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늦은 시각, 아드리안은 깨어 있었다.
디아머드 성에 들어온 그날부터 잘 수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디아머드 성을 떠나던 날이 생각나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로베르트가 황태자파의 회합에 참석하기 위한 위장으로써 가족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누구보다 산샤가 기뻐했었다.
[남쪽 끝에 스페스라는 항구 도시가 있대. 들어 봤어? 거기가 우리 제국의 근원지라는 거야. 난 거기도 가고 바다도 보고 싶어.]
여행지가 제도 근처에 있는 소도시 나다니엘이라고 스페스에 갈 일은 없다는 걸 알고는,
언젠가 둘이서 꼭 바다를 보러 가자고도 했다.
그런데 출발 당일 심한 열이 나서 여행을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백작 부부는 산샤의 상태를 보고도 큰 걱정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알고 있는 병이라면서 며칠 앓다 털고 일어날 거라고 했다.
당장은 회합에 가는 게 급하니, 집사와 하녀장에게 맡기고 떠나자고.
다녀와서 산샤를 위해 할 일이 많으니 서두르자고 했다.
아드리안은 열에 들떠 정신이 없는 산샤의 손을 잡고 약속했다.
[내가 다 보고 와서 하나도 남김없이 이야기해줄게. 오래 안 걸려. 금방 올 거야.]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기도 했다.
꼭 산샤 곁으로 돌아오겠다는.
황태자파의 회합에 갔더라도 발목 잡히지 않겠다는.
그런데 산샤는 다 듣고 있었나 보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원망하면서 기다렸던 모양이다.
아드리안은 황태자파의 회합에 가지도 못했다.
로베르트 백작 부부와 같이 탔던 마차는 디아머드 백작령을 떠나지도 못하고 사고를 당했다.
부인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사망했고, 백작은 마지막까지 산샤를 걱정하다가 눈을 감았다.
아드리안은 또 혼자가 되었다.
로베르트 백작이 없으면 황태자파와 연락할 길도 없었다.
디아머드 성으로 돌아왔지만, 성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남겨두고 갔던 루카가 기다리다가 막아섰다.
모리츠 자작이 후견인이 되어 성을 장악했다며.
집사와 하녀장 그리고 3대째 일을 해 오던 정원사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후견인 분쟁은 일어나지도 못했다고 했다.
[누가 뭐래도 숙부니까요. 다른 친척들이 감히 붙어볼 수가 없는 거죠.]
모리츠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확실했다. 로베르트 백작이 죽고 없으니 산샤만 죽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도 확실했다.
그래서 아드리안은 생각했다.
산샤가 없으면 마정석 광산도 가질 수 없게 하자.
계승 절차를 밟지 않고 로베르트 백작이 사고를 당한 바람에 여전히 뻥 뚫려 있는 광산을 닫아 버리자.
산샤가 다시 열어줄 때까지 산샤를 죽일 생각은 못 하겠지.
디아머드 백작 가문의 계승자는 스무 살이 되면 여황의 문을 연다고 했던가.
그때까지 나는 힘을 키워서, 산샤가 계승 절차를 밟을 나이가 되면 온전히 내 힘으로 지켜주자.
모두가 잠든 밤, 아드리안은 홀로 마정석 광산으로 갔다.
오묘한 빛이 영롱한 입구 옆에는 거대한 바위가 서 있었다. 광산의 덮개였다.
계승식을 할 때면 거대한 바위를 움직여 광산을 막아두는데, 날마다 일을 다니던 광부들도 입구를 찾지 못하게 된다나.
물론 인간의 힘으로 움직일 수는 없고, 글라키에스를 소환해야 한다고 했다.
글리키에스를 소환하는 방법은 산샤가 이야기해주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정당한 계승자가 불러내는 의식이었고.
자신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불러내야만 할 것 같았다.
행여나 아버지가 알게 될까 봐 숨겼던 자신의 능력.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을 쓰기로 했다.
아드리안은 거대한 바위를 바라보면서 팔을 양쪽으로 펼쳤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면, 손끝으로 살랑살랑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날개가 느껴졌다.
아드리안은 속삭였다.
[바람의 정령이여, 나를 도와 너의 힘을 보이라.]
별빛도 없는 어두운 밤하늘에 독수리의 날갯짓과 같은 바람이 일렁거렸고, 그것은 작은 회오리바람이 되어 모여들었다.
회오리가 돌고 돌아 세력을 키우고….
점, 점, 점점.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위력이 넘치는 소용돌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소용돌이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광폭하게 울부짖었다.
이제 아드리안이 손끝을 튕기기만 하면 바로 바위를 향해 날아갈 것이다.
그때.
쿠르르릉.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투명하면서 하얀 기운이 바위를 감싸며 일렁거렸다.
우루룽.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공명음이 울렸고, 머릿속으로 직접 울림이 말을 걸어왔다.
[너는 바람을 다스리는 자로구나.]
아드리안은 가슴을 펴고 한 점으로 응집되는 하얀 기운을 노려보았다.
“너의 모습을 드러내라, 글라키에스. 나와 거래를 하자.”
[미물이여, 딱하구나. 한낱 바람으로 나에게 대적하려 들다니….]
한낱 바람이라니.
아드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한 건 바람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갖지 못한 힘을 아들이 가졌기 때문에.
제국의 영광을 길이 빛낼 것이라 백성들이 찬양할 때마다 아버지의 미움은 깊어갔다.
바람은 자신에겐 형벌과 같았다.
그런데 한낱 바람이라고?
아드리안 앞에 모인 소용돌이도 화를 내는 듯 매섭게 바닥을 훑어댔다.
거대한 바위쯤 반 토막 낼 수 있었다.
아드리안의 분노에 어쩌면 글라키에스는 당황한 것 같았다.
[진정해라, 미물이여.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애초에 도와줄 생각이었어.]
아드리안을 달래려고 했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바위 밑에 번져 나오던 빛이 점점 커지더니 부드럽게 바위를 감싸 안았다.
[그러나 신에게 대적하려 한 죄는 용서받지 못하리니.]
빛이 번쩍 터지고!
거대한 바위가 광산 입구를 막아버렸다.
마정석 광산 입구였던 곳은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양 그저 바위벽이 되어 있었다.
그때 아드리안의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환영한다, 쓸쓸한 세계로 온 것을.]
그게 산샤의 기억에서 자신이 지워진다는 뜻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하아….”
결국 새벽이 될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창밖은 벌써 새벽의 푸른 기운에 물들어 있었다.
오늘도 잠을 자기는 글렀다.
아드리안은 깨끗하게 포기하고, 일어나 창을 열었다.
새벽의 청명한 바람이 살랑 밀고 들어왔다.
“어…?”
디아머드 성에 잠들지 못한 사람은 또 있었나 보다.
멀리 동쪽 정원을 거닐고 있는 사람. 너무 멀긴 했지만, 산샤가 분명했다.
산샤를 알아보고 아드리안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져 갔다.
“비몽사몽간에 잠투정 좀 했다고 피해 다니더니, 결국 저기 있었네.”
갑자기 보이지 않아 걱정했었다.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데도 보이지 않아서 더럭 겁이 나기도 했었다.
기사단 합숙소 앞에서 자신을 피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웃고 말았지만.
멀리에서나마 천천히 거닐고 있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아드리안은 창틀에 기대앉아 산샤만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쉴새 없이 웃던 생기 넘치는 산샤도 좋지만, 평화로운 산샤도 좋았다.
보는 것만으로 자신도 평화로워지는 것 같았다.
디아머드 성에서 지냈던 게 3년이었나.
황태자에게 감정은 버려야 할 덕목. ‘행복’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버리라고 해서 버렸고, 미련은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은 다 불행했고 웃을 일이 없었으며 남의 불행을 즐겼으니까.
그런데 산샤는 아니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웃을 일이었고, 세상 모든 아픔에 공감했다.
아드리안은 산샤에게 손목 잡혀 끌려다니면서 감정을 배웠다.
산샤를 보고 기쁜 게 무엇이고 슬픈 게 무엇인지, 언제 웃고 언제 울어야 하는지를 알았다.
크게 웃을 수 있어서 기뻤고 뜨겁게 울 수 있어서 좋았다.
매시간 일분일초가 행복했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산샤를 사랑할 수 있어서 삶이 온전해졌다.
산샤는 다 잊고 혼자만의 추억이 되어 버렸지만….
“괜찮아. 내가 잊지 않으니까.”
아드리안은 손을 들어 허공에서 산샤의 윤곽을 따라 그려봤다.
이렇게라도 산샤를 느낄 수 있으니 이대로 되었다.
그러다 멈칫,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원에 산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살금살금 산샤에게 접근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누구지? 생각하고 있을 겨를도 없었다.
휙, 창을 뛰어넘어 그대로 달려갔다.
쉭쉭 바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바람을 탄 듯 날 듯이 달리던 아드리안은 문득 멈춰 섰다.
급한 마음에 뛰어내리기는 했지만, 달리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잠깐 궁리하던 아드리안은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사방의 그림자가 일렁일렁 움직이더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 되어 아드리안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림자.
아드리안의 비밀 병기였다.
* * *
정원에 나오기를 잘했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향기에 취해 거닐다 보니, 악몽에 잠을 설쳤던 기억이 처음처럼 나쁘지 않았다.
글라키에스를 주신으로 모시는 디아머드에서 글라키에스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게 특권 아니겠나.
계승자이니 특권을 누리게 된 거지.
글라키에스에게 직접 잔소리를 들었다고 해 봐. 모리츠가 얼마나 부러워하겠어.
산샤는 흡족한 기분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새삼스럽게 사방을 쭉 돌아봤다.
“어? 돌아가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어머니가 허브 정원에 가장 정성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각각 다른 특성을 가진 정원을 여기저기 꾸몄다.
지금은 가장 바깥쪽에 있는 정원까지 나와 버렸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까 너무 멀리 나왔어.
산샤는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쌩 달려서 정원을 가로질러 볼까 했지만, 평화로운 산책이었으니 평화롭게 끝맺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산샤는 걸음을 멈췄다. 미미하지만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사삭.
사사삭이라니.
어찌 들으면 바람 소리인 것도 같았지만….
그렇지만 스치는 바람에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기척이 분명했고,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이었다.
빠르긴 왜 저렇게 빨라?
저들보다 먼저 본관에 당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이 시간에, 입은 거라고는 달랑 잠옷에 가운 하나.
무기가 될 만한 것 하나 없다.
무기가 있으면 뭐 하나, 사용할 줄 모르는데….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라니….
한 번 죽어 본 거로는 정신을 못 차렸구나.
가야 할 본관은 너무 멀리 저 끝에 있고, 사사삭 소리는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