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별생각 없이 물었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도망이라도 간 건가?
산샤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다시 물었다.
“눈이 왜 그래?”
“제 눈이 어디가 어때서요?”
한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산샤를 똑바로 봤다. 깜빡깜빡 일부러 더 눈을 깜빡거리면서.
멀쩡하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그러는 건 알겠는데, 그러니까 더 수상하잖아.
“도망갔어?”
“누가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른 한스는 깜짝 놀라서 보는 산샤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리를 질러서…. 그렇지만 생각을 해 보십시오. 잘 있겠습니까? 당연히 잘못 있죠.”
슬쩍 고개를 들어 뜨악한 산샤의 표정을 살피더니 한스는 더 푸욱 고개를 숙이며 우물거렸다.
“도망은 안 갔습니다. 잘 갇혀 있어요. 저희 기사단이 죄인을 놓치거나, 그런…. 그렇게 무능한 곳은 아니거든요.”
“근데 왜 그렇게 불안해 보여?”
“그게, …오늘 아침에도 제 분을 못 이겨서 머리로 벽을 들이박고 죽어버리겠다고 난리를 쳐서….”
“오늘 아침?”
“오늘만 그런 게 아닙니다. 날마다 다양한 사고를 칩니다. 행여나 정말 어떻게 되어 버릴까 봐….”
다시 슬쩍 산샤의 표정을 살피고 한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리다, 말리다,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아예 꽁꽁 묶어놓긴 했는데…. 차라리 멀리 추방하시든지….”
“내가 가서….”
보겠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스가 재빨리 움직여, 두 팔 쫙 벌려 산샤의 앞을 막더니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지 마십시오. 어찌나 상소리를 하는지…. 기분만 잡칩니다.”
“상소리를 하면 얼마나 한다고 이렇게 기겁하는 거야?”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니까요. 귀하신 분이 들을 소리가 못 됩니다. 거의 무슨…. 그냥 추방을 하시는 게….”
“추방하라는 말은 벌써 했다.”
“그러니까요. 그 정도로 어디 보내 버렸으면 좋겠단 겁니다. 저대로 두면 얀 단장은 갇혀 있기만 할 뿐이고, 벌은 우리가 받는 것 같다니까요.”
얀을 가둬두는 것은 벌을 내린다는 것도 있지만, 사고를 방지한다는 측면이 더 강했다.
그를 추방하겠다고 풀어놓으면, 디아머드를 떠나겠나.
무슨 수를 써서든 돌아와서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을까?
얀의 입장에서는, 산샤 디아머드를 죽이면 모리츠 자작이 사면해 줄 거라고 충분히 기대할 수 있었다.
그게 모리츠가 건재한 동안에는 얀을 풀어줄 수 없는 이유였다.
한스가 주변을 둘러보고 듣는 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추방이 안 되겠으면 사형을 시키시든지요.”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
“왜요? 주군에게 칼을 겨눈 자가 아닙니까. 반역의 죄를 범했지요. 반역은 뭡니까? 당연히 사형입니다.”
“디아머드 법이….”
“법으로 되겠습니까? 사법관이 얀 단장과 20년 지기 친구인 건 아시죠?”
“사법관은 모리츠 자작이 채용하지 않았나?”
“그러니까요.”
한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의 ‘그러니까요’는 산샤가 알아야 할 것을 함축적으로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모리츠를 주축으로 하는 디아머드 가의 인맥 지도가 그려지는 것도 같았고.
산샤가 눈 귀 입을 닫고 있는 동안 그들이 대단한 결속력으로 뭉쳤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어 머리가 복잡해졌다.
누구부터 어떻게 쳐내야 할지….
“아무래도 역시 얀을 봐야겠다.”
“예? 아니…. 제가 한 말을 어디로 들으셨습니까? 귀에 피가 난다니까요.”
“귀에 피가 나도록 상소리를 하면 똑같이 갚아 주지 뭐.”
“귀한 분은 그런 걸 하는 게 아닙니다. 안 된다고요.”
한스가 팔을 더 쫙 펼치며 산샤를 막았다.
이렇게까지 막아?
순간 한스가 의심스러웠다. 얀이 제대로 갇혀 있는 게 맞긴 한 거야?
“저리 비켜라.”
산샤는 한스를 확 밀어내고 한 발 디뎠다가, 그대로 홱 당겨서 한스의 등 뒤에 숨었다.
제대로 넘어질 뻔하다가 겨우 균형을 잡으며 한스가 외쳤다.
“어억, 왜 이러….”
“쉿!”
짧고 날카로운 소리에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산샤는 한스 뒤에 숨어서 저쪽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놀란 토끼처럼 눈을 땡그랗게 뜨고서.
한스도 산샤가 보는 쪽을 봤다.
디아머드 성의 본관이 저 멀리 보이고, 그리고 뭐 없는데….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하나 있는 정도?
그의 머리에 햇살이 부서지고 있어서 눈이 부셨다.
“아! 저분, 클라이드의 수호자 아니십니까. 아드리안 경의 무용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요. 언젠가 꼭 뵙고 싶었는데….”
“쉿, 쉿, 조용히 해. 조용히 해라.”
기겁하며 조용히 시키더니, 산샤는 한스를 끌고 슬슬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한스는 끌어가는 대로 끌려가면서 속삭였다.
“아드리안 경을 피하시는 겁니까? 아니, 왜요? 반려라면서요?”
산샤가 납죽 몸을 낮췄다.
“반려도 반려만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에?”
“혹시 아드리안이 내가 여기 왔더냐고 물어보면, 안 왔다고 해. 알았지?”
“에에?”
산샤가 어기적어기적 앉은걸음으로 움직이더니 벌떡 일어나서 후다닥 달려 나갔다.
대체 뭔 일인가.
반려만의 사정은 뭐지?
한스는 멍하니 멀어져가는 산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문득 나직한 목소리가 물었다.
“저기 달려가는 게 레이디 산샤 아닌가?”
한스는 멍한 표정 그대로 옆에 선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허걱 입을 쩍 벌렸다.
“클라이드의 수호자! 아드리안 경!”
그러고는 일단 고개부터 저었다.
“아닙니다. 저기 달려가는 건 레이디 산샤일까요? 여기 안 왔다고 해야 할 분인데 달려가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을 텐데요.”
“……?”
아드리안이 갸웃하며 한스를 봤다.
한스는 히죽 웃어 보였다.
자신이 한 말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은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레이디 산샤는 오지 않았다고 하라고 했고, 아드리안 경은 다 알고 물어보는걸.
레이디 산샤가 원망스러웠다.
평소 흠모하던 검술을 달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렇게 멍청한 소리를 하게 만드시다니….
* * *
“산샤, 산샤….”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잠이 들었던가?
잠이 오지 않아 힘들었었다.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자꾸 꿈결에 아드리안과 이야기했던 것들이 생각나고, 어마어마하게 창피했다.
답답한 마음에 이불을 몇 번을 걷어찼는지 모른다.
이대로 밤을 하얗게 지새울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잤나?
비몽사몽 헤매는데….
“또 그런다, 또! …산샤 디아머드! 당장 일어나지 못해?”
귀를 통하기도 전에 머릿속에 들어와 박히는 소리였다.
산샤는 눈을 번쩍 떴다.
하얗고 투명한 곳.
공중으로 뱉은 입김이 흩어지며 얼어붙었다.
또 왔네. 얼음 궁전.
그러니까 그동안 계속 잠만 자면 얼음 궁전에 오는 꿈을 꾸어 왔던 건가? 기억을 못 했을 뿐?
어쩐지 아무리 많이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더라. 자고 일어나면 더 피곤한 날도 있었지.
그게 다 꿈 때문이라니.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내용이 하나 더 있다.
글라키에스가 모리츠에게 천벌을 내리지 않겠다고 했다.
신은 지켜보기만 할 뿐이니 인간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해결하라나?
뭐, 이, 씨….
악행을 저지른 자에게 제대로 단죄도 안 할 거면서, 왜 꿈마다 등장하는 거야?
“글라키에스?”
글라키에스가 깜짝 놀라며 눈을 깜빡거렸다.
“나를 알아보네?”
휙 달려와 산샤의 손을 잡더니 반갑게 흔들었다.
“너, 이제 다 기억하니? 나랑 이야기했던 거 다 알아?”
“글쎄, 뭐….”
산샤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억하고 있는 게 전부인지 부분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거면 된 거다. 혹시 빼먹고 기억 못 하는 게 있어도 시시때때로 떠오를 거니까.”
“시시때때로 떠올라서 뭐 하게요? 대륙을 정복하라고요?”
“그것도 하면 좋고….”
글라키에스가 뒤로 한발 물러나 산샤를 상하좌우로 한참 훑어보더니 속삭였다.
“자, 우리 이제, 아드리안 이야기를 해 보자.”
산샤는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아드리안이 여기에서 왜 나와?
글라키에스가 꿈에 제멋대로 들어온 게 아니라, 아드리안을 신경 쓰는 자신의 마음이 글라키에스를 불러들였나?
“…당신이 왜 아드리안 이야기를 하죠?”
“나는 뭐? 백날 예언만 하라는 법 있니?”
그러더니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속삭였다.
“아드리안을 저대로 둘 거야? 너, 이렇게 오랫동안 맹하게 있으면 곤란하단 말이야.”
“나 때문에 당신이 곤란해요?”
“내가 걔한테 좀 미안한 짓을 했거든. 네가 얼른 정신 차릴 줄 알고 그랬는데, 너무 오래가잖아.”
오리무중,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산샤는 눈살만 찌푸렸다.
톡톡톡.
글라키에스가 산샤의 정수리를 가볍게 내리치면서 히죽 웃었다.
“머리를 쓰라고. 잊어버린 걸 생각해 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제대로 설명하든가, 설명하지 않을 거면 이야기를 꺼내지를 말든가.
“잊어버린 게 뭔지 모르는데, 잊어버린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해내요?”
“찾아내라니까.”
“내가 중요한 걸 잊어버렸으면, 가르쳐주면 되잖아요.”
“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정말 찾기를 바라기는 해요?”
피식 글라키에스가 웃었다.
“제법이네. 머리를 쓸 줄 알아. 까딱했으면 다 말해줄 뻔했어.”
“뻔은 또 뭐야…. 그냥 말해주면 그만일걸.”
“원래 신이라는 게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존재야. 의미를 찾아내는 건 인간이 할 일이고…. 신은 말하고 인간은 해석한다. …못 들어봤어?”
“못 들어 봤어요.”
글라키에스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호탕하게 웃더니 다가왔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뭐부터 해야 하는지 알지?”
글라키에스가 산샤의 손을 쓰다듬었고, 손길 따라 눈꽃이 피어났다.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멍청한가 싶지만 사실 똑똑하잖아.”
산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알고 있어. 잘할 거라니까! 하는 김에 내 예언도 좀 이뤄주고…. 자! 나를 봐.”
바짝 다가온 글라키에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악! 이게 뭐야?
내가 뭘 본거지?
잠이 확 깼다.
눈을 번쩍 뜨고 한 생각은…,
아니야.
안 돼.
비명을 지르지 마.
창피했던 걸 생각해…였다.
그리고 막 터지려는 소리를 삼켜 버렸다.
터져 나오지 못한 비명은 숨구멍을 막아 버렸고, 그 바람에 기침이 터졌다.
얼굴이 빨개지고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갈 때까지도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산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축 늘어져 생각했다.
비명을 질러 버릴 걸 그랬나. 악몽을 꿨으니 비명을 지르는 게 당연한걸.
그렇지만 정말 놀랐다.
글라키에스 여황의 얼굴이 바로 내 얼굴이잖아.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다.
“아드리안을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모르겠다.
나오느니 한숨이고, 머리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