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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35화 (35/97)

35화

모리츠와 닐스가 보이지 않는 데까지 왔는데도 산샤는 아드리안의 팔짱을 풀지 않았다.

모리츠에게 보여주기 위해 팔짱을 낀 건 맞지만, 안 보인다고 냉큼 빼 버리기에는 조금 곤란하달까, 민망하달까.

사실은 어째야 할지 잘 모르겠달까.

팔짱을 끼고 몸을 살짝 기댄 채, 향긋한 아드리안의 체취를 맡으며 묵묵히 걷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문득 아드리안이 말했다.

“이쪽으로 가면, 같은 길을 뱅뱅 도는 건데?”

산샤는 발걸음을 멈추고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죄다 새롭기만 한데, 뱅뱅 도는 거라고?

“여길 갔었나?”

“같은 길만 세 번째인걸?”

“아….”

산샤가 눈앞에 쭉 뻗은 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쉽지만, 팔짱을 풀었다.

“그럼 가요.”

“어딜?”

“어디긴 어디야? 남편감 찾으러.”

아드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웃었다.

“행동력이 좋군요.”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보면서 산샤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어요. 까딱하다간 닐스 미켈에게 발목 잡히겠잖아. …근데 어디 가서 찾지? 아델라이드에 가야 하나?”

“아델라이드에 가서 직접 줄을 세울 수는 없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미리 보고 결정해 놔야지. 대연회에서 뽑겠다고 할 수도 없잖아.”

“집무실로 가요, 준비해놓은 게 있으니까.”

턱.

이번에는 아드리안이 산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 * *

“우와! 이게 다 뭐야?”

산샤는 진심으로 놀라 버렸다.

탁자 위에 서류 더미가 쌓여 있었는데, 양이 어마어마했다.

회계 사무관이 가져왔던 서류보다 더 많았다.

아드리안이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

“현재 디아머드에 머무는 미혼 귀족 남자들을 조사한 거예요.”

“이렇게나 많아?”

“결혼할 수 있는 미혼 귀족 남자들이 다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갑자기 이혼한 타마라커도 있고.”

“아…! 투자한 게 많다던 사람.”

아드리안이 빼준 의자에 앉으며 산샤는 심각하게 물었다.

“그런 사람에게도 기회를 줘야 해요?”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서류 더미 제일 위에 있는 것을 건네줬다.

표지에는 ‘타마라커’라고 적혀 있었다.

“고르는 건 당신이니까, 기회를 주든 말든 당신이 결정해요.”

산샤는 서류철을 받아서 펼쳐보지도 않고 바닥으로 던지며 외쳤다.

“탈락!”

그러고는 서류를 막 헤집어 원하는 걸 찾아냈다.

“찾았다, 닐스 미켈!”

첫 장은 초상화였다.

구불구불 컬해서 옆얼굴에 딱 붙인 유행하는 머리에, 젠체하는 표정.

자신의 허리를 당겨 안고 비릿하게 지껄이던 닐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당신이 이토록 아름다워서 얼마나 좋은지요. …이리 와요, 귀여운 사람.]

“으으으.”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 앞에 있다면 콧대 아니라 허리를 뚝 부러뜨리고 싶었다.

산샤는 얼른 초상화를 넘겨 버리고 볼멘소리를 질렀다.

“이런 건 왜 넣은 거예요? 깜짝 놀랐잖아.”

“평생 함께할 사람을 선택하는 건데 얼굴도 중요하니까.”

“얼굴 보고 할 거였으면 당신이랑 하죠. 다른 얼굴들이야 뭘 어떻게 하더라도 당신만 하겠어요?”

“그런 말을 잘도….”

“그러게, 당신이 하라니까….”

“나는 영혼의 울림을 들을 수 있는 사람과 할 거예요.”

산샤는 서류에서 고개를 들어 그대로 아드리안을 쳐다봤다. 원망이 가득한 눈이었다.

“치사하게….”

“치사해?”

“자긴 영혼의 울림을 들을 거면서 나한테는 서류에서 찾으래.”

헐, 아드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나는 디아머드 계승자가 아니잖아.”

크흑, 분하고 억울했다. 어쩌다가 디아머드 계승자로 태어나서는….

“그래서 그럴 사람이 있기는 해요? 영혼의 울림을 들어주는 사람이?”

멈칫, 아드리안이 시선을 피했다.

머뭇거리다가 겨우 하는 대답이라니, 안 들어도 뻔했다.

“…대답을 꼭 해야 하나요?”

또 이런다. 질문으로 질문을 덮는 것.

이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그럴 상대가 있지만, 밝히고 싶지 않다는 것.

“누군데? …레이디 콘스탄틴?”

“…누구? 레이디 콘스탄틴?”

고개를 갸웃하던 아드리안이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하는 말이,

“그 콘스탄틴?”

절대 이 상황에 언급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듯한 저 태도는 뭔가.

노크도 하는 둥 마는 둥 방에 자유롭게 드나들고, 여기저기 몸을 만져가면서 책 정리를 하는 사이이면서….

물론 아드리안은 아무 짓도 안 하고 콘스탄틴이 다 했지만….

아드리안도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

“그 콘스탄틴인지 저 콘스탄틴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콘스탄틴이 맞아요. 당신과 아주 가까운 사이잖아요.”

“나는 루카하고도 가까운데?”

“루카가 영혼의 울림을 듣진 않잖아. 당신 밑에서 일을 하는 거지.”

“콘스탄틴도 일을 하니까.”

“뭐? 무슨 일? 차림새며 극적인 행동이며, …배운가? 배우를 하면서 당신을 위해 정보를 수집해?”

“맞아요, 배우.”

깜빡.

산샤는 눈을 감았다 떴다. 뭔가 굉장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배우, 맞다니까. 클라이드 최고의 스타죠. …나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해요.”

“그렇지만…. 레이디라고….”

“별명이죠.”

별명이라니!

레이디도 별명이고, 전하도 별명이고…. 죄다 별명이래.

그래, 별명이라고 하자. 별명이면 뭐라 부른들 어떠냐.

아니 그렇지만….

“…루카가 굉장히 예의 바르게 굴던데요.”

“루카는 원래 모든 여성에게 예의 바른데요?”

“나한테는 전혀 아니던데….”

이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이건 루카에게 만만하게 보였다는 고백이 아닌가.

“그러니까 왜 배우를 데려다가 책 정리를 시키고 그래요?”

“레이디를 데려다가 책 정리를 시키는 건 괜찮나요?”

끄응, 입을 다물자.

말은 하면 할수록 헛소리가 나오게 되어 있는 법이다.

그래도 콘스탄틴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 됐다. 어쩐지 상쾌한 걸?

산샤는 서류로 눈을 돌렸다.

“이게 뭐야….”

산샤는 경악해서 소리를 질렀다.

닐스 미켈, 집안의 권세는 있으나, 정작 본인은 개차반이었다.

“여자에, 도박에, 약은 안 하나?”

“다음 장 넘겨 봐요.”

넘겨 본 산샤는 순수하게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약도 하고 빚도 어마어마하네?”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산샤는 서류를 덮어 버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깨알 같은 모리츠! 이런 놈을 들이밀다니.”

“절박한 사람을 선택한 거겠죠. 절대 물러서지 않을 사람.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 사람이요.”

산샤는 산처럼 쌓인 서류를 보면서 진저리를 쳤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비슷할 거잖아. 마정석 광산 하나 보고 본인들의 삶을 팽개치고 달려온 것만 봐도 뻔하지.”

아드리안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검토는 해 봐야 하니까…. 레이디 자신이 어떤 사람들의 표적이 되는지도 알아둬야 하고….”

“가주가 되면 모리츠를 몰아내고 노예시장 철거부터 할 참이었는데, …이건 뭐, 남편감이나 찾고 있고….”

땅이 꺼져라 한숨 쉬는데,

“모리츠를 한 번에 끝장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아니…. 그렇지는 않았지만, 한 번 치면 저쪽은 두 번 치는 것 같으니까. 노예시장은 손도 못 대고….”

“노예시장은 단상이 무너져서 시장에서는 한동안 장사를 못 할 거예요.”

“아…?”

“그냥 두면 그쪽에서 먼저 레이디를 찾아올걸?”

산샤는 조용히 감탄했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준비된 조언자라니, 얼마나 멋진가.

이런 사람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있다니, 얼마나 멋진가 말이다.

이런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으면 누구랑 한단 말인가.

“아드리안, 나랑 결혼해요.”

“싫어요.”

단호한 거절.

대단해, 멋져. 훌륭해.

어찌나 빠르고 간결한지 울컥 서운한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아드리안이 말없이 다음 서류를 내밀었다.

청혼을 거절당했으니, 당신이 내민 서류는 무시해 버리겠다.

산샤는 아드리안이 내민 서류는 못 본 척하고 다시 마구 뒤져서 찾아낸 것은,

“마르틴 바이다. …황제 특사도 후보자예요?”

“디아머드를 떠나지 않은 미혼 남자이니까….”

“탈락!”

산샤는 마르틴의 서류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열어보지도 않고?”

“이 사람은 나한테는 관심 없어요. 청혼하려고 디아머드에 남아 있는 게 아니거든.”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알아요.”

“그게 아니라면 왜 남아 있겠어요?”

“당신에게 관심 있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모를 수가 없지. 당신만 바라보고…. 당신이 말 걸어주면 좋아하고, 당신이 숨만 쉬어도 즐거워하던데?”

아드리안이 마르틴의 서류를 내려다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뭔지는 몰라도 좋지 않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산샤도 마르틴의 서류를 흘겨봤다. 아드리안에게 안 좋은 것은 자신에도 안 좋으니까….

똑또도도독.

그때 빠르게 노크하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고, 아니타가 들어섰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누구?”

“마르틴 바이다 후작님이 아드리안 경을 찾아오셨네요.”

“마르틴 바이다?”

타이밍 봐라.

딱 이 시점에 마르틴 바이다가 오다니.

“바이다 후작이 왜 여기 와서 아드리안을 찾아?”

“제가 알고 싶은 게 그겁니다.”

아니타가 아드리안을 노려봤다.

“어째서 그분은 여기 와서 아드리안 경을 찾을까요? 여기 주인은 우리 아가씨, 레이디 산샤인데요.”

“…모르겠는데?”

아드리안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타가 왜 으르렁거리는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산샤도 마찬가지였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온 건 마르틴 바이다인데, 왜 아드리안을 다그쳐?

멀뚱멀뚱하게 보고만 있는 두 사람이 답답한 듯 아니타는 ‘으이그’ 앓는 소리를 냈다.

“아드리안 경이 우리 가주님에게, 도와주는 대가로 뭐든 원하는 걸 달라고 했다면서요?”

“아, 그거는….”

산샤가 나서자, 아니타는 가만히 좀 있으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다시 아드리안을 다그쳤다.

“그런 밑도 끝도 없는 계약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하녀 생활 수십 년에 그런 어이없는 계약 조건은 처음 들어봤습니다.”

산샤는 어이가 없어서 아니타를 쳐다봤다.

제 나이가 몇이라고 하녀 생활 수십 년이야?

디아머드 성에서 일한 게 하녀 경력의 전부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이건 곤란하다.

자신에게 무례한 거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아드리안에게는 안 된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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