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연락도 없이 불쑥 들이닥치다니… 무례하군요.”
산샤는 불쾌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더 심한 말을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아드리안 앞에서 품위를 잃을 수는 없어서 참아야 하는 게 안타까웠다.
이렇게 아무 때나 드나들면 쫓아낸 보람이 없잖은가 말이다.
그러나 모리츠의 반응은 뻔뻔할 정도로 태연했다.
“산샤, 이러니 네가 아직 어리다고 하는 거다. 나는 집안의 어른이 아니냐. 산재해 있는 일이 좀 많은 줄 아니? 싫어도 드나들어야지. 너에게 미리 연락하고 말고 할 새도 없어.”
“뒤에 달고 온 건 뭐예요? …치우라고 했는데, 아예 등에 붙이고 나타난 거 보면 급하기는 급했던 것 같긴 한데….”
턱이 불끈거릴 정도로 어금니를 사리물더니 신경질적으로 닐스를 잡아 끌어냈다.
주춤주춤, 어떻게든 모리츠 뒤에 숨어 있으려던 닐스가 울상이 되어 끌려 나왔다.
닐스는 하루 만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주먹 날아가는 느낌이 경쾌하다 했더니, 세게 때리긴 세게 때렸나 보다.
코는 팅팅 부은 데다 푸르죽죽하게 멍까지 들었고, 잔뜩 움츠린 어깨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까지….
“자, 둘이 이미 인사는 끝냈으니,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겠고….”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모리츠가 말했다.
“닐스 미켈 남작이다. 내가 엄선한 너의 반려야. 이야기도 제대로 나눠보지 않고 무조건 거부부터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디아머드 백작 가문이 그런 무례를 범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기엔 저쪽에서 먼저 무례하게 굴었어요. …남작? 그래서 뭐? 더 깨질 게 남았나요?”
닐스가 얼른 제 코를 가렸다. 그러고는 남은 손으로 모리츠의 옷자락을 감싸 쥐었다.
엄마의 치맛자락에 매달린 아이처럼 가여워 보였지만, 매정하게도 모리츠는 그 손을 쳐서 떨어뜨리고, 쿡쿡 찔렀다.
찌르니까 찔리는 대로 닐스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요. 우리의 인연은 깊고도 깊다고. 결국 우리가 결혼하게 될 거니까….”
“쓰읍!”
바람 삼키는 소리에도 닐스는 그대로 굳어 버렸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불안하게 움직였다.
산샤의 시선만으로도 무서워 죽겠는 모양이었다.
저러면서 어떻게 결혼하겠다고 덤비지? 안 되기도 했고,
이미 한 방 먹인 탓인지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되도록 상냥하게 상황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닐스 미켈 남작, 반려가 이미 정해졌다고 모리츠 자작이 말해주지 않던가요?”
“그, 그게….”
닐스가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지, 자꾸 혀를 날름거리며 입술을 적셨다.
“사, 사실 귀족이라는 게 혼맥으로 연결된 세력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디아머드 가문이 가장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수준에 맞는 상대를 찾아야 하는 법이고….”
이렇게 나오면 상냥하기가 불가능하잖아.
“그러니까!”
산샤는 주절주절 떠드는 닐스의 말을 끊어 버렸다.
“내 결혼은 내가 정한다고요.”
산샤는 옆에 있는 아드리안에게 팔짱을 끼며 몸을 기댔다.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사람으로.”
아드리안의 다정하게 산샤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레이디가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어쩌면 이리도 장단을 잘 맞춰줄까. 새삼스럽게 아드리안이 딱 좋았다.
모리츠와 싸우는 건 산샤의 소관이니 지켜보기만 하다가 자신의 역할이 필요할 때는 아끼지 않고 뛰어드는 행동력이라니.
게다가 연기력도 뛰어났다.
아드리안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정혼자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어찌나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지, 그저 맞춰줄 뿐이라는 걸 아는 산샤조차도 잠시 황홀해졌다.
산샤와 아드리안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고, 닐스와 모리츠는 민망해졌다.
닐스가 인상을 구기며 모리츠에게 눈짓했다. 그예 모리츠가 ‘커험’ 헛기침을 하더니 소리쳤다.
“내가 승낙할 수 없다. 내가 반대야.”
산샤가 뜨악하게 돌아보자, 모리츠는 더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아직은 집안의 어른이야. 네가 계승을 완결할 때까지는 주요 의사 결정은 내가 하는 거, 알고 있지? 그 안에는 너의 반려를 정하는 것도 포함된단 말이다.”
“어디에 그런 규칙이 있다는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안의 법이 모리츠의 말과 같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정석 광산 때문에 계승자의 결혼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제대로 된 짝을 골라서 가문의 결합을 이뤄내야만 했다.
대체로 사랑이 넘치는 부모가 자식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했기에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후견인이 생길 줄은 조상들도 모르셨겠지.
산샤가 생각에 잠긴 것을 보며 모리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산샤와 아드리안의 분위기를 깨는데 자신의 발언이 조금은 유효했나 보다.
당장 결혼식을 올릴 것 같아서 얼마나 식겁했는지 모른다.
집안의 어른으로서의 목소리도 못 내보고 좌절당하나 했다.
크흐음, 모리츠는 목을 가다듬고 잔뜩 근엄하게 말했다.
“그러니 나는 가문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너의 반려를 정하기로 했으니….”
“좋아요.”
산샤는 모리츠의 말을 끊어 버렸다.
아무리 집안의 법이 그렇다고, 모리츠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따를 수는 없잖은가.
규칙은 어기라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아주 무시해 버릴 수도 없는 일.
“기왕 이렇게 된 거, 구혼자들의 줄을 세워 보죠.”
“뭐?”
“마침 디아머드엔 나와 결혼하고 싶은 남자들이 드글드글 많기도 하더군요. 그 안에 숨은 인재가 있을지도 모르니 모두에게 기회를 주겠어요.”
“이렇게 또…. 뭘 모르는 소리를…. 그랬다간 디아머드가 발칵 뒤집힐 거다.”
“디아머드 아니라 라인하르드가 뒤집힌다 해도 대수인가요. 나의 반려를 정하는 일인데?”
“그럴 필요 없이 너에게 딱 맞는 남편감을 내가 구해 왔다지 않니.”
모리츠가 닐스를 산샤에게 더 바짝 밀었다. 그에 맞춰 닐스가 배시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 사람이 경쟁에서 이기면 한번 생각은 해볼게요.”
“헛소리!”
모리츠가 버럭 소리를 질렀고,
“헛소리?”
산샤가 한 발 나서자, 닐스는 냉큼 뒤로 물러섰다.
“이것 봐요. 나에게 딱 맞는 남편감이라고 할 거면, 적어도 나를 무서워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어요?”
닐스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나는 레이디를 무서워하지 않아요. 이토록 사, 사랑스러운 레이디가 무서울 리가 있나요, 하. 하. 하.”
어색하게 웃는데, 손은 바들바들 떨려.
모리츠도 더 할 말은 없는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는 게 어쩌면 이렇게 상쾌할까.
산샤는 아드리안을 잡아끌었다.
“가요, 아드리안. 산책하기로 했잖아요.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아주 많아요.”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그러나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산샤와 아드리안은 자연스럽게 모리츠를 밀쳐냈고, 그대로 가버렸다.
산샤가 아드리안에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반려인 당신에게 디아머드 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다아- 보여줄게요.”
발걸음은 얼마나 빠른지 벌써 저만큼 가버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모리츠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닐스를 무섭게 노려봤다.
“이렇게 머저리인 줄 몰랐네. 여자를 휘어잡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지 않았나? 못 자빠뜨린 여자가 없다고 했잖아.”
닐스는 언제 벌벌 떨었냐는 듯 돌변해서 모리츠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제 코를 가리켰다.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이렇게 무지막지한 여자라는 소리는 안 했잖아요.”
“여자한테 얻어맞은 주제에 할 말이 있다 이거야?”
“여자가 때리면 맞아야지, 뭐 어쩝니까?”
“한심한 인간 같으니라고,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다.”
순간 닐스의 얼굴이 구길 대로 구겨졌다.
머리카락을 홱 잡아 날리는 손놀림도 거칠었다.
모리츠의 비난에 분노의 스위치가 눌린 것 같았다.
그는 모리츠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나야말로 뭐 하는 짓이냐고 묻고 싶다. 다 차려놨다고 먹기만 하면 된다고 불러들이지 않았어?”
“그렇다고 내가 떠먹여 줄 수는 없잖아. 포크와 나이프를 드는 수고 정도는 해야지.”
“보라고, 이걸 봐.”
닐스가 턱을 치켜들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모리츠에게 보여줬다.
“이게 어떻게 포크와 나이프를 드는 수고냐고. 결혼 좀 하자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줄은 몰랐지.”
헐. 모리츠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뱉었다.
“목숨을 걸 정도까지는….”
그러나 말을 끝까지 다하지 못했다. 닐스가 노려보는 눈에 괜히 오금이 저렸으니까.
산샤 앞에서는 겁 많은 토끼인 양 데굴데굴 눈동자만 굴리고 있더니, 눈초리 매섭기가 어마어마했다.
눈초리만 보면 사람 죽이는 것쯤은 쓱싹 가볍게 해 버릴 것만 같았다.
“큰 걸 바라는 게 아니야. 당신이 호언장담했던 걸 실행하라는 것뿐이지.”
이를 빠드득 갈고 눈까지 부라리더니, 귀에 쏙쏙 박히도록 또박또박 덧붙이기까지 했다.
“못 해내면 당신부터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내가 못 할 것 같아?”
이렇게 본색을 드러낸단 말이지?
겁이 더럭 날 정도로 닐스의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모리츠는 일단 입술 끝을 과도하게 늘리며 히죽 웃어 보였다.
조심스럽게 닐스의 어깨를 다독이기도 했다.
“원래 이런 일은 혼자보다는 둘이 힘을 합치는 게 더 효과가 있지 않겠나.”
“그래서 어쩌라고? 이번엔 팔이라도 하나 부러져 오라고?”
끄응, 모리츠는 앓는 소리를 내며 대답을 피했고, 신음 끝에 중얼거렸다.
“…스스로 이길 생각은 못 하고….”
“뭐가 어쩌고 어째?”
“뭘 또, 흥분하고 그래? 이런 일은 흥분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작전을 짜야지.”
“무슨 작전?”
잠깐 궁리하던 모리츠가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하녀가 하나 있어, 아니타라고. 그 애를 만나 보지.”
“그럼 될까?”
“돈이면 다 되는 애거든. 게다가 여자 아닌가.”
닐스가 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라면 자신 있죠. 못 자빠뜨린 여자가 없다니까.”
* * *
복도를 걷던 아니타는 귀를 후벼 팠다.
“누가 내 흉을 보나? 왜 귀가 가렵고 난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