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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33화 (33/97)

33화

아드리안이 디아머드 성에 들어간다고 할 때 루카는 좋아서 방방 뛸 뻔했다.

레이디와 전하, 아주 기특해 죽겠다.

우리의 전하가 이젠 정말!

행복해지실 일만 남았구나.

레이디가 내 준 방도 봐라.

전하가 디아머드 성에서 지낼 때 사용하던 방이 아니냐.

레이디가 다 잊어버린 거 같아도 기억 저 바닥에는 남아 있는 거다. 그때의 눈부셨던 날들이.

이렇게 들어간다고 했으니 디아머드 성에서 못 나오게 해야지.

레이디와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게 해야지.

절대, 절대, 절대!

꼭, 꼭, 꼭!

루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전하, 저 왔어요.”

끙차, 탁자 위에 짐을 부리고 루카는 감회에 젖어 방을 둘러봤다.

“우리 전하, 드디어 제자리로 돌아오셨군요.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

“루카….”

창밖을 보고 있던 아드리안이 돌아보다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 이게 다….”

루카는 아드리안의 시선을 따라 탁자 위에 산더미같이 쌓인 것을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우선 급한 것만 챙겨왔어요. 차차 몇 번 더 옮기면 다 옮길 수 있어요.”

“너,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루카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잘못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려자로서 입성하신 거잖아요. 거기에 딱 맞게 준비해 온 겁니다. …맞잖아요, 반려자.”

“표면적으로만 그렇지.”

“내면적으로도 그렇죠.”

“…진짜 반려자를 찾을 동안 불필요한 접근을 막으려고 있어 주는 거잖아. 며칠이면 될 거야.”

“전하를 능가할 사람을 어떻게 며칠 안에 찾습니까? 대연회 안에 못 찾고요. 평생 찾아도 못 찾습니다.”

“루카…!”

아드리안이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자 루카는 외쳤다.

“단 하루를 지낼지라도 다 필요한 겁니다. 필요 없는 건 하나도 없다고요.”

“…가져오라는 서류는 안 가져오고.”

“그것도 다 가져왔거든요. 레이디 집무실에 다 가져다 놨단 말입니다.”

아드리안은 못마땅한 표정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다시 돌아서 보던 대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말이든 모조리 반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던 루카는 푸시식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루카는 아드리안 곁으로 다가가 섰다.

그러나 창밖은 볼 게 없었다.

말 그대로 황무지, 그저 붉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맨땅이었다.

“뭐 아무것도 없는데요. 뭘 보시는 거예요?”

“예전엔 마리에 부인의 허브 정원이었어.”

“예전을 떠올리고 계셨어요?”

루카는 새삼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레이디가 저 홈통으로 기어올랐잖아요. 문으로 들어와도 되는데 꼭 벽을 타. …전하는 여기에서 정말 행복하셨는데, 하아…. 전하?”

루카는 은근하게 아드리안을 불렀다.

“이제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천년만년 살아요. …영원히 행복하게.”

아드리안이 그저 무심하게 루카를 볼 뿐이었다.

아드리안의 무심한 표정은 언제나 아팠다. 불행했던 황태자 시절이 생각나서 한없이 어둡고 슬펐다.

특히 이렇게 각 잡고 바라볼 때는 더욱더.

아드리안이 말했다.

“내 존재 자체가 산샤를 위험하게 할 거야.”

“아니, 무슨 그런….”

“행복할 수가 없어.”

뭐, 이런, 담담한 결론이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이게 무슨. 비극의 세레머니냐고.

“아니, 왜요? 전하가 무슨, …비극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레이디랑 전하가 왜 행복할 수 없어요?”

“호레스 밀란이 나를 찾아낼 거다. 산샤와 같이 있으면 더 빨리 찾겠지.”

“아니…, 그런…, 그런 놈의 거를….”

루카가 차마 말을 다 하지 못했다.

호레스 밀란도 마정석 광산을 노릴 테니 이곳에 집중할 테고, 그러면 아드리안을 알아보는 것은 시간문제이기는 했다.

“…그래서 어쩌려고요?”

“내가 사라져야지. …계승이 완결되면 떠난다.”

“갈 데도 없는데….”

“갈 데는 없지만 해야 할 일은 있잖아.”

“우리가요?”

“황태자의 의무. 반역자를 처단하고 황위를 되찾아야지.”

죽겠다는 건가?

아무리 클라이드의 수호자라고 해도, 북부 변방 작은 길드의 수장일 뿐.

명실공히 제국의 주인인 호레스 밀란을 어떻게 처단하고 황위를 되찾는다는 거야.

“농담이시죠?”

아드리안은 대답 대신 피식 웃었고, 루카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가져왔던 짐들을 주섬주섬 다시 챙기기 시작했다.

“그럴 거면, 아예 지금 떠나는 게 좋겠어요. 계승까지 봐야 할 건 뭐예요. 당장, 당장 여기에서 나가자고요.”

“진정해, 루카.”

“진정을 못 하죠, 제가!”

루카는 아드리안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요, 전하. 호레스 밀란은 못 이겨요. 라인하르드에 있는 모든 귀족이 모조리 약 빨고 갑자기 전하를 지지하고 나서지 않는 이상, 이길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대로 두면 산샤를 압박하겠지.”

“압박이야 하든지 말든지….”

“내가 처리해줘야 해.”

“아니, 전하…. 지금까지 보호하고 지켰으면 그만이지, 호레스 밀란까지 처리해 줄 건 없잖아요.”

“산샤는 내가 지켜.”

“될 싸움을 하셔야죠.”

“될 때까지 해야 할 싸움이니까.”

그때였다.

“아드리안!”

아드리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리안과 루카는 동시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산샤가 정원이었던 그곳에서 아드리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

산샤를 보는 아드리안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평생 웃는 게 뭔지 모르고 살 것 같던 우리 전하가 레이디만 보면 웃는 게 그렇게나 좋았는데….

루카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디 산샤, 우리 전하 좀 어떻게 해줘요.

우리 전하는 언제 행복해지냐고요.

* * *

어머니의 허브 정원이 보고 싶었다.

다른 귀족 부인들이 유리 온실에 장미를 심고 가꿀 때, 마리에는 지붕으로 가리지 않는 땅에 허브를 심었다.

풀이 향긋해서 좋다고.

꽃이 아니라 잎이 주인공인 게 신기하지 않냐며.

아무렇게나 해도 잘 자란다면서도 얼마나 애지중지 가꾸셨는지.

어머니의 허브 정원은 언제나 푸릇푸릇 생기가 넘쳤다.

그랬던 허브 정원이 온데간데없다.

뿌리만 살아 있으면 언제든 다시 나고 얼마든지 번져갈 수 있는데, 그 뿌리 한 조각을 안 남기고 맨땅 흙밭을 만들어 놨다.

쓸데없이 성실한 모리츠, 깨알 같은 놈.

우울해지려는 순간 아드리안이 보였다.

“아드리안!”

산샤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아드리안이 내려다보고 미소 짓자 눈이 부셨다. 태양을 보는 듯했다.

“방은 마음에 들어요?”

아드리안이 빙긋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산샤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당신이 여기에서 지내는 동안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이미 그러고 있어요.”

“할 말이 있었는데….”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어, 왜? 내려오게요? 아, 아니…. 꼭 굳이….”

굳이 내려올 건 없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아드리안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참 빠르기도 하다.

벌써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나?

그가 복도를 지나 계단을 달려 내려오는 모습을 상상하자 심장이 두근거리고, 이해할 수 없는 설렘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산샤는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아니,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가버리면 어떡해. 말을 듣고 움직여야지.”

“말해요. 듣고 있으니까.”

으헉! 산샤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어느새 아드리안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사람이 바람도 아니고!

이렇게 빨리 움직여도 되는 거야?

심장은 벌렁거리고 숨이 막혔다.

요란스러운 산샤의 반응을 보며 아드리안이 피식 웃었다.

“놀라게 해놓고 웃다니….”

“미안해요.”

“사과라면서 별로 미안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할 말이 있다면서요.”

할 말이라는 게 별말이 아니었단 말이다.

사무관과 일이 남아 있어서 제대로 안내하지 못해 미안하다.

이런 말이나 하려고 했는데….

뭘 이렇게 달려 내려오냐, 민망하게.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정원이 이 모양이라서 미안해요. 원래 이렇지는 않았는데….”

“아름다웠죠. 손을 하나도 대지 않은 듯 자연스러웠지만,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 써서 가꾸셨으니까.”

어떻게 알았지?

마치 자기 눈으로 본 것처럼 말하네.

어머니의 정원이 딱 아드리안이 말한 것처럼 생겼었다.

자기들끼리 흐드러지게 피어 어우러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상태가 되게 하려고 어머니가 하나하나 만든 거였으니까.

아드리안이 산샤의 시선에 머쓱하게 웃더니 덧붙였다.

“마리에 부인의 허브 정원은 북부에서 유명했으니까요.”

“…그…랬어요?”

“일 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정원을 개방하기도 하셨죠. 누구나 원하는 사람은 보러 올 수 있도록.”

“아…!”

그건 산샤도 확실히 기억났다.

일 년에 두 번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택해 길면 열흘까지도 정원을 개방하곤 했었다.

“그때 봤군요.”

“그때…, 봤죠.”

“우리 어머니는 꽃보다는 풀을 좋아하셨어요. 풀마다 다 다른 향기가 났거든요. 그래도 제일 좋아하던 건 카모마일이라는 꽃이에요. …카모마일 알아요? 가운데가 달걀노른자같이….”

“달콤한 사과 향이 나는 꽃이죠.”

“맞아요. 그거!”

당신이 내 어머니의 꽃을 아는구나.

어머니의 꽃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편이었다.

“비밀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산샤는 은밀하게 3층 창을 가리켰다.

“나, 저기에서 해님을 본 적이 있어요.”

아드리안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산샤는 자신이 가리킨 곳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방이네요.”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시선이 부딪치자 화들짝 고개를 돌리던 산샤는 멈칫했다.

왜 피하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릴 때 추억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생길 건 뭐람.

“뭐, 어쨌든…. 정원을 막 뛰어다니며 노는 데 너무 눈이 부신 거예요. 그래서 봤더니 저기에 해님이 있었어요. 그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엄청나게 행복했다니까.”

순간 아드리안은 슬쩍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산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요?”

“아니. 그냥….”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괜히 웃었다.

아드리안이 계속 피식피식 웃자 산샤는 영문도 모르면서 따라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웃는 산샤가 웃긴지 아드리안이 웃었고, 그걸 보고 또 산샤가 웃었다.

피식피식 주거니 받거니 서로 마주 보며 웃다가, 산샤가 말했다.

“우리 좀 바보 같지 않아요?”

그러자 아드리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조금?”

까르르 산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양.

마냥 즐겁다는 듯이.

그런 그녀를 보며 아드리안도 하하하 크게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그때였다.

“…뭐가 그렇게 즐겁니? 둘이서만 재미있는 일이 있는 거야?”

언제 왔는지 후원 입구에 모리츠가 서 있었다.

코가 잔뜩 부어오른 닐스를 달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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