리에 박힐 사람.
잊어보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겠지.
“황태자예요?”
불쑥 산샤가 물었다.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산샤를 돌아봤다.
“클라우스 황태자가 당신이에요?”
산샤가 다시 물었고, 아드리안은 망설였던 시간이 길었던 것에 비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죠.”
“내가 당신을 알았나요?”
“…레이디가 알았는지는 레이디가 알겠죠.”
“하아….”
산샤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았다.
아는 사이였군.
그런데 잊어버렸던 거로군.
황제와 황태자가 사고를 당했으면 당연히 아버지는 달려갔겠지.
아버지는 황태자를 구하고 성에서 지내게 했을 거다. 돌아가시기까지 3년쯤 되려나.
3년을 같이 지내고도 잊어버리다니, 자신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한 인간이냐.
“그래서 나를 도와주는 건가요?”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죠?”
“아버지가 당신을 도왔으니, 당신은 나를 돕는 거냐는….”
무심한 듯 평온했던 그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보은이라는 건가?”
산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드리안의 말투가 너무 차가웠다.
표정에 큰 변화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다정한 것만은 확실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다.
싸늘하고 매서웠다.
‘보은’이라는 말이 그렇게 나쁜 말이었나? 엄청난 모욕을 당한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산샤는 벌떡 일어섰다.
“다 쉬었는데…. 다시 내려치기를 할까요?”
슬쩍 돌아본 아드리안은, 언제 감정을 내보였냐는 듯이 무심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게 가장 안 좋은 표정이라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닥쳤다.
차라리 화를 내라고 하고 싶은데, ‘보은’이 어디서 어때서 화를 내야 한단 말이냐?
산샤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아드리안을 외면했다.
팔이 빠개질지언정 내려치기 천 번을 채우는 게 낫겠다.
그때였다.
“야아, 두 분. 오늘도 여기에 계시는군요.”
듣기에도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콧등의 멍이 더 넓게 퍼져 있는 닐스 미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