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충분한 보상을 받고 파혼할 사람으로 찾아줄 테니….”
“아니, 뭘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말을 하려다 말았다.
어떤 수고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본인은 하기 싫다는 거잖아?
살짝 서운해지려고 하네.
진짜 결혼하자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싫어할 일인가?
심통도 났다.
할 테면 해보라지.
클라이드의 수호자 능력 좀 발휘해 보시라고.
“그래요. 굳이 당신이 수고를 하겠다면 믿고 맡겨 볼게요.”
아드리안이 의뢰를 받아들이는 사업자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계약서를 작성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아아, 정말….”
루카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간절하게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실 건가요?”
루카의 과도한 실망이 조금 위안이 되었다.
루카가 원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헷갈리기는 했지만.
아예 상대하지 말고 쫓아내라는 건가?
진짜 결혼하라는 의미로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흐윽, 루카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대로 두면 대성통곡이라도 할 기세였다.
“루카! 쪼옴. …아드리안이 안 한다잖아. 다른 사람 구해온다잖아. 왜 그래, 진짜. 기분 상하려고 하네.”
루카가 울먹였다.
“레이디는 모르십니다. 우리 전하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당연히 모르지. 어떻게 알아? 말이나 해주면서 알라고 하든가.”
루카가 희번덕 흰자를 드러내며 덤벼들었다.
“말을 해드려요? 예? 정말 해드리면,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왜 이러니? 겁나려고 한다.
두어 걸음 물러나는데, 아드리안이 루카를 저지하고 나섰다.
“루카, 그만해.”
“전하! …전하아아!”
“루카!”
아드리안을 부르는 루카는 애절했고, 루카를 부르는 아드리안의 음색에는 난감함이 묻어 있었다.
평소 이름 두 번 불러서 명령을 따르게 하던 아드리안이 아니었다.
차마 눈 뜨고는 못 보겠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만 내려가 봐, 루카. 아델라이드를 너무 오래 비웠어.”
“하지만…. 그래도…. 굳이…, 꼭…?”
몇 번이나 반항하려던 루카는 결국 명령대로 움직였고,
그가 나간 뒤에 아드리안이 깍듯하게 사과했다.
“루카가 너무 과하게 반응해서, …미안해요.”
“당황스럽기는 하네요. …귀한 전하가 귀찮아질까 봐 그랬나 봐요. 엄청난 충심이네요.”
“…디아머드 성으로 돌아갈 마차를 준비시켰어요.”
“가라고요?”
“안 가나요?”
“가긴 가야죠마는…. 할 이야기가 더 남아 있지 않나요?
아드리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새삼스럽게 산샤를 돌아봤다.
“무슨 이야기를?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은데…. 반려를 찾아주겠다고 했잖아요.”
“찾아질 때까지는 반려를 하고?”
멈칫, 굳어 버렸던 아드리안이 한참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반려가 구해질 때까지는 내가 그 역할을 할게요.”
“설명도 듣고 싶어요. …호수 축제에서 약속했다느니…. 어떻게,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급한대로 자신이 모리츠에게 했던 말과 똑같아서 신기했다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아드리안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그거 외엔 답이 없으니까요.”
그렇게까지 대수롭지 않아?
“레이디가 성인이 된 다음엔 따로 약속할 여유도 없었으니, 어렸을 때 했다고 해야만 했고….”
“호수 축제는?”
“어릴 때 한 약속이라고 하면 소꿉장난이라고, 무시할테니, 글라키에스를 들먹일 수밖에 없었죠.”
“아….”
“레이디도 같은 이유로 같은 답을 했을 것 같은데?”
같은 답을 했다는 것도 알아.
이거야말로 정해진 답이었던 거네.
“감시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던 건데….”
“지켜보기는 한다니까, 나는 수호자이고 클라이드에서 디아머드 백작 가는 꽤 영향력이 있으니까….”
“예에, 그렇군요.”
“레이디의 지위나 재산을 탐내는 건 아니에요.”
“그건… 알아들었어요. 줘도 싫다고 표를 다 냈잖아.”
“…?”
“그렇게까지 수선을 떠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랬나요?”
“이해는 해요. 나는 실례를 범했으니까, …당신에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을 텐데 말이죠.”
아드리안이 잠깐 머뭇거리긴 했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뭘 또 저렇게 금방 인정을 하는 걸까. 산샤는 삐쭉 입술을 내밀었다.
“싫지는 않았다고, 단지 예상 못 했던 일이라서 당황했던 거라고.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말하면 달라지는 게 있나요?”
산샤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마지막 질문! …그건 어디에서 들었어요? 길가에 핀 이름 없는 들꽃이라도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
“아….”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글쎄, 어디에서 들었을까요?”
“잘 생각해 봐요.”
산샤가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아드리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디에서 들었냐’니….
너에게서 들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자객 습격 사건 이후, 아드리안이 디아머드 성에서 숨어 지내던 어느 날, 산샤가 아드리안 창에 나타났다.
홈통을 타고 벽을 기어 올라왔었다. 밑에서 노는데 막 빛이 나더라면서….
[올라오면 해님을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는 해님이 아니구나? 실망이야! 속았네, 속았어.]
어찌나 실망을 하던지, 아드리안은 자신이 해가 아닌 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미안, 내가 해님이 아니어서…]
그러자 또 산샤는 정색을 했다.
[뭐가 미안? 네가 스스로 해님이라고 한 적도 없는데…. 넌 누구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때의 아드리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가치도 없다.
황제가 되는 것만이 자신이 가진 유일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 놓쳐 버렸으니까.
그러나 산샤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닌 건 없어. 길가에 핀 이름 없는 들꽃도 다 의미가 있는걸.]
산샤가 배시시 웃었다.
[멋있지? 우리 어머니 말이야. 너무너무 멋있어서 내 좌우명으로 삼고 있어.]
멋있었다.
황제가 되지 못하는 자신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거라서 고맙기도 했다.
그때부터 아드리안은 살아볼 용기를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너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
나만 기억하고 있는 우리의 처음이니까.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모르겠군요. 어디 책에서 읽은 것 같기도 하고…. 흔히 볼 수 있는 말이니까요.”
산샤가 고갸를 갸웃했다.
“흔한 말인가요? 대체로 태생이 사람의 가치를 정한다고 하던데….”
“그건 내세울 게 혈통밖에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겠죠. 혈통을 타고나서 특권을 누리는 게 갚아야 할 빚이 되는 건 모르고….”
“어?”
산샤는 화들짝 놀라고, 외쳤다.
“그것도 우리 어머니가 한 말이에요. 당신은 그것도 책에서 읽은 말인가요?”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산샤는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와아, 진짜 이거…! 우리 뭐 있나 봐. 맞아떨어지는 게 엄청 많잖아요.”
“그런가…요?”
신이 난 산샤와는 다르게 아드리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우연이 겹친 거겠죠. 우리 사이에 뭔가 있다고 하기엔 레이디가 모르는 게 너무 많잖아.”
“그건 또 그래. 내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천재인 줄 알았는데…. 최근에 보니까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더라고요. 그렇지만….”
산샤는 장난스럽게 장담했다.
“있기만 해 봐요. 결국엔 다 기억해 버릴 거니까.”
웃으라고 한 말인데, 아드리안은 웃지 않았다. 그저 말갛게 보고만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긴 하는데, 무슨 생각인지 짐작도 안 되어서 답답했다.
그때였다.
“아아악!”
밖에서 루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무례한 행동은 클라이드의 수호자가 용서하지….”
“저리 비켜!”
무지막지한 고함이 루카의 말을 끊어버렸다.
“클라이드의 수호자가 독식하게 둘 거 같아? 당장 내놓으란 말이야.”
“내놓기는 뭘 내놓으란 말입니까? 물건입니까?”
“물건이면 뭐? 내가 투자한 게 얼만데? 비키라고! 당장 비켜.”
멀뚱멀뚱하게 밖의 소란을 듣고 있던 산샤와 아드리안은 서로를 바라봤다.
“밖에 무슨 일일까요?”
산샤의 질문에 언제나 모르는 것 없이 여유 만만하던 아드리안도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겠는데?”
“혹시… 저러다 루카는 또 밟히려나?”
“밟혀?”
아드리안이 미처 무슨 뜻인지 모르고 반문하다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츠에게 차여서 굴러 들어오던 루카가 생각났으니까.
“설마….”
하루에 두 번이나 그런 일이 있겠냐고 말할 참이었는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루카가 데구르르 굴러 들어왔다.
“커헉, 아드리안 경….”
만신창이가 된 루카가 아드리안을 부르짖는데, 문틀을 딱 짚고 선 빨간 머리 남자가 소리쳤다.
“아, 여기 있군, 레이디 산샤.”
마치 잘 아는 사이인 양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그 남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불콰하게 달아오른 건 술에 취해서인가?
산샤는 슬쩍 물러서며 루카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이 남자 뭐야?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난 루카가 대답했다.
“타마라커 남작입니다. 레이디의 계승식을 보려고 이혼하신 분이지요.”
“어?”
무슨 그런 소개가 다 있냐.
산샤는 아드리안을 돌아봤다.
“계승식을 보려면 이혼…을 해야 해요?”
“결혼하고 싶으면 신부 자리를 비워 둬야 할 테니까요.”
산샤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
“누가 결혼하고, 누구 신부 자리?”
타마라커가 나섰다.
“그만큼 레이디를 향한 내 마음이 진심이란 말이죠.”
“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보기 위해 장원 딸린 저택 하나를 날려 버린 놈도 사랑이라고 우기더니, 이번엔 진심을 들먹인단 말이지?
“그게 무슨 진심이야? 흑심이지.”
타마라커 뒤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그러고 보니 타마라커 혼자만 온 게 아니었다.
아델라이드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죄다 몰려온 것 같다.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싸웠다.
“흑심이라니? 레이디에게 바치는 내 노력을 폄훼하는 너는, 무엇을 내 줄 수 있지?”
“나는 애초에 미혼이었어. 깨끗한 마음을 드릴 수 있다.”
“마음뿐이란 말이지? 그걸로 뭘 할 수 있나? 나는 지위도 있단 말이다.”
“뭐가 어쩌고 어째? 너의 지위 따위 나도 있다.”
이게 뭐지?
귀족이란 자고로 잔뜩 거들먹거리며 품위를 따지는 자들이 아니었나?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날로 덤빌 사안이 뭐야, 대체?
다들 가질 만큼 가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신기하네.”
산샤의 말에 왁다글닥다글 떠들던 자들의 시선이 하나로 몰렸다.
“당신들이 진심, 마음, 지위를 내놓기 전에 나에게 먼저 물어봐야지 않아? 받을 생각은 있는지?”
“레이디에게 그런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대연회 전에 반려를 정해야 백작위를 받을 수 있으니까, 무조건 우리 중 하나로 정해야지.”
“백작위가 없으면 디아머드 백작의 영지인 이곳도 내놔야지. 물론 마정석 광산도 내놔야 하고….”
산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정석 광산이라는 게 똥파리들을 불러 모으는 똥이었나 보다.
이건 또 어디에서 날라 온 것들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