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또 웃었다.
레이디 일이라면 무조건 좋냐고 루카가 아무리 놀려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산샤의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좋아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으니까.
[오늘도 틀어박혀 있다.]
[오늘도 역시 틀어박혀 있기만 하다.]
똑같은 이야기만 듣기를 몇 년이었나.
이젠 산샤의 뜻대로 이루어질 일만 남았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산샤를 도울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생명이라도 기꺼이 내줄 수 있다. 산샤 덕에 살 수 있었으니, 산샤에게 돌려주는 것은 당연했다.
아드리안은 태생이 남달랐다.
황제의 적자로 태어나 황태자로 봉해진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의 명맥이 끊긴 줄 알았던 차에 바람의 축복으로 태어났고, 요람에서 벌써 바람의 정령과 교감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갖지 못한 능력을 질투했고, 어머니는 자신의 그릇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아들을 낳을 탓에 기력이 쇠진하였다.
제국의 영광을 가져올 황태자라며 백성들이 열광하면 할수록 아버지는 질투는 극심해졌다.
행여나 바람을 다스리는 자로서 각성할까 봐 감시했고 학대했다.
어린 아드리안이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을 숨기고 감정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슬퍼도 울지 않았고, 웃을 일은 애초에 없었다.
아버지가 북부 순행에 황태자를 데리고 갈 거라고 발표하자, 아드리안은 자신이 살해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숨 쉬는 것도 싫어했던 아버지가 자신과 함께인 걸 참을 수 있을 때는 오직 자신을 죽일 때뿐이니까.
예상대로 자객의 습격이 있었다.
그런데 죽은 것은 아버지였고, 아드리안은 로베르트 백작에게 구출되었다.
모두 죽어 버렸는데 아드리안 자신만 요행히 살아남았다고 해야 하나.
그때부터 아드리안의 세상이 바뀌었다.
모든 눈이 감시하고 모든 입이 자신을 비난하던 세상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도 자신을 감시하지 않았고 비난하지 않았다.
로베르트 백작은 디아머드 성에서 은밀하면서도 개방적인 방을 내주었고, 자유롭게 지내되 너무 눈에 띄지는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자유롭게 지내는 게 어떻게 하는 건지 몰랐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책을 읽고 정원을 내려다보는 것뿐이었다.
거기에 산샤가 있었다.
마리에 백작 부인과 함께 정원을 가꾸고 로베르트 백작과 공부하며 끊임없이 말을 하고 쉴새 없이 웃었다.
처음엔 괜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잘 웃는 아이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산샤는 낙엽만 굴러가도 웃었으니까.
[저 아이는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웃을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다가 산샤가 까르르 웃으면 아드리안도 따라 웃게 되었다.
처음엔 입술만 느슨하게 풀어지던 것이 피식 소리를 내기도 했고 어느 날부터인가는 소리도 내어 웃었다.
웃기 시작하자 감정이 마음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웃음과 울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왜 울고 있어?]
산샤가 자신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불타는 것 같았었지.
아래에서 아드리안이 보이더라며 3층이나 되는 창문을 기어 올라왔었다. 멀쩡한 문은 버려두고.
그날 이후 산샤는 시도 때도 없이 창문으로 기어 올라와서 아드리안을 데리고 나갔다.
마음대로 웃고 떠들며, 아드리안은 산샤와 함께 행복했다.
그런데 로베르트 백작은 비밀리에 황태자파를 규합하고 있었다.
호레스 밀란 대공을 몰아내고 황위를 되찾는 것만이 아드리안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대로 행복하다고.
행복을 깨고 싶지 않다고.
그러자 로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 전하는 존재만으로 위협입니다. 어떻게든 찾아내서 죽이려고 하겠죠. 그러니 전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들 손에 죽든지, 그들을 죽이든지….]
그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살아 있어야 행복하든지 말든지 할 테니까, 황제가 되지 않더라도 그들은 없애야 했다.
그러니 로베르트 백작이 가족여행으로 위장하고 황태자파 회합에 참석하자고 했을 때도, 가야만 했다.
그 길에 로베르트 백작 부부를 잃었다.
디아머드 성에 돌아갈 수 없으니 산샤를 만날 수도 없었다.
산샤가 자신을 잊어버릴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떠날 수가 없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산샤를 지켜 왔다.
이제 산샤가 밖으로 나섰으니, 계승을 완결시켜 안정된 힘을 가질 때까지만 곁에 있을 작정이었다.
자신은 여전히 신분을 감춘 황태자이고, 존재만으로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위험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똑똑.
아드리안의 상념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루카가 들어와 속삭였다.
“전하, 마르틴 바이다 후작이 뵙기를 청합니다.”
“마르틴 바이다?”
아드리안의 반문에 루카가 난감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하는 짓이 수상하더라니…. 전하만 찾고 전하만 바라보고, 들이대고 엉겨 붙고…. 기어이 찾아오기까지 했네요. 이걸 어쩌죠? 확 처리해 버릴까요?”
* * *
아드리안은 굳게 다문 입술에 더욱 힘을 줬다.
행여 한숨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어이없고 답답한 마음을 마르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마르틴은 아드리안의 프라이빗룸에 들어서자마자 헤어진 가족이라도 만난 듯 눈물까지 글썽이더니,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그러면서 간간이 말을 멈추고 아드리안의 표정과 반응을 살폈다.
말하는 도중 간간이 짓는 모호한 미소.
탐색하는 눈빛.
의심과 확신을 오가는 미간의 주름.
아드리안은 원래도 표정이 다양하지 않은 편이었지만, 평소보다 더욱 말을 아끼고 표정을 감췄다.
말하는 내용이 쉽게 반응을 보이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황태자 클라우스파의 수장으로서 호레스 밀란에게 죽임을 당했다.
마차 사고로 죽은 로베르트 백작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선 바이다 후작은 몇 날 며칠 고문을 당해서 시체도 온전치 못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해 암담했다.
맥없이 죽을 수는 없어서 호레스 밀란을 찾아가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고는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다 주었다고 했다.
“밀란 대공에게 나의 동정을 바쳤지 뭐야. 나도 나쁘진 않았어. 대공이 생긴 건 그렇게 생겨서는….”
뭘 줬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밀란의 잠자리 성향까지 알아야 하나?
“그러니까 마르틴 바이다 후작?”
묵묵히 듣고만 있던 아드리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의 말을 막고 나섰다.
“후작이 원하는 게 정확히 뭐죠?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거예요?”
마르틴이 물어본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몸을 꼬며 배시시 웃었다.
“마르틴이라고 불러도 되는데, …나는 아드리안 경이랑 친해지고 싶거든.”
“역경과 고난을 견디고 이겨낸 마르틴 바이다 후작의 성공기가 우리 둘을 친하게 만들어준다고?”
엇? 마르틴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갑자가 ‘왓하하하’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손뼉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리더니 아드리안을 요염하게 흘겨보기까지 했다.
“아휴 정말, 우리 수호자께서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인 걸 몰랐네. 평소엔 어떻게 참고 지냈을까 몰라.”
대체 자신이 한 말 어디가 재미있었는지 전혀 모르겠는 아드리안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웃고 싶으면 웃으라지.
대충하고 그만 갔으면 좋겠네.
그러나 마르틴은 오히려 아드리안에게 바짝 붙어 앉으며 속삭였다.
“어? 딴생각하지? 무심하기도 해라. 잠깐 재미있다가 이게 뭐야. 지루하게.”
아드리안은 입을 꽉 다물고 한숨을 삼켰다.
끝까지 반응을 보이지 말고 지루해 죽어 버리게 할 걸.
아드리안이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마르틴은 자세를 바로 하고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겨우 규합된 클라우스파가 로베르트 백작이 죽으면서 다 다시 흩어지고 말았다는 건 알고 있을 테고…. 클라이드의 아드리안께서는 황기사라고 아는지 모르겠네.”
“황기사?”
“황태자가 돌아오기는 기다리는 사람들.”
황태자 이야기를 꺼내다니, 드디어 본론의 시작인가?
“황태자는 죽었어요. 장례식까지 치르지 않았나요?”
“그랬지.”
마르틴이 피식 웃더니, 팔걸이에 턱을 괴고 은근하게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한참 아드리안을 바라보던 마르틴이 싸악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장례를 치르긴 했지만, 황태자의 관은 비어 있었거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잖아.”
“그래서 황태자가 죽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모양이군요.”
“확신해.”
“비밀결사대라도 만들었나 보죠?”
“대충?”
“발각되면 죽을 텐데?”
“…뭐, 그것도 그렇지.”
마르틴이 과다하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렇지만 황태자가 살아만 있다면, 돌아와야지. 제국의 주인은 황태자잖아.”
“황태자가 돌아오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거죠? 호레스 밀란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친, 밀란의 오른팔인데?”
흐흐흐. 마르틴이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샐쭉 흘겨봤다.
“내가 바구니 하나에만 달걀을 담는 사람으로 보여? 밀란에게만 충성하겠냐고…. 나야말로 황태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란 말이야.”
“당신도 황기사라는 건가요?”
“응, 맞아! 나도 황태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밀란을 배신하겠다는 거군요.”
“진짜 충성을 바칠 상대를 찾는 거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뭔가요? 내가 고발할 거란 생각은 안 해봤나?”
마르틴이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이상야릇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게. 내가 어쩌려고 이랬나 몰라. 겁도 없이. …그렇지만 내 영혼이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고 하지 뭐야. 내가 당신을 본 순간 딱! 영혼의 끌림을 느낀 거지.”
“…영혼의 끌림?”
“운명이었나.”
“운…명?”
이런 헛소리를 듣고 있어 하다니.
아드리안은 무심한 표정을 가면처럼 쓰고 있었지만, 마음은 들끓었다.
언젠가는 발각되리라 생각했지만, 너무 빠르다.
루카를 부를까?
부르는 즉시 루카가 처리해 버릴 텐데.
그때 마르틴이 속삭였다.
“밀란이 나를 디아머드에 왜 보냈는지 알아?”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산샤 디아머드를 황후로 만들기 위해서야. 조나스 악셀과 결혼시킨다고.”
마르틴은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호레스 밀란이 마정석 광산까지 갖게 되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아? 그 결혼을 못 막을 바에야 산샤 디아머드를 죽여 버리는 게 낫지.”
번쩍 아드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루카를 부를 필요도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깔끔하게 처리해 버려야겠다.