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흐음, 모리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렸을 때였군. 그럴 때가 있지. 생전 처음 해본 사랑에 정신을 못 차릴 때가…, 지나고 나면 한 줌 추억거리도 안 되는 것을.”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어머니는 항상 말씀하셨죠.”
산샤의 말에 삐쭉, 모리츠가 입술을 야비하게 움직였다.
“형수님다운 말이구나. 뭐 어쨌든…. 아드리안 자네는 용케도 백작 영애를 만났군? 접점이라고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
“의지할 데가 없을 때, 로베르트 백작님의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었죠.”
“크헉.”
모리츠와 산샤는 동시에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모리츠가 괴이한 소리를 내길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산샤가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얼마나 신묘한가.
어렸을 때 같이 살았다는 설정이라니.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였다.
로베르트 백작은 오갈 데 없는 아이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것까지 생각해 내다니, 대단하구나.
앞으로는 아드리안에게 다 맡기고 구경하고 있어도 되겠다.
“그건 더 이상한데? 의지가지없는 고아와 백작 영애라니.”
모리츠가 이죽거리자 산샤는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이상하긴 어디가요? 내 부모님은 언제나 내가 결정하게 하셨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귀족은 귀족, 평민은 평민이다. 아드리안은 그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그런가요?”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길가에 핀 이름 없는 들꽃이라도 저마다의 가치를 갖고 있는 법이죠. 디아머드 백작 가문에서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고 들었는데요.”
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아드리안. 디아머드 백작 가문의 일원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모리츠는 펄쩍 뛰었다.
“…그, 그런. …디아머드에 그런 가르침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거야 당신이 공부를 열심히 안 했으니 모르나 보지.
백성이 없으면 우리의 특권도 없는 거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살았는데, 당신은 어째 몰라?
“호수 축제였습니다.”
아드리안이 말하자, 모리츠가 눈을 부라리며 짜증을 냈다.
“뭐가 호수 축제야?”
“언제 결혼을 약속했냐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호수 축제에서 연등을 날리며 영원한 사랑을 다짐했습니다.”
산샤는 더 크게 뜰 수 없는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자신이 했던 그대로 대답하고 있는 거, 맞지?
아드리안은 차분하고 천천히 말했다.
“저희는 호수 깊숙이 배를 저어 들어갔습니다. 호수는 이미 들어와 있는 배로 가득 차 호수 표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죠.”
산샤는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어쩌면 이렇게 사실적일까.
노를 젓기도 힘들 정도로 빡빡하게 채우고 있는 배들 사이로 천천히 움직이는 두 사람의 배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신호로 연등 하나가 올라갔고, 호수를 가득 채운 연인들은 준비해 온 연등을 앞다퉈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산샤와 나는 연등이 하늘에 별이 되는 것을 보며 우리의 사랑은 영원할 거라고 맹세했습니다.”
“아….”
산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로 날아가는 연등이 반사되어 호수에 별이 가득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진실일 것만 같은 것은,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꿈꾸듯 달콤하기 때문인가?
아드리안이 천재적인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일까?
* * *
“자, 이제 설명해 봐요.”
모리츠가 성과 없이 돌아간 뒤, 아드리안은 산샤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으흠…. 그러니까….”
이리저리 궁리해 봤지만, 솔직히 말하는 것 이상의 해결책은 없는 것 같았다.
산샤는 쉬지 않고 다다다 빠르게 말했다.
“모리츠가 이상한 놈을 내 반려라고 들이밀면서 집안 어른의 결정이니 무조건 따르라잖아요. 당장 그걸 거부할 방법은 정혼자가 있다고 하는 것뿐이었어요.
그렇지만 나에게 정혼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때 생각나는 사람이 당신뿐이라서 반려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기로 했죠.”
“먼저 저지르고, 나중에 부탁한다는 건가요?”
“상황이 급했거든요.”
“반려가 뭔지는 알죠?”
산샤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아드리안이 모르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똑같은 걱정을 아드리안이 하고 있었다고?
“내가 세상 물정에 약하기는 하지만, 꼭 알아야 할 건 다 알고 있다고요. 당연히 잘 알고 있어요.”
“결혼이라는 게….”
“결혼까지 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당신에게 그런 수고까지 끼칠 수는 없으니까…. 대연회에서 반려라고 소개하고, 필요한 시기가 지나면 파혼해 줄게요. 그것만 도와줘요.”
“으헉!”
갑작스러운 괴성에 산샤는 깜짝 놀라 돌아봤다.
있는 줄도 몰랐던 루카가 입을 틀어막고 종종 뛰었다.
“우리 전하에게 뭘 시킨다고요? 가짜 반려에, 파혼이요? 절대 안 됩니다. 절대 반대라고요.”
“왜 네가 반대해? 결정은 아드리안이 하는 거야.”
“아니요. 이런 결정은 제가 합니다. 의뢰를 받을지 말지 결정하는 것도 저니까요. 전하, 하지 마세요. 절대 하지 마시라고요.”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펄펄 뛰는 루카는 완전히 무시한 채, 산샤만 바라보고 물었다.
“…왜 나죠?”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까요. 당신이라면 결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진짜 결혼은 안 하실 거라면서요!”
루카가 꽥 소리 질렀다.
“루카!”
산샤도 루카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왜요?”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내려 가 봐야 되는 거 아냐?”
“아?”
루카는 멍한 표정이 되어 산샤를 바라봤다.
산샤가 말하기 전까지는 아예 아델라이드를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산샤의 말을 듣고서야 생각난 듯 아래층을 슬쩍 생각해보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됩니다. 아델라이드를 누가 떠메 가겠습니까? 저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두 분이 어떤 결론을 내리시느냐입니다. 하시던 말씀 계속하십시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겠습니다.”
“말씀하시긴 뭘…. 나는 할 말 다했는걸.”
“아…. 그러면 우리 전하가 답하실 차례인가요?”
산샤와 루카는 동시에 아드리안을 돌아봤다.
아드리안은 턱을 괴고 무심하게 둘을 보고 있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말씀 좀 해보세요. 전하의 의견을 말씀하시라고요.”
루카가 말했고, 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이나 좀 해 봐요, 아드리안!
아드리안이 남의 일인 듯 무심하게 말했다.
“레이디, 루카, 나는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둘이 싸우는 데 어째서 내 의견이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채 말을 끝내지도 못했는데 루카와 산샤가 동시에 외쳤다.
“레이디가 전하와 결혼하겠다고 하니까요.”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둘은 동시에 서로를 흘겨봤다.
루카가 산샤에게는 입을 삐쭉이고 아드리안에게 답을 재촉했다.
“어떻게 하실 건지 말씀해 주세요, 전하.”
아드리안이 한숨부터 내쉬었다.
“루카, 내려가 봐야지. 네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되는 걸 알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아델라이드에 죽치고 있는 잠재적 구혼자들은 극도로 예민해서 사소한 일에도 언성을 높이고 싸움질을 했다.
싸움이 과해지면 아델라이드 집기를 깨부수기도 해서, 유능한 지배인이 지키고 있다가 그들을 중재도 하고 갈라놓기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 어떻게 내려가겠나.
아델라이드가 부서진다고 대수인가. 깡그리 휩쓸려 뼈대만 남는다고 해도 내려갈 수 없다.
“지금은 절대 내려갈 수 없습니다. 저를 내려보내시려면 마무리를 해주셔야죠.”
아드리안도 루카를 쉽게 내려보낼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은 듯했다.
루카의 반항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산샤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굉장히 깊게 하는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일까?
산샤는 어색해서 괜히 웃어 보였다.
“무슨 말이든 해 봐요, 아드리안.”
“…무슨 말이든 하라니,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내가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은데….”
“예? 뭘? …언제?”
“모리츠를 속여서 시간을 벌길 바랐던 거잖아요. 모리츠는 별 소득 없이 돌아갔으니…. 다 된 거 아닌가? 레이디가 원했던 게 뭔지, 잘 생각해 봐요.”
산샤는 잘 생각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뭘 원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대연회에서 발표해야 하잖아요. 오늘만 필요하고 끝이 아니라, 계속 쭉 필요한데?”
아드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괴로워하는 게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래, 괴롭겠지.
결혼은 영혼의 울림을 들을 수 있는 사람과 하는 거니까 말이다. 어머니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지만 결혼을 진짜 해달라는 게 아니라니까요. 반려라고 발표하는 것까지만 해줘요. 계승을 완결할 때까지만. 그리고서는 파혼해요.”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그럼 모리츠가 데려온 느글거리는 이상한 놈이랑 결혼해야겠어요?”
“산샤….”
아드리안 얼굴이 일그러졌다.
산샤에게 할 말이 가득인데 차마 입을 열지 못하겠다는 듯.
“충분한 보상을 할게요.”
“하아….”
아드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외면해 버리는데, 옆에 있던 루카가 또 괴성을 질렀다.
“우리 전하가 그렇게 만만해요?”
“만만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지.”
“그, 그렇지만….”
루카가 머뭇거리다가 덤벼들었다.
“그래도 이러시는 건 아니죠, 레이디! 애초에 우리 전하를 제대로 책임지실 게 아니면 이런 데 끌어들이시면 안 되는 거예요.”
“책임질 거야. 책임질 수 있어.”
“어떻게요? 충분한 보상을 한다고요? 왜 이러세요? 돈은 우리 전하도 많거든요.”
마구 덤비는 루카를 보고 있자니, 산샤는 억울해졌다.
의뢰를 받아 해결하는 게 아드리안의 일이 아니었던가.
의뢰 내용이 남다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화를 내면서 덤빌 일이냐고.
아드리안은 왜 저렇게까지 인상을 구기면서 등 돌리고 있는 건데?
왜 아드리안에게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는 건데?
산샤는 버럭 루카 이름을 불렀다.
“…루카! 너! 너는…. 너한테 하는 말도 아닌데 왜 네가 흥분하고 난리야?”
루카가 더 크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 전하 일이니까요!”
원망이 가득한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레이디가 우리 전하한테 이러시면 안 되니까요!”
루카가 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먹으로 쓱 닦아냈다.
남자의 눈물이라니….
왜 울고 그래, 누가 때린 것도 아닌데….
산샤가 멍하니 루카를 보고 있는데,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대연회 전까지 반려가 될 만한 사람을 찾아볼게요.”
“뭐라고요?”
돌아보는 산샤에게 아드리안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내가 찾아줄게요. …레이디의 반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