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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32화 (32/97)

32화

산샤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너희 중에선 선택하지 않겠다 어쩌고 말을 섞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자신이 가진 비장의 수를 꺼내는 수밖에.

“의견은 잘 들었어요. 그렇지만 그건 나에게 정해진 반려가 없을 때 이야기지.”

순간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눈짓으로 의견을 나눴고, 다시 타마라커가 나섰다.

“레이디는 정혼한 사람이 없잖습니까?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요.”

“어머나, 저런. 잘못 알고 있었군요? 어떡하나.”

산샤는 흠뻑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아드리안을 바라보고 팔짱을 꼈다.

아드리안이 반사적으로 산샤를 내려다보며 입술 끝을 살짝 치켜 올렸다. 사람에 빠진 남자처럼.

산샤는 더욱 활짝 미소 지었다.

아드리안이 도와줄 줄 알았다.

자신의 취향은 아니더라도, 필요할 때는 외면하지 않는다.

크흑, 타마라커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이럴 줄 알았어. 클라이드의 수호자가 선수 쳤을 줄 알았다고! 경들! 이걸 그냥 두고 보고 있을 겁니까? 철없는 레이디가 근본도 모르는 놈에게 홀렸는데…. 내놓을 거라고는 황홀한 외모밖에 없는 놈을….”

“타마라커 남작!”

산샤가 쨍한 냉기를 품어내며 타마라커를 노려봤다.

그래도 타마라커는 정신 못 차리고 우겼다.

“나는 귀, 귀족의 일원으로서 레이디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막을 의무가….”

“어디서 감히 아드리안의 아름다움을 폄훼하는 거예요? 당신이 못 생겨서 자괴감이 든 건가?”

“뭐, 뭐라고? 내가 어디가 어때서?”

“거울을 좀 보고 오든가. …루카, 뭐 해? 다 내보내지 않고.”

한쪽 찌그러져 있던 루카가 벌떡 일어났다.

“예! 레이디! …자, 자. 사정을 아셨으니 그만 나가 주십시오. 나가세요.”

똥파리들을 몰아내는 루카는 신이 났다.

“레이디가 나가라고 하질 않습니까. 레이디께서 가서 거울이나 보라고 하십니다.”

기세등등하게 달려왔던 똥파리들은 맥없이 밀려 나갔다.

반려를 이미 정했다는데 어쩌겠는가.

똥파리들의 멀어지는 소리를 듣던 산샤는 아드리안을 돌아봤다.

앞으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아드리안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 협상을 해볼까요?”

* * *

산샤는 아델라이드 밖으로 나섰다.

아드리안과 말을 많이 했는데 정작 중요한 것을 빼먹은 것 같았다.

그런데 뭘 빼먹었는지 몰라서 짙은 안개 속에 갇힌 느낌 같달까.

무엇인가가 자꾸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아드리안이 내일 디아머드 성으로 오기로 하긴 했는데….

그걸로 해결 안 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미적미적 한 발 가고 돌아보고 또 한 발 가고 돌아보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루카가 달려 나왔다.

“레이디, 잠깐만요. 레이디 산샤!”

산샤는 반색하며 돌아섰다.

“왜 루카? 뭔데?”

“잠깐만 기다리세요. 마차를 준비해드릴게요.”

“…겨우 마차 때문에 그렇게 숨넘어가게 부른 거야?”

“예? …겨우 마차라니요?”

루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산샤를 흘겨봤다.

“저 사람들이 이대로 끝낼 거로 생각하시면 안 된다고요.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어쨌든 꼼짝 말고 계세요. 마차가 금방 준비되니까….”

“그럴 필요 없어.”

“위험하다고요. 애초에 귀한 레이디가 수행원도 없이 다니는 것 자체가 문제예요. 그러고 다니니까 채찍이나 맞고 다니고…. 일만 키우는 거 아니냐고요.”

“아니…. 혼자 가겠다는 게 아니라….”

“왜요? 이번에도 클라이드 사람들을 죄다 몰고 가시려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기는 뭐가 자꾸 아니에요? 여기 꼼짝 말고 계세요. 제가 성에 모셔다드릴 테니까. 또 애매한 사람 채찍 휘두르게 하지 마시고….”

“아니…. 진짜 그게 아니라니까는….”

“아닌 게 아니라고요. 꼼짝 말고 계시라고요.”

그때였다.

“동작 그만!”

걸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카와 산샤는 동시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쿵쾅쿵쾅.

아니타가 씩씩대며 달려오고 있었고, 그녀 뒤에는 채찍을 든 딕키가 뒤따르고 있었다.

“누구야? 누가 우리 가주님에게 채찍을 휘두른단 말이야?”

“어떤 놈이야? 손모가지를 확 분질러 버릴라.”

“다리몽둥이도 분질러 버려.”

아니타와 딕키가 주거니 받거니 장단 맞춰 외치는 걸 보며, 루카는 산샤 뒤에 숨었다.

“저, 저게 다 뭡니까?”

“혼자 아니라고 했잖아. 모리츠 마차에 억지로 태워져서 그렇지, 나도 이제 수행원을 데리고 다닌단 말이야. 내 전담 하녀와 패거리들이야. 랄프는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무슨…. 뭐라고요?”

“아니타와 패거리.”

산샤의 부름에 응하듯 아니타가 우렁차게 외쳤다.

“누굽니까, 아가씨? 누가 괴롭혀요?”

딕키가 말아 쥔 채찍을 흔들면서 루카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래서 네놈이냐? 우리 가주님 앞에서 채찍을 휘두를 수는 있는 것은 가주님의 호위인 이 딕키뿐이란 말이다.”

아니타가 다시 윽박질렀다.

“말해라! 네놈이냐고?”

“아니…. 그럴 리가요.”

루카가 두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산샤를 바라봤다.

“레이디?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하하하, 산샤는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덩치로는 자기 절반밖에 안 되는 아니타가 뭐가 무섭다고.

“아니타, 그만해. 그만하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야.”

“그만하기는 뭘요? 제가 아직 한 게 없어요.”

“맞습니다. 제대로 채찍 맛을 보게 해줘야죠.”

“채찍을 들먹이는 자, 채찍으로 망하리라.”

아니타와 딕키는 작정한 것 같았다.

연습하고 왔나?

어쩜 이렇게 쿵, 짝, 쿵, 짝. 딱딱 맞지?

“아니타, 가서 랄프에게 마차를 가져오라고 해.”

“안 돼요. 제가 딱 지켜드리고 있어야죠.”

“지키려면 제가 지켜야죠. 아무래도 매운 채찍이 믿음직하지 않겠어요?”

딕키가 끼어들었다.

“아니타는 내놓을 게 뭐 있나? …뭐, 말발?”

“이 사람이 진짜…. 나도 한다면 하는 여자라고. 내 주먹맛을 좀 볼 테요?”

“그만!”

산샤가 둘 사이를 갈라 세웠다.

“아니타, 딕키, 그만 가라고. 루카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아니타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고 딕키도 콧구멍을 벌름거리기는 했지만, 산샤의 말에 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서자, 산샤는 사과부터 했다.

“미안해. 저들이 좀…. 신났나 봐.”

“놀라운 충성심과 우악스러움이네요. 짧은 순간에 엄청난 사람을 얻으셨어요.”

“그렇지?”

“근데 이게 다예요? …무례한 하녀와 어설픈 상인과 마부?”

“기사도 있어.”

“예에?”

루카가 화들짝 놀라며 새삼스럽게 산샤를 우러러봤다.

“기사단의 충성 서약도 받아내신 거예요?”

산샤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기사단까지는 아니고, 믿음직한 사람 하나. 그래도 일당백은 해낼걸.”

“하아…. 레이디, 정말….”

루카가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말했다.

“혼자 안 다니시는 건 좋은데, 아무래도 제대로 훈련받은 호위가 필요하시겠어요.”

“아니타가 들으면 화낸다?”

“화내면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아니타쯤이야….”

번쩍 산샤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아니타!”

“으헉!”

루카가 질겁했다가, 장난이었다는 것을 알고 발을 동동 굴렀다.

“잘 있어, 루카. 내일 보자. 안녕.”

산샤는 마침 도착한 마차를 타고 출발해 버렸다.

* * *

마차에 앉아 산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힐끔힐끔 산샤의 눈치를 살피던 아니타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아가씨?”

산샤가 아니타를 돌아봤다.

“응?”

“수행원은 처음 해본 거라 너무 신나가지고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그렇게 사람이 멍하게 있어요?”

“그냥 뭐 좀….”

산샤는 툭 던지듯 말했다.

“나랑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더라. 모리츠가 데려온 놈만 있는 게 아니었어.”

“뜬금없이….”

“아델라이드에… 다 나랑 결혼하겠다는 사람들이더라.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있는 거래.”

“어이가 없네.”

아니타가 대차게 콧방귀를 꼈다.

“여태 그걸 모르고 계셨어요?”

“몰랐던 건 아니지만….”

“저놈들이 아가씨한테 뭘 노리고 있는지는 알죠? 정신 꽉 붙들어 매고 있어야 해요. 저것들이 마정석 광산이 아니면 아가씨를 거들떠나 보겠냐고요.”

말이 은근히 기분 나쁘다?

“무슨 뜻이야? 마정석 광산이 없으면 나는 평생 반려도 못 찾을 거라는 거야?”

“어머…!”

아니타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게 그런 뜻이겠어요? 아가씨가 안 예쁘다거나 뭐 문제 있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만큼 그 귀족 나리들은 마정석 광산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죠.

…어떤 사기꾼 같은 놈들에게 걸려들까 봐 걱정이다. 그런 거고요. 벌써 느끼한 놈…이 아니고, 귀족 신사분도 들이대고 있잖아요.”

“신사분은 무슨….”

“…어쨌든 되도록 빨리 반려를 정해야죠. 안 그랬다간 별별 똥파리가 다 들러붙을 걸요.”

“아드리안이 해주기로 했어.”

“예?”

아니타가 눈을 꿈뻑꿈뻑 떴다 감았다 고개까지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뭐를요?”

“반려를.”

“그걸 어떻게 해요?”

이번에는 산샤는 눈을 깜빡깜빡 떴다 감았다가 했다.

질문이 왜 이러지?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는 말인데?

“어떻게 하기는…. 사람들에게 나하고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거지.”

아니타는 대꾸하지 않았다.

혼자 허공을 보며 한참 깜빡거리다가, 끝내는 이상한 표정으로 산샤를 훑어보면서도 입만은 꾹 다물고 있었다.

오히려 답답한 건 산샤였다.

“뭐? 왜?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 혼자 그러고 있지 말고.”

“그게…. 모르는 분이라면서요?”

“모르는 사람 맞아.”

“그런데 반려를 해요?”

“계약한 거야. 네 말대로 똥파리가 들러붙을 거니까 그들을 피할 수 있도록 방패가 되어주는 거지.”

“…나중에 진짜 반려를 찾았다고 곱게 물러난대요?”

“내가 취향이 아니라는데 뭐.”

헛, 아니타가 헛웃음을 웃었다.

“답답하시네. 결혼을 취향으로 하나요? …어쩌려고 그러세요? 저 똥파리들은 귀족이기나 하지. 아드리안 경은 뭐….”

“부자래.”

“예?”

“아드리안도 돈이라면 어마어마하게 많대.”

“정말요?”

“마정석 광산 같은 거 하나도 안 부럽다던데?”

쓰읍, 아니타가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은 채로 산샤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돈이 많다면야, 뭐…. 그나저나 이상하네요.”

“하나도 안 이상하니까, 3층 게스트룸이나 청소해 두라고 해. 내일 아드리안이 올 거야.”

“3층이요? 별채가 아니고요?”

“왜? 이것도 이상해?”

아니타가 눈을 깜빡거렸다.

“직접 생각해 보세요, 안 이상한가. 게스트룸은 별채잖아요. 갑자기 웬 3층이래?”

그게 뭐? 그럴 수도 있지.

방이 있으니 주는 거지 뭐, 없는 방 내놓으랬나?

아드리안에게는 3층 방을 줘야만 할 것 같은걸,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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