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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36화 (36/97)

36화

아니타가 말한 것은 아드리안과 산샤 자신의 협상이었다.

둘만의 약속.

아니타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도와주는 대가로 무엇이든 아드리안이 원하는 것을 내주기로 했었다.

그 이야기를 해주면서 아드리안이 지낼 방을 준비하라고 했더니, 아니타는 버럭버럭 화를 냈었다.

[뭘 요구할 줄 알고 다 준다고 해요? …그런 걸 호구 잡힌다고 하는 거예요. 가주님이 딱 그거네. 호구.]

[아드리안은 무리한 걸 요구할 사람이 아니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특히 돈 문제에서는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돈은 한 푼도 안 내놓으려고 한다고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돈보다는 정의나 의리나 사랑이 더 중요한 사람도 있다고.]

[이렇게 철모르는 소리를 하신다니까. …눈 까뒤집고 덤비는 놈이 있다? 그건 다 제 밥그릇 뺏기기 싫은 놈이라고요.]

[아니타 너, 무슨 자격으로 내 일에 이렇게까지 덤비는 거니?]

[무슨 자격이라뇨? 아가씨 재산을 지키는 게 내 월급을 지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아니타야말로 제 밥그릇을 지키려고 눈 까뒤집고 덤비는 놈이었단 말이지.

“아니타! 그만해.”

그렇지만 아니타는 못 들은 척하고, 아예 산샤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그러고는 아드리안에게 주먹까지 흔들었다.

“우리 가주님이 어설퍼서 아무렇게나 속여도 될 것 같겠지만, 바로 옆에는 충성스러운 아니타가 있다는 걸 똑똑하게 기억하시라고요.”

충성이랍시고 나를 까기나 하고.

“아니타! 이게 무슨 충성이야? 세상에서 충성과 거리가 제일 먼 게 너잖아.”

“어머, 아가씨!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세요? 이 상황에서 제 충성을 의심하다니요?”

그때 아드리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잘 기억할게.”

“예?”

붕붕 날아갈 듯 흔들리던 아니타의 주먹이 그대로 공중에 멈췄다.

“레이디 곁에 너처럼 충성스러운 하녀가 있어서 다행이구나.”

“예?”

아드리안이 여전히 공중에 떠 있는 아니타의 주먹을 보며 피식 웃었다.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잠시 다녀올게요.”

아드리안이 산샤에게 일별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산샤는 멍해졌다.

이게 뭐지?

아드리안에게 무례하게 구는 걸 못 참겠어서 화를 냈던 건데, 당사자는 가버리네.

이게 다 아니타 때문이야.

산샤는 아니타를 흘겨봤다.

“너하고 제일 안 어울리는 말이 충성이라는 건 알지?”

“어머, 아가씨! 진짜 서운하다니까요.”

“주먹이나 내려.”

아니타가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주먹을 슬그머니 내리며 삐쭉거렸다.

“다 아가씨를 위해서 용기를 냈던 건데….”

“뭐?”

“이렇게라도 해놔야 아가씨 재산을 넘보지 않죠. 제가 제대로 경고해준 거라고요.”

“그럼 그렇지, 너의 충성의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내 재산이니까.”

“당연하죠. 반려니, 결혼이니, 그런 것도 안 했으면 좋겠어. 마정석 광산 나눠 쓰는 거 진짜 너무 아까워요.”

산샤는 웃고 말았다. 이토록 일관성 있으니 얼마나 믿음직스러운가.

어쨌든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서 빨리 아드리안을 따라가는 것.

호다닥 달려 나가려는데 아니타가 냉큼 막아섰다.

“어딜 가시려고요?”

“손님이 오셨으니, 가주로서….”

“우리 손님 아니에요. 딱 아드리안 경만 보고 싶대요. 다른 사람은 다 물러나 있으래요. 둘이서만 은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내 집인데 왜 그 사람이 오라 가라야?”

“그러니까요. 진짜 어이없죠? 그래도 그냥 계시라고요. 황제 특사한테는 막 함부로 하면 안 된다면서요.”

“그럴수록 내가 더 가봐야….”

“오지 말라고 했다니까요. 어쩌실 라고요? 엿들으려고요?”

“어머!”

산샤는 반사적으로 등을 곧게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엿듣기는 누가? 여기는 내 집이야. 나는 절대 엿듣지 않아. 듣고 싶으면 그냥 들어.”

산샤는 도도하게 손끝을 살짝 흔들었다.

“비켜라. 내 집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가는지 가주로서 꼭 들어 봐야겠다.”

그러고는 아니타가 비키기도 전에 고고하게 걸어 나갔다.

“그게 엿듣는 거지. 뭔 헛소리를 저렇게 원….”

아니타도 이죽거리면서도 따라붙었다.

황제 특사가 굳이 여기까지 와서 아드리안에게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할지 궁금한 것은 아니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종종종종.

둘은 응접실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렇지만 문 앞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몸을 움츠렸다.

우기는 거야 뭐라고 하든 말할 수 있지만, 결국엔 엿듣는 거니까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지.

산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응접실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어서 와서 엿봐 달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문에 바짝 붙어 안을 들여다봤더니….

바로 아드리안의 뒷모습이 보였고, 몸을 살짝 틀어 시야각을 달리했더니 마르틴도 보였다.

산샤는 입을 틀어막았다.

마르틴의 간절한 표정.

마치 사랑을 고백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설마!

정말 아드리안을 좋아하는 거야?

아드리안에게 고백했어?

그래서 아드리안은 어떤 마음인데?

아드리안이 조금만 이쪽으로 돌아서면 표정이 보일 것 같은데, 너무 등만 보이는 거 아냐?

그때 등 뒤에 쌕쌕대던 아니타가 속삭였다.

“엿듣는 거 아니라면서요. 이건 그거보다 더 심한데?”

화들짝 놀라 산샤는 얼른 아니타의 입을 막았다.

쉿!

들키자는 거냐?

이렇게 가까운데 속삭인다고 안 들리겠냐?

눈짓을 열심히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니타는 산샤의 손을 밀어내고 제 딴에는 조심한다는 듯이 또 속삭였다.

“이러고 있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보면 어때, 내 집인데!”

산샤가 참지 못하고 속삭인 순간.

“레이디?”

의아한 듯 부르는 소리.

어느새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아드리안이 서 있었다.

산샤는 몸을 웅크린 그대로 급하게 고개부터 저었다.

“오해는 하지 말아요. 엿듣거나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래요.”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디는 엿들을 사람이 아니죠.”

산샤는 어색하게 배시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손님이 오셨으니 가주로서 챙길 게 없나 온 거예요. 아드리안 경의 손님이 내 손님이니까….”

“신경 써 주는 게 고맙기는 한데….”

아드리안이 문을 잡았다.

닫으려고?

이대로 닫아 버리면 곤란하잖아.

순간 턱, 산샤도 문을 잡고 몸을 살짝 밀어 넣었다.

“그래서 필요한 건, …없어요?”

아드리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산샤를 밀어내면서 말했다.

“없어요.”

“아니, 아드리안 말고 황제 특사. …손님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손님은 뭐 진짜 필요한 게 있을 수도 있잖아.”

“고마우셔라.”

간드러진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딱 아드리안만 필요하답니다. 그러니 그 문 좀 닫아줘요.”

다시 말을 해보고 말고 할 새도 없었다.

그냥 탁!

문이 닫혀 버렸다.

딱 코앞에서 닫힌 문을 노려보며 산샤는 중얼거렸다.

“웃는 얼굴이 기분 나빠.”

“누가요?”

“느물느물하지 않니?”

“황제 특사요? 예쁘던데…. 생긴 건 아드리안 경 못지않죠.”

산샤는 아니타를 흘겨봤다.

“너는 보는 눈까지 무례하구나.”

“예?”

댈 데다 대야지. 어떻게 저 느물느물하고 기분 나쁜 놈을 아드리안에게 대?

“됐다. 더 말할 거 없어. 가자.”

홱 돌아 집무실 쪽으로 걸으면서도 산샤는 자꾸 뒤를 돌아봤다.

둘이서 문 꼭 닫고 무슨 이야기를 하냔 말이야.

“…둘이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니? 무슨 사이일까?”

“음모를 꾸미는 사이?”

“뭐?”

“가주님 재산을 어떻게 뺏어 먹을까 작당 모의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딱 너 같은 생각만 하니? 너는 재산, 돈…. 그거 말고는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안 해?”

“다 아시면서 뭘 그러신대요? 그럼 가주님이 보기엔 무슨 사이인 거 같은데요?”

“뭐기는….”

호쾌하게 대답하려던 산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예?”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아가씨가 보기엔 무슨 사이인 거 같냐고요?”

“아무것도 아닌 게 맞다니까!”

산샤는 쫑쫑쫑 달려가기 시작했다.

방금 딱 저 같은 생각만 한다고 구박했는데, 마르틴이 아드리안에게 고백한 것 같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 되냔 말이야.

뒤에서 아니타가 외쳤다.

“아닌 게 아닌데? 진짜 뭐 있는데? 가주님! 말을 하고 가시라고요.”

아니라면 아닌 줄 알지.

있긴 뭐가 있다고 저런담.

있을망정 저렇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일인가, 부끄럽게.

* * *

휘리릭, 착.

서류철이 멋지게 날아 바닥에 안착했다.

“이번엔 날개를 확 펼치는 새 같아 보이지 않았어?”

아니타는 울컥 화가 솟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산샤를 보는 시선이 험악해졌을 뿐.

그러나 산샤는 모르는 척, 다음 서류를 가져다 훑어보고 있었다.

저러다 또 휘리릭 착, 날리겠지.

날개를 확 펼치는 새는 무엇을 남기나. 깃털을 남긴다.

그런데 새 같은 서류철은 한 장 한 장 날리는 종이를 남겼고, 그걸 다 모아야 하는 아니타의 노동을 낳았다.

“그냥 옆에 두시면 제가 다 치운다니까요.”

“그렇게 하나하나 주울 필요 없다니까. 흩어진 채로 둬.”

“그냥 두면 다 나중 일이 되고 마는데…. 던지지만 않으면 되겠구먼요. 왜 말을 안 들어….”

입으로는 종알거리면서 손으로는 부지런히 여기저기 흩어진 낱장을 주워 모으던 아니타는,

“아니…. 쪼옴!”

소리를 질렀다.

거기에 맞춰 휘리릭 착.

산샤가 던진 서류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아니타, 세상에는 남자가 이렇게 많아. 다 나한테 장가오겠다는 남자들이야. 신기하지 않니?”

“그러니까요. 그 신기한 걸 왜 이렇게 막 버리시냐고요. 방만 어질러지게….”

휘리릭 착.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산샤가 손에 든 서류를 날려버렸다.

아니타는 너저분한 바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읽기는 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지.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들인데 읽지도 않고 버리겠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서류철이 꽤 두툼해서 한 장 한 장 넘기기만 해도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고….

글씨도 엄청나게 많이 쓰여 있는데 이렇게 바로바로 ‘휘리릭 착’이라고?

산샤가 씨익 웃어 보였다, 불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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