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왜요? 왜 웃으세요?”
“이게 자꾸 던지다 보니까 요령이 생겨.”
“무슨 요령이요?”
“한 장 한 장, 전부 다 따로따로 날리게 던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한번 볼래?”
“아니요. 하지 마…!”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꽥 질렀지만, 늦었다.
산샤가 날린 서류가 한 장 한 장 공중에 날리다 각기 다른 방향에 내려앉았으니까.
아니타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하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내가 하루 온종일 종이만 줍고 있어야 하겠냐고요.”
“그냥 두라고 했지! 밀대로 한꺼번에 밀어다가 소각로에 태워 버릴 거라고. 손대지 말라니까 왜 사서 고생하면서 내 재미를 뺏어가려고 해?”
그 말에 아니타는 손에 모아쥐고 있던 것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러게나 말이다.
주인이 하지 말라는 걸 굳이 왜 하고 있었나 모르겠다.
앉은걸음으로 돌아다니며 치웠더니 허벅지가 뻐근했다.
이놈의 서류들.
성질 같아서는 질근질근 밟아 버리고도 싶었지만, 대문짝만하게 얼굴이 그려져 있어서 그거는 아무래도 꺼려졌다.
진짜 사람을 밟는 것 같잖아.
아무리 무례한 아니타라도 진짜 사람을 그것도 얼굴을 밟아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볼 만한 사람이 없어요? 이렇게 많은데? 생긴 건 다들 멀쩡하구만.”
“무턱대고 나랑 결혼하겠다는 사람들인데 안 봐도 뻔하지, 뭐…. 평생의 반려를 찾는 일인데, 재산 말고는 보는 게 없잖아.”
아니타가 괴상한 표정으로 산샤를 훑어봤다.
“말씀이 좀 이상하신데요? 평생의 반려를 찾는 일에 재산을 안 보면 뭘 보나요?”
“영혼의 결합?”
끄응, 아니타는 앓는 소리를 내며 산샤를 외면했다.
“그래요. 아가씨 정도 되면 뭐…. 재산이 대수겠어요? 이 사람들 다 아가씨보다 가난한 사람들 아니에요? 아드리안 경은 뭐 이런 사람들 조사를, 이렇게까지 해 왔을까요?”
“조사를 하긴 해야 하니까.”
“어디에도 가주님에게 어울리는 신랑감은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나?”
“그걸 왜 알려줘?”
“자기 만한 신랑감이 없다고 말하고 싶어서요? 아가씨를 제대로 꼬셔 보려는 거죠.”
단박에 산샤가 코웃음을 쳤다.
“절대 그럴 리 없어.”
“왜요?”
“벌써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단 말야. 두 번이나.”
“에에엑?”
아니타가 펄쩍 뛰며 수선을 떨었다.
“아니, 진짜 이 아가씨가! …어쩌시려고 이래요? 큰일 낼 아가씨네. 거봐. 이봐. 내가 그랬죠. 아드리안 경이 수상하다고.”
“청혼은 내가 했다니까….”
“저 특사인지 불러다가 가주님 재산을 훔칠 작당 모의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요.”
“바이다가 온 거잖아. 부른 게 아니고….”
“허엇, 우리 아가씨, 완전히 넘어갔네. 넘어갔어. 아니. 아무리 부자면 뭐 해요. 이런 거, 털어먹기 시작하면 한입에 홀라당….”
“잠깐!”
산샤가 손을 들어 아니타의 말을 막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 가 봐라. 왜 아직도 저러고 있는지….”
“예?”
“도대체 왜 저렇게 오래…. 뭘 하고 있는지 보고 와. 도무지 신경이 쓰여서 집중할 수가 없잖아.”
“아휴. 정말….”
아니타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방 안에 너저분하게 흩어진 종이들을 돌아봤다.
“그러니까 이게 다, 저쪽 방이 신경 쓰여서 이러신 거네요?”
“가서 보고 오라니까.”
아니타는 산샤를 소파에 끌어다 앉혔다.
“좀 누우시는 게 좋겠어요.”
“뭐?”
“오늘도 너무 일찍 일어나셨잖아요. 사람이 잠도 자고 밥도 먹고… 푹 쉬고 잘 먹어야죠. 일단 눈을 좀 붙이시라고요.”
“네가 못 하겠으면 내가 가보지, 뭐.”
산샤가 일어서려는데, 아니타는 두 다리를 딱 벌리고 서서 산샤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아가씨, 잘 들으세요. 제가 인생 경험 많은 언니의 심정으로 말씀드리는데요. 아드리안 경은 안 됩니다.”
“뭐?”
“그 사람 하는 일이 뭐예요? 수호자 아니냐고요. 그거 더 강한 도전자가 나타나면 목숨을 내놔야 하는 자리예요. 그런 사람 뭘 믿고 평생을 약속해요?”
“누가 평생을 약속해? 그런 거 아니야.”
“아…!”
갑자기 아니타가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반짝였다.
“일찍 죽어 버리면 재산은 다시 아가씨 혼자만의 것이 되나요?”
“뭐라는 거니?”
“아가씨! 아무래도 아드리안 경이랑 결혼하는 게 좋겠는데요?”
* * *
아드리안은 한숨을 푹 내쉬고,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는 마르틴을 노려봤다.
“기껏 여기까지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그거냐?”
“이상하시네요. 왜 짜증을 내실까? 당연히 물어야 할 걸 묻고 있잖아요.”
“산샤와 내가 무슨 관계냐고 따져 묻는 게 어떻게 당연한 질문이야?”
“클라이드의 수호자가 갑자기 디아머드 성에 들어와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니까 레이디 산샤와 무슨 관계이냐 묻는 거고….”
“돌아가는 게 좋겠다. 여기 이 방에서 너와 그런 말을 하고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성급하기도 하셔라.”
마르틴이 반달 모양으로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저번에 서재에서 저를 공격한 것도 레이디를 들먹여서였잖아요. 제 말이 맞죠?”
아드리안이 고개를 돌려버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럴수록 마르틴은 신이 나서 종알거렸다.
“끝까지 아니라고 하면 저도 별수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수호자를 건드리는 건 위험부담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황태자라는 고백처럼 막 숨겨진 능력을 막. …그거 루카도 모르는 거죠? 이젠 저만 아는 거잖아요. 아, 좋아라.
근데 능력은 그만큼밖에 안 되세요? 딱 바로 눈앞에 있는 대상에만 적용되는 건가? 상급 능력으로 키우셨으면 못 할 일이 없을 텐데요.”
마르틴의 말이 다 맞았다. 산샤에게 해를 입힐 것 같아서 먼저 마르틴을 제거해 버릴 생각이었다.
급한 마음에 능력을 사용해 버렸다.
아드리안이 바람을 다스리는 자로서 각성한 것은 클라우스 황태자 시절이었다.
각성하였으니 능력을 키워야 했겠지만. 그러려면 황제가 보관하는 정령의 돌이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정령의 돌이 다 웬 말인가.
자신이 각성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아버지 앞에 능력을 내보일 수도 없는데….
누구보다 루카에게 비밀로 해야 했고, 한 번 숨겼으니 그냥 계속 숨겼다.
굳이 능력을 쓸 일도 없었다.
능력이 있는 걸 거의 잊고 살았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클라이드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 끝없이 결투할 때도 바람의 능력까지는 필요 없었다.
순행 길에 자객의 습격을 받았을 때 혼자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능력 덕이었을까 생각했을 뿐.
각성한 후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은 딱 두 번 썼다.
한 번은 산샤를 위해서, 또 한 번은 저 입 가벼운 마르틴 바이다를 없애려고.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까지 보였으면 확실하게 해결 봤어야 했는데….
어리석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게 패착이었다.
[전하도 평생 숨어만 살 수는 없잖아요.]
그 말에 흔들렸다.
마르틴이 말하는 황기사를 통해 호레스 밀란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밀란만 제거되면, 그를 따르던 귀족 일파들은 자연스럽게 와해될 것이다.
강력한 힘에 기생하던 자들에게는 결사 항전보다는 배신이 쉬우니까.
그러면 자신 때문에 산샤가 위험해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어쩌면 산샤 곁에 계속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샤가 자신과의 시간을 영영 기억해내지 못할지라도 괜찮았다.
곁에서 그녀를 지켜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으니까.
어리석은 희망이었다.
마르틴 바이다는 여전히 까불까불 종알거리고 있었다.
“사실 그땐 왜 그러셨나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세상 아무도 모르는 능력까지 보이면서…, 오늘 와 보니 알겠네요. 왜 그러셨는지….”
말을 너무 많이 한 게 힘들었는지 숨을 몰아쉬며 마르틴이 해사하게 웃었다.
그때 저 입을 완전히 다물게 해야 했다. 어리석은 희망에 휘둘릴 게 아니라.
이곳에선 바람을 불러오지 않을 걸 아니까 하고 싶은 대로 다 뱉고 있는 게 아닌가.
더 듣고 있을 필요가 없어서, 아드리안은 털고 일어섰다.
“할 말 다 끝났으면 그만 가보도록….”
“레이디 산샤는 반대입니다.”
마르틴은 언제 신나게 까불었냐는 듯이 진지하고 근엄하게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아드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디 산샤는 전하 곁에 있으면 안 됩니다. 절대 반대입니다.”
“이유는?”
“우리 힘이 결집 되기도 전에 호레스 밀란의 표적이 될 거예요.”
아드리안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별수 없이 웃었다.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황태자가 오기만 기다렸다더니 힘은 모아두지 못했나 보군.”
“당연하죠.”
“당연해?”
“이 엄혹한 시국에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험한지 아십니까?”
그러면 그렇지. 이젠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기대한 자신이 머저리였을 뿐.
“황기사니 뭐니 이름만 거창했을 뿐이군. 한 달에 한 번 모여 술자리를 가지는 사교 모임이었나?”
마르틴이 머뭇머뭇 하면서도 여전히 종알거렸다.
“…술을 마시긴 마셨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한참 버벅거리다가 똑 뜨고 쳐다보는 눈동자에 원망이 가득 찼다.
“황태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밝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했어요.”
“…….”
“게다가 황태자가 전하가 정말 살아 계신지도 정확하지 않고,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잖습니까. …아, 씨, 생각하니까 눈물 나네.”
주먹으로 이마를 짚고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날리는 마르틴의 행동은 무대의 배우조차 하지 않을 과장된 연기였다.
그러나 그 안에 진실이 있다는 걸 아드리안은 알았다.
‘클라우스 아드리안 라인하르드’는 입 밖으로 내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불러올 이름이니까.
“그 와중에 너는 호레스 밀란의 오른팔이고?”
“오른팔이랍시고 한 일이라고 내 목숨 지켜낸 것밖엔 없는데요, 뭐. 그건 그렇고!
…이제 여기 전하가 계시니까. 이제야 살았다는 걸 알았으니까, 이.제.야! 힘을 결집할 이유가 생긴 거죠.”
“그래서 황기사라는 게 실재한다는 증거는 가져왔나?”
“예?”
내내 쉴 새 없이 종알거리던 마르틴의 입이 다물어지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증거를 가지고 올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살려줬던 것 같은데?”
“그, 그러셨죠.”
“증거는 없군?”
“지금만 없는 겁니다. 제도에 다녀와야 하거든요. 다녀올 동안 여기 계시지 말라고, 그 말을 하러 왔습니다. 레이디 산샤와 떨어져 계시라고요.”
그때였다.
“아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이게 무슨 소리죠?”
마르틴이 펄쩍 뛰며 물었다.
그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아드리안은 답을 해줄 여유가 없었다.
산샤의 목소리였다.
아드리안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