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산샤의 두 번째 아델라이드 방문.
첫 번째 방문과 달리 산샤를 알아보는 사람이 꽤 있었다.
‘오오!’ 탄성이 터져 나왔고, 어떤 놈은 벌써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다.
닳는다!
쳐다보지 마!
루카는 번개보다 빠르게 달려가서 등판으로 손님들의 시선을 막았다.
“레이디 산샤, 어서 오십시오, 아델라이드에.”
산샤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급하게 말했다.
“아드리안, 있지?”
“아하! 레이디께서 우리 아드리안 경을 만나러 오셨군요. 역시 두 분의 친분이란…. 평범한 사이가 아니니까 말이지요.”
산샤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는 루카를 밀쳐내고 앞으로 나섰다.
“너랑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없어. 아드리안을 만나러 왔다니까.”
루카가 얼른 산샤를 막았다.
레이디가 몸이 달아 먼저 아드리안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림을 모두에게 보여줘야 하니까.
“만나 주실까요?”
“무슨 소리야?”
“우리 일 체계가 주먹구구식으로 넘기는 게 아니거든요. 정식으로 면담 요청을 하시기 전에는 아드리안 경을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나라면 아드리안이 당연히 만나줄 것을 너도 알잖아.”
“으음….”
루카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궁리하는 척했다.
내심 기뻤다.
마차 안에서 분위기가 좀 험악했어야지.
말 한마디 안 한 것은 물론 시선도 부딪치지 않았다.
다신 안 볼 사이라고도 했다지.
한동안은 못 만나려나 싶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이렇게 달려오다니 말이다.
역시 될 사이는 되는 법이다.
루카는 조금은 뻐기는 기분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신지 저에게 먼저 말해 주시지요. 우리 전하가 만나겠다고 하실지 아닐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순간 산샤가 손바닥을 좍 펴서 루카의 입을 막아 버렸다.
불시의 습격에 놀라 루카가 에퉤퉤 어버버 난리를 치는데, 산샤가 속삭였다.
“입조심 좀 해라. 그렇게 부르면 안 될 텐데 왜 자꾸 그렇게 부르는 거야?”
“허억!”
루카는 경악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또 ‘전하’라고 불렀다.
그동안 ‘전하’라는 호칭 때문에 실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산샤 앞에서 벌써 몇 번째인가.
산샤 앞에만 가면 바보가 되는 건 우리 전하만 그런 게 아니라 자신도 마찬가지인가.
루카는 얼른 산샤를 잡으며 속삭였다.
“레이디. …그거 별명인 거 아시죠?”
“별명이라고 안 믿는 사람이 생기면 어쩔래?”
“그러니까, 어디 가서도 그러더란 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라도 실종된 황태자라고 지목되면 당장 살해당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드리안 경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신다면….”
“그러니까 너의 입을 조심하란 거잖아.”
산샤를 루카를 밀어냈다.
“비켜.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
“그럼 제가 안내를….”
산샤는 앞서가려는 루카를 잡았다.
“너는 여기 있다가 모리츠가 오면 막아.”
“예? 모리츠 자작이요?”
“2층에 올라오지 못하게 시간을 끌어 달란 말이야.”
“아니요. …자작이 여길 왜 옵니까?”
“그건 나중에 다시 물어봐. 지금은 급하다.”
루카가 여전히 어버버거리는데 산샤는 일단 달려 올라갔다.
모리츠가 마차도 같이 타고 움직이자고 한 바람에, 시간이 없다.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뛰어 내려왔는데 루카 때문에 시간을 다 까먹었다.
어서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입을 맞춰야….
산샤는 프라이빗룸을 노크하는 동시에 열어젖혔다.
아드리안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콘스탄틴이 돌아보더니 붉은 입술을 늘어뜨리며 미소 지었다.
이런 젠장.
생전 해본 적 없는 욕이 툭 튀어나오려고 했다.
산샤는 아드리안과 딱 달라붙어 있는 콘스탄틴을 노려봤다.
무슨 돌풍이라도 덮쳤던 것처럼 방 안은 어수선한데, 둘은 책 정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콘스탄틴이 집어서 건네주면 아드리안이 받아서 책장에 꽂는 건가?
책 정리야 할 수 있지.
둘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책 정리 정도야 같이 할 수 있잖아.
순간 마음 한쪽이 펄쩍 뛰어올랐다.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둘이 무슨 사이길래 저렇게 딱 달라붙어 있단 말이냐.
저러고 있으면 정리나 제대로 되겠냐.
저건 책 정리를 빙자한 애정 행각 아니야?
그때 콘스탄틴이 아드리안에게 더욱 바짝 붙으며, 붉은 입술로 속삭였다.
“아드리안 경, 손님이 오셨네요.”
저 여자가 미쳤나.
아드리안도 충분히 알고 있는데, 굳이 알려줘.
게다가 숨을 쉬는데 가슴이 저렇게 들썩일 일이냐.
어떻게 조였길래 가슴은 저렇게 크지?
그 가슴, 왜 자꾸 아드리안에게 들이미는데?
아드리안은 들고 있던 책을 콘스탄틴에게 넘겼다.
그런데 콘스탄틴은 책도 얌전히 받지 않았다.
아드리안의 긴 손가락을 뿌리부터 끝까지 쓰윽 훑고 나서야 책을 잡았다.
책을 받는 건지 손을 더듬는 건지 모르겠다.
“레이디 산샤?”
아드리안이 부르는 소리에 산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모리츠가 오고 있어.
빨리 입을 맞춰야지.
“아드리안!”
산샤는 급하게 고개를 까닥하여 인사를 했다.
“급하게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요.”
“그래요?”
아드리안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디가 나에게 급할 일이 뭐가 있을까?”
“우리 둘이서만 이야기해야 해요.”
산샤는 콘스탄틴을 빤히 보며 말했고, 콘스탄틴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중얼거렸다.
“슬슬 퇴장할 때가 되었구나 싶었죠.”
그러고는 살랑살랑 아드리안에게 달라붙더니 볼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순간 산샤의 가슴에서는 불기둥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작별 인사를 저따위로 해야 하나?
‘잘 있어라.’, ‘잘 가라.’ 말로 하면 될 걸. 입 뒀다 어디에 쓰려고?
콘스탄틴은 문에 버티고 서 있는 산샤 옆을 지날 때도 쓰윽 몸을 기대 왔다.
그리고 속삭였다.
“나의 아드리안 경을 너무 힘들게 하지 말아요.”
아니, 이 여자가 점점!
왜 아드리안이 너의 아드리안이야?
손바닥으로 얼굴을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일단 참았다.
정신 흐트리면 안 돼. 목적에 집중해야 한다.
산샤는 문을 닫고 간절하게 외쳤다.
“아드리안, 나의 반려가 되어줘요.”
“……?”
“당신을 반려로 발표하게 해 줘요. 그 전엔 모리츠에게 말을 해줘야 해요. 나의 반려가 되기로 했다고….”
아드리안은 두서없이 마구 말하는 산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예요?”
“사고라뇨? 나는 뭐, 사고만 치는 사람인가요?”
아드리안이 무심하고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가슴에 손을 얹을 것도 없다.
둘이 만난 순간부터 산샤는 계속 사고를 치고 있었고, 아드리안은 계속 휘말려 왔으니까.
산샤는 깨끗하게 인정했다.
“좋아요, 나는 사고뭉치예요. 그래서 말인데 모리츠가….”
그때였다.
밖에서 모리츠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래. 여기가 바로 아드리안의 프라이빗룸이로구만. 저리 비켜나라니까, 썩 비켜!”
루카의 간절한 목소리도 들렸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정식으로 면담 요청을 하시기 전에는 아드리안 경을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일 체계가 주먹구구식으로 넘기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어허, 우린 이미 가족과 같은데 정식 면담 요청이 웬 말이냐. 사랑스러운 나의 조카 산샤도 여기로 들어갔을 테지?”
“아니라니까요. 아악!”
루카의 비명이 들리나 싶은 순간 문이 활짝 열리더니, 루카가 굴러 들어왔다.
모리츠는 걸리적거리는 루카를 발로 걷어차 밀어놓고 룸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아드리안! 만나서 반갑네.”
모리츠는 아무도 권하지 않았는데 소파에 앉으며 떠들었다.
“내가 이렇게 급하게 온 이유는 당연히 알겠지? 대단하지 않은가. 이렇게 기쁜 일을 그동안 왜 말을 안 했어?”
저런 능구렁이 같은 인간.
저렇게 앞뒤 맥락도 없이 갑자기 물어보면 아드리안이 대답할 수가 없잖아.
루카나 콘스탄틴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아드리안에게 제대로 설명부터 해야 했는데….
산샤는 아드리안 대신 나섰다.
“자리에 먼저 앉아요, 자작. 차분하게 앉아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굳이 서서 해야 하나요?”
“산샤 디아머드.”
모리츠가 자애로운 숙부인 척, 산샤를 불렀다.
“우리 대화를 방해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네가 갑자기 끼어들면 혹시 숨기고 싶은 게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되잖니.”
산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어이 산샤의 말을 거짓말로 밝히겠다는 의지가 온몸에서 뻗쳐 나오는 검은 오러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에게서 오러가 뻗쳐 나오고 있다면 절대 들키지 않겠다는 색이겠지.
“숨기고 싶을 게 있겠나요. 다만 다짜고짜 질문부터 하는 건 아드리안에게 예의가 아니니까요.”
말하면서 산샤는 슬쩍 아드리안을 훔쳐봤다.
그야말로 무색무취 무심한 표정.
“아무래도 아드리안이 곤란해지는 건 싫으니까요. 나의 귀한 반, 려, …이니까.”
허엄, 루카가 주먹을 쥐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여전히 무색무취 무심.
살짝 의심되는 것이….
설마 반려라는 게 뭔지 몰라서 저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네 뜻은 잘 알았다, 산샤. 그렇지만 지금부턴 입을 다물고 있어 주겠니? 안 그럼 내가 쓸데없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겠구나.”
산샤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아아, 모르겠다. 터지려는 한숨을 꾹 눌러 삼켰다.
힌트를 줬으니, 제발 알아서 해줘요, 아드리안!
모리츠가 느물느물하게 다시 물었다.
“산샤가 성에서 은둔 생활을 해서 밖으로 나온 지는 얼마 안 되는데, 둘이서 언제 그런 약속을 한 건가?”
어렸을 때 했다니까!
방에 처박히기 전에!
산샤는 답답한 마음에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저렇게 물어보면 아드리안이 어른이 된 다음 시점을 찾을 거 아냐.
모리츠는 둘의 말이 다르다고, 거짓말이 분명하다고 신나서 펄펄 뛰겠지?
역시 입을 맞췄어야 했다.
산샤는 잔뜩 긴장해서 아드리안의 입만 바라봤다.
“그때는….”
아드리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순간 산샤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잠깐 말을 멈춘 아드리안이 애정이 가득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아닌가.
“…천방지축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이제 막 눈을 뜬 사랑이 마냥 아름다웠죠.”
산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천히 깜빡거렸다.
어허, 이렇게 놀라울 수가!
우리가 벌써 입을 맞춰 놨는데,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