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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38화 (38/97)

38화

아드리안은 문을 벌컥 열며 외쳤다.

“산샤!”

“아드리안!”

자신의 품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산샤였다.

아드리안은 빠르게 집무실을 살폈다.

자객은, …없다.

위험한 것도, …없다.

서류가 잔뜩 쌓인 탁자 옆에는 멍해진 얼굴로 아니타가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아드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아니타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한다는 듯이.

“무슨 일이에요? 으악!”

루카가 소리치며 뛰어 들어오다가 꼭 붙어 껴안고 있는 아드리안과 산샤를 보고는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곤 이리저리 움직여 집무실 안을 살피고, 아니타와 시선을 교환했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고 나란히 서서 아드리안과 산샤를 바라봤다.

차마 다가오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자리를 피해 줄 수는 없다는 눈빛으로 다음 상황을 기다리면서.

“아…. 이게…. 이건 무슨….”

뒤늦게 따라온 마르틴이 주춤거리면서 버벅거리자,

쉬잇!

루카와 아니타가 동시에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눈치를 줬다.

마르틴도 얼른 태세를 전환, 한쪽 벽에 기대어서 다음 상황을 기다렸다.

그러니 난감한 건 아드리안이었다.

졸지에 구경거리가 되었는데 산샤가 왜 이러는지 전혀 모르니까.

얼굴을 보고 표정이라도 살펴야겠는데, 산샤는 놓치면 죽기라도 하듯 아드리안의 셔츠를 꽉 움켜쥐고 얼굴을 파묻었으니….

“레이디?”

아드리안이 살짝 떼어내려는데, 산샤는 고개를 흔들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어디 갔었어, 아드리안. 왜 안 왔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드리안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다시 아니타를 봤다.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 소파에 누워… 주무시는 거 같았는데요.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저렇게….”

“아니야!”

산샤가 외쳤다.

확 시선을 들어 아드리안을 바라보는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드리안, 다 보고 와서 이야기해 준다고 했잖아. 금방 온다고. 오래 안 걸릴 거라고 했잖아.”

산샤만 남겨두고 로베르트 백작 부부와 여행을 떠나기 전 아드리안이 했던 말이었다.

“산…샤?”

아드리안이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는 산샤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꿈을 꾸는 중이라는 걸.

어릴 때 산샤에게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대화도 하지만 영혼은 꿈속을 헤매는 것.

꿈과 현실 중간 어디쯤을 헤매며 시간과 기억이 뒤죽박죽 섞이고 평소의 산샤가 아닌 모습을 보였다.

디아머드 계승자라서 그렇다고 했다.

꿈을 통해 얼음여황 글라키에스를 만난다고.

감당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는 꿈을 기억하지 못하고 몽유병 같은 증세를 보인다고.

로베르트 백작도 어릴 때 그랬다지.

언제나 같은 꿈을 꾸는 건 아는데 무슨 꿈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던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면 이런 상태로 돌아다녔던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예전에 마리에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산샤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꿈을 꾸고 있구나, 산샤.”

산샤는 젖은 눈을 깜빡이며 아드리안을 쳐다봤다.

“더 자는 게 좋겠어. 푹 자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산샤는 아드리안이 이끄는 대로 따라와 소파에 누웠다.

아드리안이 천천히 산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 눈을 감아. 금방 편안해질 거야.”

산샤의 눈꺼풀이 슬슬 내려앉았고, 다시 잠에 빠져들며 산샤는 중얼거렸다.

“아드리안, 이제 어디 가지 마. 계속 내 곁에 있어.”

아드리안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래. 이젠 아무 데도 안 가. 네 곁에만 있을 거야.”

그리고 아드리안은 계속 다정하게 산샤의 머리를 만져주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색색, 산샤가 고르게 숨을 쉬며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아드리안은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돌아서자, 뚫어지게 그들을 지켜보던 루카와 아니타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마르틴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산샤가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 못 할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어? 왜요?”

멍한 와중에도 아니타가 뾰족하게 반응하고 나섰다.

“왜 있었던 일도 말을 못 하게 하세요? 무슨 꿍꿍이를 꾸미시는데요?”

아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며칠 사이에 아니타가 산샤의 충신 노릇을 완벽하게 해내는 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안심이 된달까.

“별다른 꿍꿍이는 없고,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을 옆에서 말해주면 오히려 혼란스러울까 봐.”

“우리 아가씨가 그렇게 연약하신 분이 아닌데….”

아드리안의 말에 대답하는 것도 아니고 혼잣말을 하는 것도 아니게 중얼거린 아니타는 삐쭉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잘 알겠습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 * *

“그림자 풀까요?”

아드리안이 방에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카가 물었다.

“…그림자를 어디에?”

“쟤요, 아니타. 너무 무례하잖아. 지가 레이디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우리 전하가 훨씬 더 많이 아는데….”

루카가 알아서 말꼬리를 흐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좀 보지 마세요. 무서워요. …눈빛이 무기야, 하여튼….”

아드리안은 무심한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

“마르틴 바이다는?”

“전하가 레이디를 다시 재우는 걸 보더니, 막 한숨을 내쉬면서 갔습니다. …그림자 풀까요?”

이번엔 아드리안이 눈살을 찌푸렸고, 루카는 한숨을 내쉬며 울상이 되었다.

“장난한 겁니다. 그림자야 이미 붙여놨죠. 어째 오늘은 여유가 없어 보이시네요. 장난도 안 받아주시고….”

루카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아드리안을 빤히 보다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디는…. 기억이 돌아온 줄 알았는데 말이죠.”

아드리안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쉽게 돌아올 거였다면 사라지지도 않았겠지.”

* * *

내가 왜 그랬을까. 산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소파에 잠깐 누워 쉰다는 게 잠이 들어 꿈을 꾸었던 모양이다.

꿈 내용은 황당했다.

자신이 글라키에스라고 주장하는, 꼭 아니타만큼 무례한 여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더니 대륙을 정복하라고 했다.

뭔 소리야. 개꿈인가.

근데 똑같은 꿈을 여러 번 꾼 것 같은 느낌은 또 뭐야.

꿈 마지막에는 엄청나게 놀랐고 고통스러웠다.

무엇에 놀라고 고통스러웠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나. 뭐였는지 기억하고 있다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아드리안에게 어이없는 짓을 했던 기억만 선명했다.

“하아….”

끝도 없이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오는 건 기본이고.

“아아….”

괴롭고도 괴로운 마음에 머리만 부여잡게 되었다.

그런 산샤를 보며 아니타가 끌끌 혀를 찼다.

“뭐, 왜? …악몽을 꿨다고 했잖아. 무슨 꿈인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누가 뭐래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있는 대로 아니타를 노려보던 산샤는 금세 피시식 무너졌다.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아니타를 노려볼 기운도 생기지 않았다.

“아휴, 정말…. 누군 꿈 한 번 안 꿔봤나. 이렇게 수선을 떨 일인가요, 그게?”

“네게 수선스럽다고 지적당하는 날이 오다니….”

“어머, 무슨 말씀을…. 아가씨는 진짜 수선스러우시거든요.”

이런 소리를 들어도 반박도 못 한다. 기가 막혀서 숨이 다 안 쉬어진다.

“이래서 굳이 말할 거 없다고 했나 보네요.”

“뭘?”

“기억 못 할 거라고 굳이 말해 줄 거 없다고 하던데….”

“누가?”

“아드리안 경이요. 기억 못 할 거랬는데, 왜 기억하고서 이 난리냐고요.”

아니타가 또 혀를 차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데, 산샤는 그대로 탁자 위로 무너졌다.

그런 창피한 짓을 하고 앞으로 아드리안의 얼굴인들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아니 얼굴을 보고 못 보고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러니까 중요한 게 아닌 게 아니고….

아, 모르겠다. 뒤죽박죽 갈팡질팡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일, 일. 이럴 땐 일을 해야 해.”

산샤는 벌떡 일어섰고, 아니타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뭐라고 말은 안 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다.

‘이 아가씨가 드디어 미쳐 버렸나 보다’ 하는 거지?

그래도 산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뭐야, 아니타! 뭐부터 해야 하지?”

“거기 있는 그거….”

아니타가 가리킨 것은, 그렇게 열심히 날렸는데도, 아직도 한참 남은 남편감 정리해 놓은 서류철이었다.

“저건 아니야.”

저건 너무 많이 봤고 지금 이 세상에서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게 있다면, 저것이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걸어야 한다고.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괴롭던 문제도 가닥이 잡혀 있기 마련이라고.

이번 문제가 과연 가닥이 추려질지 모르겠지만, 걷자.

산샤는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걷고,

걷고,

걷다가 보니….

도착한 곳은 기사단 합숙소였다.

연병장에서는 기사단의 훈련이 한창이었다.

산샤의 등장으로 기사들이 술렁술렁 동요하는데, 구석진 한쪽에서 자크가 땀을 뻘뻘 흘리며 검 내려치기를 하고 있었다.

“하아….”

지켜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크가 기사로 임명되었으니, 검술을 익혀야 했다. 순서가 바뀐 것 같긴 하다만 어쨌든….

제대로 검술을 익히면 그만일 텐데, 잘될 것 같지 않았다.

검이 흐느적흐느적 갈 길을 찾지 못하는 게, 자신의 눈에도 보였으니까.

따로 검술 선생님을 붙여주겠다고 해도 기어이 기사단에서 배우겠다고 하더니, 저런 꼴일 줄이야.

“저런 실력으로 얀의 검은 어떻게 받아쳤는지 모르겠네.”

“그렇지요? 갑옷에 걸레질은 참 잘했는데 말이지요.”

언제 왔는지 한스가 나란히 서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데, 해도 해도 저렇게 못 하는 애는 처음 봤습니다. 아무래도 몸 쓰는 일은 젬병이에요.”

쩝, 할 말이 없다.

산샤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스는 얼른 덧붙였다.

“뭐, …기사라고 꼭 검만 쓰는 건 아니니까요. 시대가 변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혼자 크게 웃다가 머쓱해져서는,

“시대가 변하긴 했어도 싸울 줄 모르는 기사는 이상합니다만. 크흠.”

괜한 헛기침까지 하다가 산샤를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급하게 봉했으니까, 뭐….”

“자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예에…. 그러시겠죠.”

쩝, 이번엔 한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만, 자크를 기사로 봉할 때는 누구의 동의도 필요하지 않았다.

특히 기사단 내부의 동의는.

산샤는 몸을 돌려 한스를 똑바로 봤다.

그리고 물었다.

“얀은 잘 있나?”

“예? 자, 잘…. 잘 있지요. 그럼요.”

대답하는 한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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