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치우기는? 이제 막 먹기 시작했는데?
산샤는 남은 자두 조각을 얼른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허공만 씹고 말았다.
모리츠가 매정하게 자두를 채가더니, 그대로 툭 던져 버리지 뭔가.
“이거 다 치워. 산샤는 금방 돌아갈 거야. 다과를 즐길 시간은 없다.”
“아니, 그래도 드시던 거라도….”
집사는 하던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모리츠가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자 찔끔 물러서고 만 것이다.
그러나 모리츠가 시킨 대로 치우지도 못했다.
산샤가 샌드위치를 움켜쥐고 먹기 시작했으니까.
“집사, 조금만 기다려 줘. 금방 다 먹을 거니까.”
“그게, 저어….”
집사가 안절부절못하는데, 산샤는 못 본척했다.
“거기 앉아요, 자작. 이 정도 기다릴 인내심은 차고 넘치잖아요.”
빠드득 이를 갈았지만, 모리츠는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를 쩍 벌리고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서 산샤를 내려 보는데, 그러든가 말든가….
산샤는 따끈한 밀크티까지 제대로 즐긴 다음, 말했다.
“…닐스 미켈을 치워요.”
“뭐?”
모리츠는 얼른 못 알아듣고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오히려 물었다.
“닐스 미켈이 벌써 왔단 말이냐? …어떻게?”
“마도구로 한방에 날아왔다는군요. …이동마법 스크롤을 샀겠죠?”
“제도에서 여기까지?”
모리츠는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용이 보통이 아닐 텐데….”
“100폰드쯤은 푼돈이라더군요.”
“허엇…. 그놈 참….”
닐스 미켈의 행동력은 모리츠로서도 놀라웠던 모양이다. 몇 번이나 헛웃음을 웃더니 중얼거렸다.
“배포가 크구나.”
“벌써 마정석 광산의 주인이 된 줄 알던데요.”
“…그래서 방은 어디로 내줬니? 지내는데 불편하지 않게 해줘야지. 귀한 손님 아니냐. 별채를 내줬니?”
“방을 왜 내주죠? 무례하게 밀고 들어오는 자에게 내줄 방은 없습니다.”
“무례하게 밀고 들어오다니, 너의 반려다. 당연히 융숭하게 대접을 해야지.”
뻔뻔하기도 해라.
어쩌면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지껄일 수가 있을까.
모리츠는 언제나 하던 대로 자상한 숙부의 미소를 띠더니 말했다.
“네가 디아머드 백작 가문 계승을 완결하려면, 대연회에서 반려를 발표해야 하는 건 알고 있지? 그래야 황제가 작위를 인정하니까 말이다.”
“그래서요?”
“대연회가 코앞이다. 계승 안 할 거야?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줘도 상관없겠어?”
그럴 수는 없다.
당장 모리츠가 훔쳐 간 재산을 되찾는 데만도 가주란 자리가 필요하니까.
그렇다고 닐스 미켈 같은 놈을 반려로 세워?
“자작이 걱정해 줄 문제가 아니에요.”
“아니기는? 너의 부모는 아무것도 해놓지 않고 죽어 버렸고, 너는 처박혀 있기만 했는데, 당장 어디에서 반려를 찾니? 어쩌겠니? 내가 챙겨야지.”
“그렇다고 닐스 미켈을….”
“닐스 미켈을 받아들여라.”
모리츠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나는 아직 너의 후견인이야. 집안의 어른으로서 너의 반려를 정할 책무가 있단 말이다. 이미 정해놓은 반려가 있지 않은 다음에야, 너는 거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산샤가 대답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미 정해놓은 사람이 있습니다.”
“뭐?”
“나의 반려로 정해놓은 사람이 있어요.”
모리츠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이면 어쩌나 걱정하는 눈꼬리랄까.
“다시 한번 말해 봐. 뭐라고? 내가 지금 정말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정말 믿을 수 없는 소리를 한 것 같다’라고 산샤는 생각했다.
겉으로는 여유만만하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쫄려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쯔쯔, 모리츠가 혀를 찼다.
“철딱서니 없기는…. 너의 반려 자리를 노리는 날강도 같은 놈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지금 이런 장난을 할 때냐?”
장난으로 보인단 말이지?
“딱히 닐스 미켈과 결혼하라는 것도 아니다. 반려라고 발표해. 작위를 받은 다음에 파혼하든 어쩌든, 네 마음대로 하면 될 거 아니냐.”
오호! 그런 방법이 있었군?
“이럴 때일수록 집안의 어른이 정신 줄을 꽉 붙잡고 제 역할을 해줘야 하니까, 내가 너를 위해 닐스 미켈을 데려온 거 아니냐. 더 말할 거 없다. 그런 줄 알고 나는 대연회 준비를 할 테니까.”
이래서 닐스 미켈은 안 되는 거다.
모리츠가 산샤를 위해 준비한 사람이라면, 안 봐도 뻔하니까.
산샤는 천천히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나의 반려는 이미 정해져 있다니까요.”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있습니다. 내가 정했으니까요.”
산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되도록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좋겠지.
말이 많아질수록 괜히 꼬이기만 할 테니….
“알아들었으리라 믿고. 다시는 닐스 미켈이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게 해주세요. 완전히 치우라고요.”
모리츠가 모호한 시선으로 산샤를 훑어봤다.
“언제 정한 반려냐?”
“…언제인지가 중요한가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서 말이다. 아무래도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거든.”
산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오랜 은둔 생활에 사람 만날 시간이 없었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언제 남자를 만나고 결혼을 약속했겠나.
산샤가 대답을 못 하자 모리츠는 피식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닐스 미켈에게 별관을 내줘. 다른 놈들이 들러붙기 전에 방비로 들여놓으란 말이다. 당장 결혼하라는 것도 아니라고 했잖니. 구혼자 중 하나로 둬. …여인을 사랑하는 사내의 심정을 그렇게 내치는 게 아니다.”
산샤는 모리츠를 빤히 쳐다봤다.
너무 어이없는 헛소리를 뻔뻔하게 하고 있으니, 사람 자체가 어이없어 보인다.
그동안 무서워서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게 억울했다. 최소한 무서워할 만한 사람이기는 했어야지.
“뭘 봐서 여인을 사랑하는 사내의 심정이에요?”
“마정석 100폰드라지 않니. 사랑하니까 그 돈도 아깝지 않았던 거지. 장원이 딸린 대저택 하나 값이 아니냐.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사랑이지.”
“마정석 광산이 제 것인 줄 알았으니까요. 누군가의 사탕발림에 속아서…. 지금쯤 속았다는 걸 알고,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상관이냐. 좀 돌아가야 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반려가 될 텐데. 별채를 내 줘.”
“반려는 이미 있다니까요? 별채에 들어간다면 그 사람이 들어가야죠.”
“거짓말인 거 다 안다니까 그러는구나.”
산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자.
“…어릴 때였습니다. 자작이 디아머드에 나타나기 전에.”
“뭐가?”
“결혼을 약속한 거요.”
그래도 모리츠는 여유 만만했다.
“로베르트는 아무것도 정해놓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데?”
“아버지 어머니는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셨다는 건 모르시나요?”
“집안 어른은 아무도 모르는…. 소꿉장난을 했다는 거냐?”
“호수 축제였습니다.”
“뭐?”
“호수 축제 마지막 날에 연등을 날리고 영원을 약속했어요.”
모리츠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지고 입은 버럭 소리를 지를 것처럼 벌려졌다.
“그, 그럴 리가….”
호수 축제는 디아머드의 조상 글라키에스와 카이의 사랑을 기리는 축제였다.
마지막 날 연등을 날리고 사랑을 약속하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고 하여, 연인들이 축제라고도 했다.
그렇게 약속한 것은 글라키에스가 보호하여 운명조차 갈라놓을 수 없다고 했으니….
호수 축제에서 한 약속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기도 했다.
“…누구냐?”
“누구라고 말하면 아시나요?”
“사랑하는 조카사위가 될 이름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니?”
떠오르는 이름이 있긴 한데….
그 이름을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모리츠가 비릿하게 웃었다.
“끝내 이름을 말해 주지 않으면, 말할 이름이 없는 거로 생각되는구나.”
이리저리 따지고 말고 할 게 없다. 산샤는 숨을 들이마셨다.
“시도는 괜찮았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거짓말도 하던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거란다. 어서 돌아가서 별채를….”
“아드리안!”
“뭐?”
“클라이드의 아드리안이 내 반려입니다.”
“설마….”
“클라이드의 수호자이니, 디아머드 백작 가문을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었죠. 마정석 소유권이 북부 밖으로 나갈 일도 없잖아요.”
모리츠는 한참 씩씩거리다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나는 왜 아직도, 이때까지도 몰랐을까?”
“그거야 내가 말을 못 하는 상태가 오래되었고, 말을 하게 된 다음엔 대연회까지는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죠. 지금이야말로 디아머드 백작 가문을 삼키려는 날강도가 누군지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시기니까요.”
모리츠는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났다.
“가자.”
“…어딜?”
“이런 기쁜 소식을 들었는데, 그냥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니? 당장 아드리안을 만나야겠다.”
“예?”
“아드리안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많고 듣고 싶은 말도 아주 많구나. 가자, 어서 가.”
“대연회 전까지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니까….”
“내가 집안의 어른이다. 어른의 역할은 확실하게 해 줘야지.”
모리츠는 그대로 뛰어나갔고, 산샤는 난감했다.
큰일 났네.
아드리안과 입 맞춰 볼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 * *
“산샤 디아머드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라인하르드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겠죠.”
“결혼 적령기의 아들을 가진 가문이라면 탐이 날 거예요.”
“결혼 적령기만 그런가요. 타마라커 남작은 이혼했다더군요. 레이디 산샤에게 청혼하려고.”
“에엑? 타마라커는 서른아홉 살 아니었나?”
“마흔세 살. …저기 있네.”
그들의 시선이 빨간 머리 남자에게 몰렸다.
빨간 머리 남자가 자신에게 몰린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거만하게 와인을 들이켰다.
귀족 사교클럽 아델라이드.
언제나 호황이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이게 다 산샤 때문이었다. 산샤의 반려가 되고 싶은 귀족 사내들 때문에.
대연회에서 반려자를 발표하면서 마무리되는 디아머드 백작 가문의 계승식, 그런데 반려자의 자리가 비어 있다.
디아머드의 귀족 사내라면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그들은 대연회 전까지 산샤를 공략하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디아머드를 떠나지 않았다.
클라이드 호텔은 만실이었고, 가까운 애플힙에는 장기 임대를 한 사람들 때문에 빈집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산샤 근처에도 못 가보고 허구한 날 아델라이드에 몰려들었다.
‘공략 정보 수집을 위해서’라면서.
이런 때일수록 유능한 지배인의 진가가 드러나는 법.
아델라이드의 지배인 루카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뛰어다니며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딱 맞는 음료와 딱 좋은 먹을거리를 대령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보도 살짝살짝 흘려줬다.
공략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보였으나, 알 게 뭐람. 어차피 레이디 근처에도 못 갈 놈들인걸.
루카는 딱 정하고 있었다.
산샤 디아머드의 반려는 아드리안이라고.
참으로 영민하고 현명한 우리의 전하께서 레이디 문제에만 맞닥뜨리면 바보가 되지만, 괜찮다.
유능한 시종인 자신이 잘 이끌어 가면 되니까.
누구에게도 산샤를 내주지 않으리라.
두 사람을 짝으로 만들어 버리리라.
마음을 다지며 주먹을 불끈 쥐는 순간, 아델라이드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산샤가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