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휘잉.
사방이 닫힌 방에 때아닌 강풍이 불어 닥쳤다.
마르틴은 홱 고개를 쳐들어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그러나 미처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강풍에 휘말려 그대로 벽에 내동댕이쳐졌으니까.
온 벽을 채우고 있던 책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마르틴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굴부터 감싸 안으며 움츠러들었다.
얼굴을 지켜야 하는데…, 컥!
얼굴이 문제가 아니다.
숨을 쉴 수가 없어.
훅 다가온 아드리안이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온 우주가 자신의 목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마르틴은 제 목을 누르고 있는 투명한 무엇인가를 잡아 뜯으면서 아드리안에게 사정했다.
“아, 아…드리안. 제, 제발….”
그러나 아드리안은 자비라고는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고, 목을 누르는 힘은 더욱 강력해졌다.
마르틴은 공포에 떨며 간절하게 애원했다.
“제발, 전하! 황기사로서 왔습니다. 밀란이 아니라 전하에게 충성을 바치고 싶어서요.”
머리끝까지 피가 몰려 뭉치고 있었다.
이대로 터져 버리겠다.
마르틴은 절규했다.
“전하도 평생 숨어만 살 수는 없잖아요.”
순간 목을 조이던 것이 풀렸다.
마르틴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방에 널브러져 억눌린 숨을 토해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람.
창문이 단단하게 닫힌 방에 강풍이 웬 말이며, 아드리안은 분명 자신에게서 팔 하나의 거리만큼은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목이 졸려.
마르틴은 멍하니 아드리안을 올려다봤다.
엄청난 돌풍이 휘몰아쳤는데 아드리안은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진짜 바람이 불긴 했었나.
마르틴은 비틀비틀 겨우 일어서서 머리카락부터 매만졌다.
“제가 뭘 어쨌다고 죽이려고 드시죠? 황기사 대표로 찾아온 저를요.”
아드리안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황기사, 황태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 …왜 기다리지? 황태자를 묶어 밀란에게 바치려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옷매무새를 다듬던 마르틴이 아드리안을 올려다봤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서운하게…. 그럴 거면 굳이 뭐 하러 황태자를 기다려요? 침대에서 힘 좀 써주면 되는걸.”
아드리안은 무심하게 마르틴을 내려다봤다.
자비는 물론이고 감정 자체가 보이지 않는 냉랭한 눈빛에 마르틴은 부르르 떨며 제 몸을 꽉 끌어안았다.
“제 아버지도 황태자를 위해 고문을 당하다 죽었단 말입니다. 우리 가문이 황태자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풍비박산이 났다고요.”
아드리안이 감정 없는 어조로 말했다.
“호레스 밀란에 대항하여 황태자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었으니 멸문당하는 게 당연하지. 그런 가문의 후계자가 살아 있다는 게 자체가 오히려 수상해.”
마르틴이 경악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 후계자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가문을 일으켰고, 제국의 이인자라는 칭호까지 받고 있잖아. 호레스 밀란이 가장 신임하는 자가 되어 황제 특사라는 이름으로 여기….”
아드리안이 말을 멈추고 여전히 엉망진창인 마르틴을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 모양으로 있고.”
“이렇게 되기까지 어떤 고생을 했는지 다 말씀드렸습니다. 호레스 밀란에게 줄 수 있는 거 다 좋다니까요. 몸 줘, 마음 줘….”
“그래 들었다. 몸, 마음, 충성과 영혼, 그리고… 클라우스파의 명단 같은 것도 줬나?”
마르틴이 가슴을 움켜쥐며 괴성을 질렀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너의 아버지가 명단을 갖고 있었다는 걸 부정하겠다는 거야?”
“아니…. 물론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게….”
“클라우스파의 숨은 세력까지 정리되어 흔적도 남지 않았던 게 너의 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 너를 나에게 보낸 게 호레스 밀란이 아니라고 할 수는 있나?”
아드리안의 추궁에 마르틴은 외쳤다.
“증명하겠습니다!”
“무엇을?”
“전하에 대한 제 충성을요.”
“어떻게?”
“증거를 가져오죠.”
“무슨 증거?”
“그, 그거는…. 그건 말이죠. 그러니까….”
버벅이던 마르틴이 가슴을 쫙 펴더니 말했다.
“가지고 온 다음에 보시죠. 절대 딴소리 못 하실 테니….”
의기양양하게 문으로 가며 마르틴은 큰소리쳤다.
“증거를 제시한 다음엔 저에게 제대로 사과를 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전하라고 해도 봐주진 않을 테니까.”
잔뜩 뻐기며 방문 손잡이를 확 당겼던 마르틴은 순식간에 주눅이 들었다.
손잡이를 아무리 당겨도 열리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힘을 다해 당겨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르틴은 울상이 되어 아드리안을 돌아봤다.
“일단은 보내주셔야 증거를 가져올 수 있는데요, …전하.”
아드리안은 귀찮은 듯 나직하게 뇌까렸다.
“루카, 보내줘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렸고, 문 앞에는 루카가 예의 바른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마르틴은 원망스러운 듯 아드리안을 흘겨보더니 갔고….
아드리안은 명령했다.
“그림자를 붙여라.”
루카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전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마르틴을 들어서 내던지신 거예요? 제법 무게가 있었을 텐데요.”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았고, 루카는 다시 묻지 못했다.
아드리안의 눈이 어찌나 매서운지 한 번 더 물었다간 자신도 내동댕이쳐질 것 같아서.
* * *
툭.
딱 먹기 좋게 잘라놓은 고기 조각이 떨어졌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것이, 바닥의 먼지 위를 뒹굴어도 먹음직스러웠다.
입에 괸 침을 꼴딱 삼키며 산샤는 자신이 오늘 내리 굶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 가문을 이끄는 가주라는 건 극한 직업임이 분명했다.
끼니를 거르고, 걸렀는지도 모른 채 뛰어다녀야 하니 말이다.
산샤를 동분서주하게 만든 모리츠는 고기를 떨어뜨린 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뇌까렸다.
“네가 여길 어떻게….”
산샤는 코웃음을 쳤다.
“조카가 숙부의 집을 방문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모리츠가 눈동자만 굴려 집사를 찾았다.
“집사?”
산샤를 막지 못하고 졸졸 따라다니던 모리츠의 집사가 식은땀을 훔쳐 내며 나섰다.
“제가 기다리시라고 했는데 이렇게 마구잡이로….”
“마구잡이라니.”
산샤는 짐짓 근엄하게 집사를 꾸짖었다.
“무엄하구나. 이 저택은 디아머드의 것이고, 결국 내가 주인인데.”
“보시다시피…. 이런 말씀을 하셔서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리츠가 인상을 구기고 산샤를 노려봤다.
“이곳은 내 명의로 된 내 집이다.”
“그거야 사법관을 구워삶았을 테니…, 됐고! 재산 문제는 이번 방문 목적은 아니에요. …모리츠 자작, 우리 둘…. 해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을 텐데요?”
“그, 그래? 재산 문제도 아닌, 무슨 이야기가 있을까?”
모리츠가 침착한 척 미소를 지으며 포크를 덥석 물었다.
아작!
이가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빈 포크를 세게 물었으니 뒷골이 시큰할 것 같은데, 모리츠는 태연하게 말했다.
“미리 연락을 주고 오지 그랬니? 내가 식사 중이라서….”
“그러세요. 드시던 건 계속 드셔야죠. …저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천천히 즐기세요.”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가는 산샤를 보며 모리츠는 또 포크를 깨물었다.
바사삭.
이번엔 기어이 이가 부서진 것 같았다.
모리츠의 응접실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모리츠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해 놓았다.
그야말로 휘황찬란.
금박 입힌 천장은 누런빛이 쏟아질 것처럼 반짝였다.
직접 문을 열고 들어선 산샤가 탄성을 지르는데,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던 집사가 급기야 우는 소리를 냈다.
“레이디! 이렇게 마음대로 이러시면…. 제가 어련히 알아서 안내해 드릴까봐요오오.”
“안내하지 않아도 잘 찾아왔잖아. 굳이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굳이 수고라니요. 제 일입니다, 레이디. 이 집안 살림 하나하나 다 제 손을 거쳐야만 한답니다. 저 없이 그냥 막 다니시면 안 된단 말입니다.”
“아, 그으래? 그러니까 잘 알겠군?”
“뭐, 뭐를 말입니까?”
산샤는 팔을 쭉 뻗어 벽을 장식한 부조를 가리켰다.
“저거 디아머드 성에서 뜯어온 거지?”
“예…?”
“디아머드 기도실에 있던 거잖아.”
“그, 그런가요?”
“글라키에스와 초대 백작 카이의 사랑이야기잖아.”
수만 년 동안 지루하게 살아오던 글라키에스는 겁도 없이 얼음 땅을 개간하는 카이를 구경하다가 사랑하게 되었다.
글라키에스는 카이를 위하여 얼음강의 방향을 바꾸고 마정석 광산을 주었으며 아이도 낳았으니 그들이 곧 디아머드 백작 가문이다.
부조는 그중에서도 글라키에스와 카이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색정적이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로 조각해 놓았다.
산샤는 부조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살짝 두들겨도 봤다.
“이걸 이렇게 떼어왔으면, 기도실 벽은 어떻게 해놨나? 그냥 휑하게 뜯긴 벽인가?”
“무, 무슨 말씀이신지… 잘…. 제가….”
집사는 식은땀만 연신 닦아내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 부조는 도로 가져가야겠네.”
“예?”
“가문의 역사가 기록된 것인데 원래 있던 자리에 있어야지.”
“예에…?”
“이 소파는 대연회장의 휴게실에 있었던 거네.”
산샤는 소파를 토닥였다.
“이것도 제자리에 돌려놔야겠어.”
“레이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이 집안을 채운 값나가는 물건은 다 백작 성에서 훔쳐온 장물이라는 말을 하고 있잖아.”
“예?”
“뭘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자기 손을 거친대….”
산샤는 소파에 앉으며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멀뚱하게 서 있는 집사를 봤다.
“그렇게 서 있기만 할 거야?”
“그,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손님 접대를 해야 하지 않아?”
“아…, 예…. …뭐 차를 내올까요?”
“그것보다는 간단하게 요기할 거리를 가져오는 게 좋겠어.”
“예?”
“간단하게 빵 정도? …빵 사이에 아삭한 로메인상추와 햄을 잔뜩 넣고, 에멘탈 치즈 한 장. 아니 두 장 넣어줘.”
집사가 억지로 입술 끝을 쭈욱 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없어. 그거면 됐어.”
햄과 치즈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 벌써 맛있다.
산샤는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모리츠와 제대로 대결해 볼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는 금세 돌아왔다.
산샤가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음식을 가지고.
“말씀하신 빵과 꿀을 넣은 따끈한 밀크티 그리고 말린 자두입니다.”
산샤는 고소한 향이 나는 따뜻한 빵을 덥석 들고 집사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자네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군. 말린 자두까지. 이렇게 세심한 배려라니…. 손님 대접하는 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어.”
“아, 아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고마워, 잘 먹을게.”
말린 자두를 입에 넣고 산샤는 또 탄성을 질렀다.
“대단해. 정말 맛있어. 자네가 우리 디아머드 성에 와 주면 얼마나 좋을까.”
산샤의 야단스러운 칭찬에 집사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과찬이십니다, 레이디!”
또 한 입 크게 베어 물려고 입을 쩍 벌렸을 때였다.
“그만, 됐다. 집사! 상을 치워라.”
모리츠가 방으로 들어오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